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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이 함락되다 ( 668년 09월(음) )
한국사DB > 삼국사기 >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 보장왕(寶藏王) > 평양성이 함락되다
 
 
秋九月, 李勣拔平壤. 勣既克大行城, 諸軍出他道者, 皆與勣㑹, 進至鴨渌柵. 我軍拒戰, 勣等敗之, 追奔二百餘里, 拔辱夷城, 諸城遁逃及降者相繼. 契苾何力先引兵, 至平壤城下, 勣軍繼之. 圍平壤月餘, 王臧遣泉男産, 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 詣勣降, 勣以禮接之. 泉男建猶閉門拒守, 頻遣兵出戰, 皆敗. 男建以軍事委浮啚校勘 025 信誠, 信誠與小将烏沙·饒苖等, 密遣人詣勣, 請為内應. 後五日, 信誠開門, 勣縦校勘 026兵登城, 皷校勘 027噪焚城. 男建目刺不死. 執王及男建等.

 

校勘 025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圖로 되어 있다.
校勘 026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縱으로 되어 있다.
校勘 027  《구당서(舊唐書)》에는 鼓로 되어 있다.
 
 
평양성이 함락되다 ( 668년 09월(음) )
 
〔27년(668)〕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쳐서 빼앗았다. 〔이〕적이 이윽고 대행성을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만나 진격하여 압록책(鴨淥柵)註 001에 이르렀다. 아군이 막아 싸웠으나 〔이〕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백여 리를 쫓아 달려와서 욕이성(辱夷城)註 002을 쳐서 빼앗으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거나 항복하는 자가 계속 이어졌다. 글필하력이 먼저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 아래 도착하니 이적의 군대가 뒤따랐다.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자,註 003 보장왕이 천남산을 보내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白旗)를 가지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게 하였는데, 이적은 이들을 예로써 접대하였다. 천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병력을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이 군사에 관한 일을 승려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이 소장(小將)註 004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과 비밀리에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닷새가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병력을 풀어놓아 성에 오르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성에 불을 질렀다. 남건은 스스로를 찔렀으나 죽지 못하였다.註 005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註 001  압록책(鴨淥柵) :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압록강 하류 남안을 방비하는 목책 시설로 추정된다.
 
註 002  욕이성(辱夷城) : 고구려 성.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당군의 진격로를 고려하면 압록강 하류에서 평양에 이르는 경로 중에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도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註 003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자 :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8년 6월에 의하면 문무왕은 김유신을 대총관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한성(漢城)에 와서 머물렀고, 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 등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하여 당군과 합류하였다. 신라군은 영류산 아래에 이르렀고, 또 사천원(蛇川原)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였다고 한다.
 
註 004  소장(小將) : 직위가 비교적 낮은 장군을 말한다.
 
註 005  가을 9월에 이적이 ……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못하였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총장 원년(668) 9월 계사조 기사에 보이는 내용이다. 단 소장(小將)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 이름은 다른 자료에 의거한 내용인데, 전거가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도 신라측 전승 자료로 추정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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