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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2) 676년 이후 동북아 국제정세


買肖城(매소성)전투와 伎伐浦(기벌포)해전에서 신라에 패배한 것을 고비로 당은 한반도에서 철퇴하여 676년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이후 당은 허갈해진 요동지역을 충실화하여 동북아지역으로 재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하였다. 그런 정책의 일환으로 당 내지에 강제 이주시켰던 고구려유민과 보장왕을 676년에 다시 요동으로 귀환시키고 요동의 주민들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같은 해에 義慈王(의자왕)의 아들인 夫餘隆(부여융)을 熊津都督 帶方郡王(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봉하고 당 내지로 끌고 갔던 백제유민을 요동의 建安城(건안성)에 옮겨 웅진도독부를 이곳에 僑置(교치)시켰다.013) 그런 뒤 678년 재차 한반도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예상되는 신라의 강력한 저항과 이 시기 당의 서부지역을 압박하는 吐蕃(토번)의 공세로 인하여, 이 계획에 대한 반대 의견이 당 조정 내에서 강하게 일어나 좌절되었다.014) 그 뒤 東征(동정)의 논의는 다시 제기되지 못하였고 당의 지배영역은 요동에 한정되어졌다.


한편 요동의 당 세력은 말갈족의 움직임에도 주의하였다. 특히 말갈족과 과거 그들이 지배하였던 고구려유민들이 연결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만약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이 재차 결합한다면 요동의 지배권은 물론이고 당의 동북면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실제 676년 요동으로 귀환한 보장왕이 곧 말갈족과 모의하여 당에 저항하는 거사를 도모하다 발각되었다. 위협을 느낀 당은 다시 보장왕과 고구려유민에 대하여 당 내지로의 대규모 강제 이주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677년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에서 그 북쪽에 있는 新城(신성)으로 옮겼다. 이는 요동의 고구려유민과 말갈족과의 교섭의 길목을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내려진 조처였다. 이후에도 당은 이 가능성에 대처하였을 것이며, 그것이 안동도호부를 요동에 계속 유지하도록 한 주요 목적의 하나였다. 나아가 말갈족 내부의 동향에 대해서도 주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동지역 자체가 이미 戶口(호구)가 크게 감소되어 텅 빈 상태였으며, 말갈족에 대한 당의 영향력은 주로 요동지역 주변에 한정된 것이었다.


696년 거란족의 봉기로 당의 요동 지배가 난관에 봉착하자, 정면으로 안동도호부 포기론을 내세운 狄人傑(적인걸)의 상소에서 “요동은 이미 돌밭(石田)이 되었고, 말갈은 먼 지역으로서 鷄肋(계륵)과 같다”015)고 하였다. 이는 7세기말의 요동의 상태와 말갈에 대한 당의 관심과 영향력이 약하였던 일면을 전해준다. 당이 동만주지역의 말갈족에 대해 다시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은 725년 흑수말갈에 黑水府(흑수부)를 설치한 이후부터이다. 따라서 7세기 종반 사실상 대부분의 말갈족사회는 당의 영향력 밖에 있었다.


7세기 종반 신라의 세력 또한 동만주지역에까지 뻗칠 여유가 없었다. 신라는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후 더 이상의 북진은 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 국내의 사정과 국력의 한계 그리고 신라정부 자체의 정책적 의도 등이 함께 작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金春秋(김춘추)가 당 태종 李世民(이세민)과 함께 신라와 당간의 군사동맹을 맺을 때, 평양 이남지역을 신라 영토로 한다는 협약을 한 바 있다. 이런 협약은 상황에 따라 파기될 수 있는 것이지만, 新·唐戰爭(신당전쟁)중인 671년 문무왕은 唐將 薛仁貴(당장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협약의 내용을 다시 환기시켰다.016) 이는 당의 압박을 완화시켜 보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지만, 한편으로 당시 신라의 전쟁목적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신라군이 압록강을 넘어 진출한 적도 있지만 그것은 관위가 沙湌(사찬)인 薛烏儒(설오유)가 이끈 1만 명의 부대로서 고구려부흥군과 함께 행한 작전이었고,017) 대규모 병단을 대동강 이북지역에 진출시킨 일은 없다. 당군의 막강한 세력을 잘 알고 있고, 그리고 서남부 백제지역을 완전히 병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이상의 진출은 신라군에는 무리라는 판단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군을 패퇴시킨 후에도 신라는 새로 병합한 지역과 주민를 경영하는 데 주력하였고, 강력한 왕권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체제 구축에 골몰하였다. 684년 고구려유민 집단의 자치국인 報德國(보덕국)을 해체시키는 등 전국을 9州 5小京(9주5소경)으로 편제하였다. 한편 신문왕 원년(681) 金欽突(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진골 귀족들에 대한 일대 숙청을 단행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이런 대내적 체제정비에 주력하기 위해서는 대외적 안정이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그런데 676년 이후에도 신라와 당 사이에는 이면적인 대립이 지속되었다. 당은 신라의 대동강 이남지역의 병합을 인정하지 않았고, 720년대까지도 고구려와 백제의 왕손을 각각 ‘고려조선군왕’과 ‘백제대방군왕’으로 봉하여 당의 수도에 幽居(유거)시켜 놓고 있었다.018) 때가 되면 다시 이들을 앞장 세워 한반도로 쳐들어갈 수도 있다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朝貢使(조공사)를 파견하는 등 당과 관계개선을 위하여 노력하면서, 일면으로는 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한편 신라는 663년 백제부흥군을 지원한 일본군을 白江(백강) 하구에서 격파한 이후, 일본과 직접적인 충돌은 더 이상 없었지만 일본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라는 그 북방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신라가 그 북부 국경선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은 발해가 등장한 이후인 8세기 전반부터였다. 그런만큼 7세기 종반 신라의 세력이 동만주지역에 뻗칠 여지는 없었다.


7세기 후반 북아시아지역의 형세를 살펴볼 때, 돌궐 세력의 消長(소장)이 주목된다. 돌궐은 630년 㓤利可汗(힐리가한/일릭카간)이 당군에 격파된 이후 그 세력이 붕괴되어 당에 복속하게 되었다. 640년대에는 薛延陀(설연타)의 세력이 일시 강대해져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에 대항하기도 하였으나,019) 이 또한 당에 격파되어 급속히 약화되었다. 그후 몽고고원지역은 당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다가 680년대에 들어 돌궐이 다시 일어나 고비사막 이북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며 당을 압박하였다. 당시의 돌궐은 서로는 天山山脈(천산산맥)에 이르고 동으로는 興安嶺(흥안령)을 넘어 서북부 만주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돌궐은 長城(장성) 일대에서 당과 치열한 대립을 벌이고 있었고, 그 주력도 여기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서북부 만주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그리 컸던 것 같지 않다. 서북 만주에 있던 室韋族(실위족)이 7세기 종반 당으로부터 이탈하였지만, 곧 당군에 의해 격파되어 다시 복속하게 되었음을 볼 때 그런 면을 알 수 있다.020) 돌궐이 흑수말갈에 그 지방관인 吐屯(tudun)을 둔 것은 8세기초였다. 따라서 그 이전에 돌궐의 세력이 동부 만주지역까지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676년 이후 동만주 일원은 당·신라·돌궐 중 그 어느 쪽도 세력을 뻗치지 못하는, 국제 역관계에서 일종의 힘의 공백지대였다. 대내적으로도 통일된 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러한 여건에서 새로운 정치세력 형성의 모체가 될 수 있는 힘의 구심점이 등장할 때, 그것은 이 지역 사회에 급속한 변화를 몰고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새로운 구심력은 營州(영주) 방면에서 東走(동주)해온 大祚榮(대조영)집단이었다.



013) ≪資治通鑑≫권 202, 唐紀 18, 儀鳳 원년 2월 갑술.

014) ≪舊唐書≫권 85, 列傳 35, 張文瓘.   ≪資治通鑑≫권 202, 唐紀 18, 儀鳳 3년 9월.

015) ≪舊唐書≫권 89, 列傳 39, 狄人傑.

016) ≪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7월.

017) ≪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10년 3월.

018) ≪舊唐書≫권 23, 禮儀 3, 開元 13년 11월 임진.

019) 盧泰敦,<高句麗·渤海人과 內陸아시아 住民과의 交涉에 관한 一考察>(≪大東文化硏究≫23, 成均館大, 1989).

020) ≪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室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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