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9>후고려기(後高麗記)(32)
2010/05/10 21:34
발해의 승려 정소가 영선(靈仙, 에이센)으로부터 일본에 전해주었으면 하는 물품을 받았을 때, 영선(에이센)은 오대산의 철근사(鐵懃寺)라는 절에 있었다. 고향을 떠나 먼 땅에서 유학하고 있는 그에게 일본 조정에서 보내준 백금과 책을 갖고, 정소는 장안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 오대산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그걸 무사히 영선(에이센)에게 전달했다. 두 승려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친해졌던가에 대해서는, 영선(에이센)이 정소의 스승이었던 응공과는 친구사이였고 응공이 영선(에이센)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옷과 바리를 주고받았던 인연도 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敬宗寶曆中二朝唐]
경종 보력 연간(825-826)에 두 번 사신을 보내 입조했다.
건흥 5년, 신라에서는 또한번 반란이 일어났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주동자였다.
[十七年, 春正月, 憲昌子梵文, 與高達山賊壽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 攻北漢山州. 都督聰明, 率兵捕殺之.<平壤, 今楊州也. 太祖製○義寺齋文有 "高麗舊壤, 平壤名山." 之句.>]
17년(825) 봄 정월에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高達)의 산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함께 반란을 꾀하였다. 평양(平壤)에 도읍을 세우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하였다. 도독 총명(聰明)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붙잡아 죽였다.<평양은 지금의 양주(楊州)다. 태조께서 지은 장의사 재문(齋文)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의 명산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평양을 가리켜서 양주(楊州)라고 했는데, 양주는 고려 때에 한양부(漢陽府) 즉 지금의 서울을 가리켜 불렀던 지명이다. 평양 천도나 고려의 삼경제를 이야기할 때부터, 《북사》에서 고려의 별도(別都)라고 말했던 한성 즉 남평양에 대해서 다소 위치비정이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원래 남평양과 한성이 같은 곳을 의미하고, 위치는 지금의 황해도 재령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종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남평양을 한성, 지금의 서울에 있던 곳이라고 적어놓은 것 때문이었다.
《삼국사》기록에도 저렇게 "평양은 지금의 양주다[平壤今楊州也]." 라고 적어서 나를 헷갈리게 만든다.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이라면 백제의 도읍지인 위례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고려가 설치한 '남평양'은 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있었다는데, 이제 와서 한양을 평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식이 영감이 또 미친 소리를 한 것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재령군조에서는 재령의 옛 이름이 식성군息城郡, 다른 이름으로 한성군漢城郡이라고도 하며 내홀乃忽ㆍ한홀漢忽이라고도 한다고 적었으니 '남평양=재령'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근거없는 소리는 아니다.)
이이화 교수의 <한국사 이야기> 3권에도 한양 즉 서울에 남평양을 설치한 주체는 고려라고 했는데, 남평양이 재령에 있었다면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한양에 있었다고 한 남평양은 대체 무엇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또 한양이 원래 고려의 북한산군이었고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취했다고도 한다. 백제 근초고왕이 고려를 공격해 남평양을 빼앗았다는 《삼국유사》기록과 같은 것이라면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은 백제의 고유영토가 아니라 고려의 땅이었다는 말이 되고, 그것은 백제가 건국 초기에 한강 유역에서 일어났다는 기존의 주장과도 어긋나게 된다.
단재 선생의 말처럼 원래 평양에 있어야 할 지명을 경덕왕이 남쪽으로 '땅 옮기기'해서 한양에다 갖다붙인 것인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뒤에 원래의 '남평양' 즉 재령에 있던 고려의 별도를 위례성이 있던 서울로 옮겼다가 다시 성명왕 때에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재령으로 되돌린 것일까. 여기서는 두 가지를 다 적어둔다.
[十二月辛丑, 隱岐國馳驛奏上 "渤海国使高承祖等百三人到来."]
12월 신축(3일)에 은기국(隱岐國, 오키노쿠니)에서 역마를 통해[馳驛] 주상하였다. "발해국의 사신 고승조(高承祖) 등 103인이 이르렀습니다."
《류취국사(類聚國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渤海)ㆍ《일본기략(日本紀略, 니혼기랴쿠)》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33, 일문(逸文), 천장(天長, 텐죠) 2년(825)
이건 규정위반이다. 일본측의 입장에서 보자면. 안 그래도 먹을 것 없어 죽겠는데 사신이라고 오는 애들한테 호통쳐서 돌려보내지도 못하겠고 일본으로서는 미칠 노릇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시대의 조공은 일종의 '팬질'이었고, 그 '팬질'을 받는 대상은 그들 팬들을 관리하고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도 그 팬질보다 더한 '사여'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 발해가 바치는 조공도 일본에 대한 팬질이다.
[乙巳, 大內記正六位上布瑠宿祢高庭, 定領客使, 借出雲國介, 不稱領客使.]
을사(7일)에 대내기(大內記) 정6위상(上) 포류숙녜(布瑠宿祢, 후루노스쿠네) 고정(高庭, 타카니와)을 영객사(領客使)로 정하고, 잠시 출운국개(出雲國介, 이즈모노쿠니노스케)로 하였다. 다만 영객사(領客使)로 칭하지는 않았다.
《류취국사(類聚國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渤海)ㆍ《일본기략(日本紀略, 니혼기랴쿠)》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33, 일문(逸文), 천장(天長, 텐죠) 2년(825) 12월
이때 고승조를 따라온 일행 중에는 사문 정소도 끼어 있었다. 학문승 영선(에이센)의 부탁을 받아, 영선(에이센)이 갖고 있던 사리 1만 과와 2부의 불경, 조칙 다섯 통과 별도의 표문을 전해주고자 했고, 고승조는 영선(에이센)을 빌미로 다시 한번 일본을 향해 거의 '스토커'에 가까운 팬질을 한 것이다. 발해에서 사신을 보낸 것이 사문 정소의 강력한 건의 때문이었던가 하는 것은 둘째치고, 느닷없는 발해 사신의 방문에 일본이 얼마나 미칠 지경이었나 하는 것은 《일본후기》 3월 무진 초하루에 우대신(右大臣, 고다이진)이었던 등원제사(藤原緒嗣, 후지와라노 오츠구)가 왜황에게 올린 상소에서도 드러난다.
[三月戊辰朔, 右大臣従二位兼行皇太子傅臣藤原朝臣緒嗣言 "依去天長元年正月廿四日上表, 渤海入朝, 定以一紀. 而今寄言霊仙, 巧敗契期. 仍可還却状, 以去年十二月七日言上. 而或人論曰 '今有両君絶世之譲, 已越尭舜' 私而不告, 大仁芳聲, 縁何通於海外. 臣案, 日本書紀云 『誉田天皇崩, 時太子菟道稚郎子, 譲位于大鷦鷯尊, 固辞曰 '豈違先帝之命, 輙従弟王之言.' 兄弟相譲, 不敢當之. 太子興宮於菟道而居. 皇居空之, 既経三歳, 太子曰 '我久生煩天下哉' 遂於菟道宮自薨. 大鷦鷯尊悲慟越礼, 即天皇位, 都難波高津宮.』委曲在書紀, 不能以具尽. 于時讓國之美, 無赴海外. 此則先哲智慮, 深顧国家. 然則先王之旧典, 万代之不朽者也. 又伝聞, 礼記云 『夫禮者, 所以定親疎, 決嫌疑, 別同異, 明是非也.』禮不辞費, 禮不踰節. 而渤海客徒, 既違詔旨, 濫以入朝. 偏容拙信, 恐損舊典. 実是商旅, 不足隣客. 以彼商旅, 爲客損國, 未見治体. 加以, 比日雑務行事, 贈皇后改葬一, 御斎会二, 掘加勢山溝并飛鳥堰溝三, 七道畿内巡察使四, 可召渤海客徒五, 経営重畳, 騒動不遑. 又頃年旱疫相仍, 人物共尽, 一度賑給, 正税欠少. 況復時臨農要, 弊多逢送, 人疲差役, 税損供給. 夫君無想信, 安存天下. 民憂未息, 天災難滅. 非一人天下, 是万人天下. 縦今損民焉, 德有慙後賢. 伏請, 停止客徒入京, 即自着国還却. 且示朝威, 且除民苦. 唯依期入朝, 須用古例. 臣緒嗣雖久臥疾牀, 心神既迷, 而恩主之至, 半死無忘. 愚臣中誠, 不獲不陳. 謹重奉表以聞." 不許.]
3월 무진 초하루에 우대신(右大臣, 고다이진) 종2위 겸 행황태자전신(行皇太子傅臣) 등원조신(藤原朝臣, 후지와라노아손) 제사(緒嗣, 오츠구)가 말하였다.
"천장(天長) 원년 정월 24일의 상표(上表)에 의거하면 발해가 입조하는 것은 12년에 한 번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에이센의 말을 전한다는 핑계로 교묘하게 시기를 어겼습니다. 그 글을 돌려보냄이 옳습니다. 작년(825) 12월 7일에 말한 것에 따르되 누군가 '지금 양군(兩君)이 절세(絶世)의 양(譲)으로 이미 요순(尭舜)을 넘어섰다' 논하는 자가 있습니다. 사사로이 고하지도 않고 大仁芳聲은 縁이 어찌 바다 바깥에 통하겠습니까.
신이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니 『(誉田天皇, 호무다노스메라미코토)이 붕어하니 이때 태자 菟道稚郞子가 大鷦鷯尊에게 직위를 양보하며 사양하기를 '어찌 선제(先帝)의 명을 어기고 쉬이 제왕(弟王)의 말을 따르겠는가'하였다. 형제가 서로 양보하다가 감히 당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현도(菟道, 토도)에서 궁을 일으켜 살아 황거(皇居, 고쿄)가 텅 빈 지 3년이나 되자 태자가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아있으면 천하를 어지럽게만 할 것이다' 하고는 끝내 현도궁(菟道宮, 토도미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大鷦鷯尊는 슬퍼하며 예로서 장사지내고, 덴노의 자리에 올라 수도를 난파(難波, 나니와)의 고진궁(高津宮, 타카츠노미야)에 정했다』하였습니다. 자세한 사연은 서기(書紀)에 갖춰져 있으니 여기서 모두 갖춰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에 나라를 양보한 아름다움은 바다 바깥에서 따르지 못한 바입니다. 이는 곧 선철(先哲)의 지려(智慮)이며, 국가를 심히 걱정한 것입니다. 그러한즉 선왕의 구전(舊典)은 만대토록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전해 들으니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무릇 예(禮)라는 것은 친하고 먼 것을 정하고 의심쩍은 것을 가리며 같고 다름을 구별하여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함이니라』라 하였습니다. 예는 쓸데없이 말만 많은 것도 아니고 절도를 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발해의 객도(客徒)들은 이미 조지(詔旨)를 어기고 제멋대로 입조하였습니다. 偏容拙信하면 옛 법전을 어길까 두렵습니다. 실은 장사꾼들이며 인객(隣客)에는 맞지 않습니다. 장사꾼이면서 객(客)을 꾸며 나라에 손해를 주고 치체(治體)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 온갖 일을 행하는데 증(贈) 황후의 개장(改葬)이 첫번째이고 斎会에 햄차함이 둘, 加勢山의 저수지와[溝] 비조(飛鳥)의 堰溝를 파는 것이 셋, 7도(道) 기내(畿內, 기나이)에 순찰사(巡察使)를 보냄이 넷인데 발해객도를 부르는 것까지 더해져 다섯이 되었으니 경영할 일이 쌓여 쉴 겨를도 없이 떠들썩합니다. 또한 올해에는 가뭄이 잇따르고 사람이며 동물까지 모두 힘들어 하니 한번 구휼하자면 정세(正税)가 모자랄 지경입니다. 하물며 다시 농삿일에 힘써야 할 시간에 영접하고 전송함에 폐단이 많으며 사람들은 힘든 노역에 지쳐 세금을 거두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무릇 임금의 무상(無想)한 믿음으로 천하가 온전히 보전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걱정이 쉴 날이 없고 천재(天災)가 그칠 줄 모릅니다. 천하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오 만인의 천하입니다. 비록 지금은 백성이 손해를 보지만 덕은 후현(後賢)에게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객도들이 입경하는 것을 막으시고 곧 그 나라로 돌려보내소서. 조정의 위신을 세우시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소서. 오직 정해진 기한에 따라서만 입조하게 하시고 고례(古例)를 수용토록 하소서.
신(臣) 오츠구는 비록 병상에 누운지 오래 되어 심신(心神)은 이미 흐트러졌사오나 恩主之至는 半死無忘입니다. 우신(愚臣)의 중성(中誠)을 不獲不陳하소서. 삼가 표문을 중봉(重奉)하고 聞합니다."
허락하지 않았다.
《류취국사(類聚國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渤海) 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33, 일문(逸文), 천장(天長, 텐죠) 3년(826년)
전에도 말했지만 필자는 한문실력이 형편없다. 그래서 이것도 올리지 않으려다가 내용 설명을 위해서 보충자료로 올려놓을 필요성을 느껴서 미흡하나마 번역한 것을 올렸다. 무슨 쥐 뜯어먹은 것처럼 번역된 국서의 내용을 이해를 돕기 위해 요약해 설명하자면
"지난번에 발해 사신더러 분명 12년에 한번만 오라고 했는데 또 영선(에이센)의 말을 전한다는 핑계로 우리 말을 어겼다. 당장 그것들을 돌려보내자. 수도에도 들여선 안 된다. 말이 좋아 사신이지 실은 저것들, 자기 물건 팔아먹으려 온 장사치들이다. 지금 가뭄에 죽어날 지경인데, 황후 무덤도 개장하고 저수지도 파야 되는 시기에 발해 사신들 접대 때문에 또 경비를 차줄했다가는 우리 진짜 엿된다. 농사 지어야 되는데 사신 접대할 시간이 어디 있냐(천하가 니꺼냐?). 당장 돌려보내라."
뭐 이런 내용인데 발해 사신들을 가리켜서 상려(商旅), 즉 상단 무리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조공이라는 것은 상호호혜적(이지만은 않지만 아무튼 그렇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닌) 공무역의 일종이었다는 것일까.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물품은 주로 범이나 담비, 물개, 토끼 같은 동물의 가죽이었고(이 물품의 주요 고객은 단연 일본의 황족과 귀족 구교公卿들이었다.) 서민들에게도 질이 좀 떨어지는 가죽을 팔았는데, 돌아오면서는 비단과 견면, 실, 수은, 금은, 진주, 동백기름 같은 걸 갖고 왔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에서 화동개진이라는 일본 화폐가 발견되기도 했다던가.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입장에서는 일본에서의 모피 무역을 통해 발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 이익이 과연 목숨을 건 항해도 불사할 정도로 막대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발해 사신들도, 일본의 송사들도 동해 바다를 건너기 위해 견당사들이 중국으로 갈 때만큼이나 더 위험한 항해를 떠나지 않았던가.) 장사꾼이란 돈을 위해서는 칼날에 묻은 물방울도 핥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ㅡ저렇게까지 해서 돈 벌면 그걸 다 어디에 쓰는지 참. 더구나 모피라는 것은 습기를 머금으면 못 쓰게 되는데, 동해 바다를 건너면서 귀중한 상품에 바다의 습기나 염분이 스미지 않도록 어떻게 처리를 했을까 하는 것도 궁금하다.
[甲戌, 渤海客徒大使高承祖等入京. 安置鴻臚館.]
갑술(8일)에 발해객도의 대사 고승조 등이 입경하였다. 홍려관(鴻臚館, 고료칸)에 안치하였다.
《류취국사(類聚國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渤海) 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33, 일문(逸文), 천장(天長, 텐죠) 3년(826년) 5월
등원제사(후지와라노 오츠구)가 병든 몸까지 이끌고 말렸건만, 왜황은 기어이 고승조의 사신단이 평안경(헤이안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평안경(헤이안쿄)에서 고승조의 사신단(을 따라온 상인들)은 신나게, 평안경(헤이안쿄)의 구교와 황족들을 상대로 모피 장사에 나섰다. 관위를 가진 사신들은 '조공품'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조정의 '사여품'과 물물교환을 하는 방식으로 무역을 했고, 그 외에 하급 관리(역관 같은 부류)나 민간인들은 따로 구교들의 저택에 초청을 받는다던지 아니면 시장으로 들어가서 직접 파는 식으로(평안경도 장안을 모방한 도시. 주작대로 좌우로 동ㆍ서의 시市가 있었음) 자연스럽게 모피를 가져다 팔았을 것이다.
[戊寅, 渤海國使政堂省少卿高承祖授正三位, 副使高如岳正四位上, 判官王文信ㆍ高孝英二人正五位上. 錄事高成仲ㆍ陳崇彦二人從五位上, 譯語李隆郞ㆍ李承宗二人從五位下. 六位已下十一人, 又有叙位.]
무인(12일)에 발해국 사신 정당성소경[政道進少卿] 고승조(高承祖)에게 정3위를 내리고 부사(副使) 고여악(高如岳)은 정4위상(上), 판관(判官) 왕문신(王文信)ㆍ고효영(高孝英) 두 사람에게는 정5위상을 주었다. 녹사(錄事) 고성중(高成仲)ㆍ진숭언(陳崇彦) 두 사람에게는 종5위상을 주고 역어(譯語) 이융랑(李隆郞)ㆍ이승종(李承宗) 두 사람에게는 종5위하(下)를 주었다. 6위 이하 11인에게도 위계를 주었다.
《류취국사(類聚國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渤海) ㆍ《일본기략(日本紀略, 니혼기랴쿠)》 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33, 일문(逸文), 천장(天長, 텐죠) 3년(826년) 5월
내가 얻어본 《일본후기》문서파일에는 정도진소경(政道進少卿)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정당성소경(政堂省少卿)의 오자다. 《발해국지ㆍ장편》을 통해서 수정한다. 하지만 정당성엔 소경이라는 관직이 없는데 이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들은 이틀 뒤인 경진(14일)에 카가로 돌아갔고 다음날 귀국길에 올랐다. 다음은 왜황 쥰나가 인수왕에게 보낸 서신이다.
[辛巳, 天皇啓問渤海国王. 使承祖等, 転送在唐学問僧霊仙表物来. 省啓悉之. 転深嘉慰. 王信確金石, 操貞松■. ■国命於西秦, 五台之嶺非■, 敦隣好於南夏. 万里之航自通, 煙波雖遼, 義誠密迩. 有斐君子, ■心塞淵, 感激之懐, 不可■説. 土宜見贈, 深領遠情. 答信軽毛, 別附検到. 其釋貞素, 操行所缺者, 承祖周悉. 風景正熱, 王無恙也. 略此寄懐, 不復煩云.]
신사(15일)에 천황(미카도)은 발해국왕에게 계한다. 사신 승조 등이 당의 학문승 영선(靈仙, 에이센)의 표문과 물품을 전해주었다. 계한 바를 살펴 다 알았다. 마음에 심히 좋은 위안이 된다. 왕은 믿음이 금석(金石)처럼 확고하고 조정(操貞)은 송죽(松竹)과 같으니 국명(国命)을 받고 서진(西秦)으로 행차함에 오대지령(五台之嶺)을 멀다 않고 남하(南夏)와도 이웃처럼 두터운 우호를 다졌다. 1만 리 바닷길을 스스로 열었으니 안개 낀 바다는 비록 멀지만 의성(義誠)은 더욱 가깝다. 유비군자(有斐君子)는 그 마음가짐이 두텁고 성실하니 감격스러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토산물을 보내주니 먼 곳의 정의를 잘 받았다. 털끝만큼 가벼운 답신(答信)이나마 특별히 부치니 도착하면 삼가 받으시라. 그 석(釋) 정소(貞素)가 잘못한 것은 승조가 모두 알 것이다. 바람과 날씨가 한창 무덥거니 왕께서는 별일 없으시길. 이만 품은 생각을 줄이고 번거롭게 더 말하지 않노라.
《류취국사(類聚國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渤海) ㆍ《일본기략(日本紀略, 니혼기랴쿠)》 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33, 일문(逸文), 천장(天長, 텐죠) 3년(826년) 5월
일본 조정은 정소를 탓하면서도(뭘 잘못했는지는 밝히지 않은채) 영선(에이센)에게 백금을 전해달라고 그에게 맡겼다. 건흥 9년 겨울에 정소는 하정사를 따라 다시 당에 들어가 영선(에이센)을 찾아 오대산으로 향했지만, 영선(에이센)은 이미 영경사(靈境寺)에 없었다. 1년이 걸려 건흥 10년에 정소가 오대산에 도착했을 때, 영선(에이센)은 이미 죽은 뒤였다. 절의 욕실원(浴室院)에서 누군가의 손에 독살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그가 어떻게 죽었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不體塵心淚自읍 살아있을 때 그 마음 깨닫지 못해 눈물만 흐르네
情因法服奄幽泉 속세의 빈 껍데기만 황천에 묻었구나.
明朝당問滄波客 밝은 날 창파(滄波)의 나그네에게 물었지
的說遺규白足還 고귀한 설법만 남겨놓고 맨발로 돌아갔느냐고.
그리고 그 해에, 발해의 사신이 귀국할 때 정소는 뱃길로 오다가 도리포에서 폭풍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었다. 주인을 만나지 못한 백금과 함께.
'발해 > 정치,외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唐사신 최흔 발해 파견한건 反唐연합 무마위한 회유책 - 세계 (0) | 2014.06.29 |
---|---|
동해의 거친 풍랑을 무릅쓴 발해와 일본의 교류 - 구난희 (0) | 2014.05.19 |
발해의 3성6부 - 광인 (0) | 2013.09.23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8>후고려기(後高麗記)(31) - 광인 (0) | 2013.09.23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4>후고려기(後高麗記)(27) - 광인 (0) | 2013.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