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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 1)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의 동향


(2) 고구려 멸망 후 말갈 부족들의 상태


7세기 후반 말갈족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靺鞨諸部(말갈제부)의 연혁에 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6세기말 7세기초의 말갈족의 상황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읍락에는 각각 추장이 있고 통일된 상태가 아니다. 무릇 일곱 부류가 있다. 그 하나가 粟末部(속말부)이다. 고구려와 접해있고 勝兵(승병)이 수천이며, 용감하고 무용이 뛰어나 매번 고구려에 쳐들어가 노략질을 하였다. 둘째는 伯咄部(백돌부)로서 속말부의 북쪽에 위치하며 승병이 7천이다. 셋째가 安車骨部(안거골부)로서 백돌부의 동북쪽에 있다. 넷째가 拂涅部(불열부)로서 백돌부의 동편에 있다. 다섯째가 號室部(호실부)로서 불열부 동쪽에 있다. 여섯째가 黑水部(흑수부)로서 안거골부의 서북에 있다. 일곱째가 白山部(백산부)로서 속말부의 동남에 있는데, 승병이 3천에 불과하다. 흑수부가 그 중 굳세고 강하다. 불열부 이동은 돌화살촉을 사용하는데 이는 옛적의 肅愼氏(숙신씨)이다.…그 땅에서는 보리·조·기장 등이 난다.…사람들은 사냥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靺鞨 - 수서 권81,열전 46, 동이 말갈).


이는 당시 중국인들이 전해 들은 사실을 간략히 기술한 것이다. 이들 말갈 7부 중 속말부는 대체로 粟末水(속말수), 즉 북류 송화강과 그 지류인 휘발하유역 및 부여성(長春/장춘, 農安/농안) 서북에 이르는 지역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백돌부는 북류 송화강 하류와 拉立河(납립하)유역, 안거골부는 지금의 하얼삔 일대인 阿城(아성)을 중심으로 한 평원 일대로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008) 불열부와 호실부는 납립하유역의 동편으로 막연하나마 비정될 수 있다. 흑수부지역은 동류 송화강 하류 일대이다. 백산부는 백두산 북쪽 斜面(사면)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말갈족사회는 ‘읍락마다 추장이 있고 통일된 상태가 아니다’라고 한 표현이 말해주듯, 상설적인 지배조직을 갖춘 어떤 통합력이 말갈족 자체 내에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각 촌락별로 자치를 영위하고 있었다. 위의 기록에서 말하는 ‘部’(부)라는 것도 그 구성원 전체에 대해 일정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단위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7부란 지역적 여건이나 방언·풍속 등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 말갈족의 여러 집단들을 중국인이 전해 들은 바에 의해 지역별로 구분하여 파악한 것일 뿐이다. 7부의 명칭을 볼 때 속말수·(장)백산·흑수 등과 같은 강이나 산의 이름으로 그 지역 주민들을 호칭하여 분류한 것이 있다. 그리고 어느 방면의 말갈족 중 가장 크거나 알려진 부족 또는 촌락의 명칭을 따서 그 지역 주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 있는데, 그런 경우 만약 다른 부락이 강성해져 알려지면 그 부락이 그 지역을 대표하게 되므로 중국인들이 파악하는 그 지역의 부의 명칭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의 견문의 범위가 확대되면 다수의 새로운 부의 설정도 가능해진다. 실제로≪舊唐書≫靺鞨傳(구당서 말갈전)에서는 “그 나라에는 수십의 부가 있고 그 각각에 추장이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7부라는 것은 말갈족의 7부족으로서 영속성을 지닌 집단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 7부의 동향을 살펴보면 각 방면의 말갈족의 동향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면 6세기말 7세기초 말갈 7부에 고구려의 영향이 어느 정도 미쳤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속말부의 경우 그 거주지역이 고구려의 중심부에 인접해 있었고, 또 고구려의 주요 성이 속말부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지배 아래 완전 귀속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나머지 부들의 경우는 이들의 고구려 멸망 후의 동향을 보면 역으로 그 전의 상태를 추론해 낼 수 있다. 고구려 멸망 후 말갈 부족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는 기록이 있다.


백산부는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는데, 평양이 함락된 후 그 무리의 대부분은 중국으로 옮겨 갔다. 백돌부·안거골부·호실부 등도 고(구)려 멸망 후 흩어져 (그 세력이) 약해져 그 뒤로 그들 부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는 바 없으며, 그 유민들은 모두 발해의 편호가 되었다. 오직 흑수부 만이 강성해져 16部로 나뉘어졌다(≪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靺鞨 - 구당성 권199 하, 열전 149 하, 북적 말갈).


이를 통하여 백산·백돌·안거골·호실부 등은 고구려의 지배 또는 강한 영향권 아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흑수부와 ‘大拂涅’(대불열)이라 칭할 만큼009) 그 세력을 확대한 불열부 만이 그 지배망 밖에 있었다.


말갈족은 고구려와 수·당간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고구려군에 있어 말갈족은 그 전부터 주요 병력원의 하나였다. 신라나 백제와의 전투 때에도 빈번하게 동원되었음을≪三國史記≫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말갈족은 삼림에 거주하며 수렵활동을 통하여 길러진 기동성이 뛰어난 종족이었다. 이러한 자질을 바탕으로 수·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의 전초병이나 기습부대로 활약하였고,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유격부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010) 그에 따라 70여 년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위의 기록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668년 이후에는 당에 의해 일부 강제 이주되기도 하여 말갈족사회는 전란의 여파로 혼란이 매우 심하였던 것 같다.


위의 기사에서 ‘奔散 微弱’(분산 미약)해졌다는 것은 백돌부 등의 명칭으로 분류·파악된 그 지역의 말갈족사회의 기존 질서가 무너졌음을 말해준다. 즉 고구려가 한 유력한 촌락세력을 그 지역의 대표적 존재로 인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일대의 여러 촌락들을 집단적으로 예속시켜 그 지역에 대한 지배망을 구축했었으나, 고구려 멸망 후 이것이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고구려에 충성하였기에 전란에 가장 큰 피해를 입어 약화되었고 하위 촌락들의 이탈과 저항을 받게 되니 흩어져 도망가거나 미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고구려 세력에 의해 편제되어 형성되어 있던 말갈 부족들의 기존 질서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다.011)


그 결과 7세기 종반 이후 말갈족 내에서는 越喜部(월희부)나 鐵利部 (철리부)등과 같은 새로운 집단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란과 고구려 멸망에 따른 충격의 여파를 받지 않고 더욱 번성하여 세력을 떨쳤던 흑수부조차도 16부락으로 나뉘어져 각각의 추장이 자치를 영위하는 상태였다.012) 따라서 7세기 종반 말갈족사회에는 어떤 강력하고 통일된 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듯 7세기 종반 동부 만주지역의 상황은, 기존의 고구려의 지배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이 통합된 정치세력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가운데서, 고구려유민 집단과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이 각지에서 흩어져 자치를 영위하고 있었다. 이는 동만주지역 주민들의 내부 사정에 기인한 것인 동시에 당시 국제정세에 의해 그러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008) ≪吉林通志≫권 10.

009) ≪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黑水靺鞨

010) ≪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

011) 盧泰敦, 앞의 글(1981b).

012) ≪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黑水靺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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