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8>후고려기(後高麗記)(31)
2010/05/09 15:48
고려인의 제가 허무하게 무너지던 그 해 11월,
인수왕은 즉위하고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甲午, 渤海國遣使獻方物. 上啓曰 "仁秀啓. 仲秋已涼. 伏惟, 天皇起居万福. 即此仁秀蒙旡. 慕感徳等廻到. 伏奉書問, 慰沃寸誠, 欣幸之情, 言無以兪. 此使去日, 海路遭風, 船舶摧残, 幾漂波浪. 天皇, 時垂惠領, 風義攸敦, 嘉■頻繁, 供億珍重. 實賴船舶歸國, 下情每蒙感荷. 厚幸々々. 伏以, 兩邦繼好, 今古是常, 万里尋修, 始終不替. 謹遣文籍院述作郞李承英, 賚啓入覲. 兼令申謝, 有少土物, 謹錄別狀, 伏垂昭亮幸甚. 雲海路遥, 未期拝展. 謹奉啓." 問慕感德等 "還去之日, 無賜勅書. 今檢所上之啓云 '伏奉書問', 言非其實. 理宜返却. 但啓詞不失恭敬, 仍宥其過, 特加優遇." 承英等頓首言 "臣小國賎臣, 唯罪是待. 而日月廻光, 雲雨施澤, 寒木逢春, 涸鱗得水. 戴荷之至, 不知舞踏."]
갑오(20일)에 발해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상계(上啓)에서 말했다. "인수(仁秀)는 계(啓)합니다. 중추(仲秋)가 이미 서늘해지고 있습니다. 엎드려 빌건대 천황(天皇, 미카도)께서 일상에 만복(万福)이 깃드시기를. 이 인수, 은혜를 입어 별탈도 없습니다. 모감덕(慕感徳) 등이 돌아왔습니다. 엎드려 서문(書問)을 받드니 넘치는 정성이며 기쁘고 다행스런 생각을 말로는 표현을 못 하겠습니다. 이 사신이 가던 날, 뱃길에 폭풍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파도에 휩쓸려 며칠을 표류했습니다. 천황(미카도)께서는 때를 맞춰 은혜로운 인도를 내리시고 풍의(風義)를 두터이 하시고, 가상히 여기심을 자주 내리실뿐 아니라 공의(供億)도 진중하셨습니다. 실로 배가 귀국하게 된 것은 이러한 덕택이라 매번 감동을 받았으니 실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엎드려 빌건대 양방(両邦)의 우호가 지속되고[継好] 옛날과 지금이 다를 것 없이 상례를 따르며 만리 떨어져 있어도 교빙을 닦음이 시종 변함없기를. 삼가 문적원(文籍院)의 술작랑(述作郞) 이승영(李承英)을 보내어 계를 가지고 뵙게 합니다. 겸하여 사례드리며 약간의 토물(土物)을 보냈는데 삼가 별장(別狀)에 적어두었으니 삼가 밝게 헤아려주시면 아주 다행이겠습니다. 구름 덮인 바다에 길은 멀고 배알할 날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삼가 봉계(奉啓)합니다." 모감덕 등에게 물었다. "돌아가던[還去] 날에 칙서를 내린 적이 없다. 지금 올린바 계문을 보니 '삼가 서문을 받들어[伏奉書問]' 어쩌고 한 것은 말이 실제와 맞지 않다. 이치상 마땅히 돌려보내야 한다. 다만 계의 글이 공경(恭敬)을 잃지 않았으니 이에 그 잘못을 용서하여 특별히 優遇를 더한다." 승영 등이 頓首하고 말하였다. "신은 소국(小國)의 천한 신하로서 죄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해와 달이 廻光하고 운우(雲雨)가 은택을 베푸시니 차갑던 나무는 봄을 맞이한 듯, 마른 물고기가[涸鱗] 물을 만난 듯 합니다. 戴荷之至에 舞踏을 알지 못합니다."
《류취국사(類聚国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조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7, 일문(逸文), 홍인(弘仁, 코닌) 10년(819) 11월
관원도진(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이 지은 《류취국사》(뤼죠고쿠시)나 《일본기략》(니혼기랴쿠)에 보면, 819년 정월 경진(7일)에 5위 이상의 관인들과 발해의 번객(蕃客)들에게 풍락전(豊樂殿)에서 잔치를 열어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발해국의 입근대사(入覲大使) 이승영 등에게 위계를 주되 차등이 있었다[又渤海國入覲大使李承英等叙位, 有差]"고 적었던 것을 《일본후기》(니혼고키)에서 인용해 적은 것이 보이고 있다. 또한 기축(16일)에도 발해의 사신들은 풍락전에서 답가(踏歌) 공연을 보고, 녹을 수여받았다.
<풍락전의 복원모형. 1987년부터 88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지금은 일본의 국가지정문화재다>
풍락전은 이름 그대로, 평안(헤이안) 시대 일본 조정에서 연회를 열던 곳이었다. 대내리의 정청인 조당원의 서쪽에 인접해 축조되었는데, 남쪽에 정문인 풍락문을 빼고 모두 담으로 둘러쳤다. 10월 17일에 행하는 궁중의 신상제(新嘗祭, 니이메노마츠리)나 대상제(大嘗祭, 오오니에노마츠리) 말고도 정월 초하루의 신년하례, 왜황의 생일잔치 및 사례(射禮), 사신 접대잔치 등도 이곳에서 행해졌다. 풍락전이 정전으로 쓰이던 때에는 이곳에 고어좌(高御座, 타카미쿠라 즉 왜황의 옥좌)도 설치되었는데, 조정의 기능이 서서히 왜황의 사적 주거지인 내리(內裏, 다이리)로 옮겨가면서
조정의 의례와 행사는 풍락전이 아닌 자신전에서 행해지게 되었고, 10세기에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것이 결국 강평(康平, 코헤이) 6년(1063년)에 화재로 전소, 이후 재건되지 못한다.
[甲午, 賜渤海王書曰 "天皇啓問渤海国王. 承英等至, 省敬具之. 王信義成性, 礼儀立身, 嗣守蕃緒, 践修旧好. 候雲呂而聳望, ■風律以馳誠. 行李無曠於歲時, ■贄不尽於天府. 況前使感德等, 駕船漂沒, 利渉無由. 朕特賜一舟還. 其依風之恩, 王受施勿忘, 追迪前良, 虔發使臣, 遠令報謝. 言念丹款, 深有嘉焉. 悠悠絶域, 煙水間之, 廼■北嶺, 遐不謂矣. 因還寄物, 色目如別. 春首余寒, 比無恙也. 擾局之內, 直並平安. 略遣此不多及."]
갑오(21일)에 발해왕에게 글을 내렸다. "천황(미카도)은 발해국왕에게 계문합니다. 승영 등이 이르러 아뢴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왕은 신의(信義)로 성품을 이루고 예의(礼儀)로서 입신하여 왕업을[蕃緒] 이어받아 지키며 옛 우호를 실천하였소.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멀리 바라보고 바람소리를 따라 성심을 실어 보냈소. 행리(行李)는 세시에 무광(無曠)하고, 진기한 보물도 천부(天府)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하물며 앞서번 사신 함덕 등은 배를 태워 보냈지만 표류하여 바다에 빠지니 물을 건너갈 방도가 없었소. 짐은 특별히 배 한 척을 주어 돌려보냈소. 그 의풍지은(依風之恩)을 왕은 받고 잊지 않으며 이전의 훌륭한 이치를 따라 경건히 사신을 보내어 멀리서 사례하게 하였소. 단관(丹款)을 생각하니 심히 가상하오. 머나먼 절역(絶域)이 넓은 물을 사이에 두고 북쪽 고개를 바라보아도 멀어서 말할 수가 없구료. 인하여 돌아가는 길에 물품을 부치니 목록은 따로 적어두었소. 초봄의 남은 추위에 무고하시기를. 어지러운 사이에 모두 평안하시기 바라오. 이만 줄이고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류취국사(類聚国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渤海) 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8, 일문(逸文), 홍인(弘仁, 고닌) 11년(820) 정월
인수왕이 보낸 사신은 문적원술작랑. 문관이었다. 문적원은 당의 주자감과도 같은, 발해국의 모든 문헌과 도서를 관장하는 관청이지마는 술작랑이라는 관직은 문적원에만 있고 주자감에는 없었던 관직이다. 일본에 오는 발해의 사신들은 강왕 때를 전후해 다시 무관이나 그와 관련된 관청(지부소경)의 관료들로 채워지다가, 이때 다시 또 문관직으로 교체되고 이후로 쭉 문관만을 보내게 된다. 《일본후기》(니혼고키)는 또한 《일본기략》(니혼기랴쿠)를 인용해 다음날인 을미(22일)에 당의 월주(越州) 사람인 주광한(周光翰)과 언승칙(言升則) 등을 발해 사신의 귀국길에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것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원래 작년 6월 임술(16일)에 신라의 배를 타고 와서 당에서 일어난 사도왕의 난과 그로 인한 당의 사정을 일본에 전한 인물들이다.
[十五季閏正月, 唐加王金紫光祿大夫檢校司空.]
15년(820) 윤정월에 당이 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檢校司空)을 더해주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선왕 건흥 3년(820)
건흥 3년. 윤정월에 온 발해 사신들은 2월 경인(18일)에 인덕전(麟德殿)에서 헌종을 만났다. 사신들이 온 것을 환영하는 잔치며 사신들에게 주는 사여품과 함께, 당조는 인수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검교사공(檢校司空)을 더해주었다. 1권짜리 《발해고》에는 윤정월이라는 단어 뒤에 '遣使朝唐'이란 말이 더 붙어있었는데 영재서종본(4권짜리)《발해고》에서는 빠졌다.
[十一月, 遣使入唐朝貢. 穆宗召見麟德殿, 宴賜有差.]
11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목종이 인덕전(麟德殿)에서 불러 접견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으며 물품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삼국사》 권제10, 신라본기10, 헌덕왕 12년(820)
신기하게도, 신라가 사신을 보낸 바로 다음 달에 기다렸다는 듯이 발해도 사신을 당에 보낸다. 이 기록은 영재서종본 《발해고》에는 없고 1권짜리 《발해고》에만 등장한다.
[十二月, 又遣使朝唐]
12월에 또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입조했다.
《발해고》 군고(君考), 선왕 건흥 3년(820)
《책부원귀》에 기록된바, 12월 임진(24일)에 인덕전에서 발해 사신을 면대하고, 잔치를 열어준 뒤에 사신의 신분에 따라 차등있게 하사품을 내려주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낸 것에 대해 발해가 뭔가 '민감하게' 여길 것이 있었다는 걸까?
[秋七月, 浿江南川二石戰.]
가을 7월에 패강(浿江)과 남천(南川)의 두 돌이 서로 싸웠다.
《삼국사》
패강이라는 강이 지금의 대동강을 가리킨다고 치면, 남천은 무슨 강을 뜻하는 것인가? 백과사전 찾아보니까 남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은 우리 나라 북쪽에만 세 줄기가 있다. 황해도 서흥군 양암리(陽岩里) 감악산(583m) 북쪽 사면에서 발원해 평산군의 평화노동자구와 복수리(福水里)에서 예성강으로 흘러드는 강이 있고, 평안북도 벽동군·동창군·창성군의 경계에 있는 단풍덕산(1,159m) 북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벽동군 북부 남서리(南西里)에서 수풍호로 흘러드는 강(압록강 제1지류), 그리고 자강도 장강군 덕령봉(1,513m)에서 발원하여 강계시 남문동(南門洞)과 석현동(石峴洞)에서 장자강으로 흘러드는 강. 이렇게 세 종의 강이 있지만 이 중 어떤 것도 대동강과 합류하는 강은 없다.
두 돌이 서로 싸웠다는 것부터, 서로 강줄기가 갈라져 있어 다른 쪽에서 흘러오다 강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에서 충돌했다는 말이 아니라면, 가만히 흐르는 강물 두 개에서 뭐하러 돌들이 서로 싸웠다는 얘기가 나왔겠나.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浿江南川'이라는 말이 단순히 '패강의 남쪽 지류'를 가리키는 것일까? 서흥에서부터 평산에서 예성강과 합쳐지는 그 남천이라면, 이 기록의 '패강'은 대동강이 아니라 예성강이 된다. 고려 때까지 예성강 너머로 황해도와 평양 일대까지는 모두 패서(浿西)라고 불렸으니 이 패강이 대동강이 아닌 예성강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 혼자서 생각할 뿐이다.
[乙巳, 渤海國遣使獻方物. 國王上啓曰 "仁秀啓. 孟秋尙熱, 伏惟, 天皇起居万福. 即仁秀蒙免. 承英等至, 伏奉書問. 用院勤佇, 俯存嘉■, 慄■伏増. 但以貴國弊邦, 天海雖阻, 飛風転幣, 風義是敦. 音符每嗣於歲時, 惠賚幸承於珍異. 眷念之分, 一何厚焉. 仁秀不才, 幸修先業. 交好庶保於終始, 延誠冀踵於尋修. 伏惟, 照鑑幸甚. 謹遣政道省左充王文矩等, 賚啓入覲, 遠修国礼, 以固勤情. 奉少土毛, 謹錄別紙, 惟垂檢到. 靑山極地, 碧海連天. 拝謁未由, 伏増鴻涯. 謹奉啓."]
을사(13일)에 발해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국왕이 올린 계(啓)에서 말하였다. "인수는 계합니다. 맹추(孟秋)가 아직 더운데, 엎드려 바라건대 천황(미카도)께서 만복이 기거하시기를. 이 인수는 은혜를 입어 무사합니다[蒙免]. 승영 등이 이르러서 엎드려 바친 서문을 보았습니다. 관원을 재촉하여 훌륭한 선물을 내려주시니 황송하게 거두어들임이 더합니다. 다만 귀국과 폐방(弊邦)은 하늘과 바다가 막혀 있어도 국서와 선물이 서로 오가고 풍의(風義)는 두터웠습니다. 음부(音符)가 세시마다 이어지니 진이한 선물로 은혜와 행운을 주고 받았습니다. 돌아보고 생각함을 나누는 것이 하나같이 어쩌면 이리 두터운지요. 인수는 재주 없는 몸으로 요행히 선업(先業)을 이어받았습니다. 교호(交好)는 시종 보존되며 교빙을 닦아 정성스러운 영접을 이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밝게 살펴주심이 실로 다행입니다. 삼가 정당성좌윤[政道省左充] 왕문거(王文矩) 등을 보내어 계를 지니고 입관(入覲)하게 하며 멀리서 국례(国礼)를 닦아 근정(勤情)을 두터이 할 것입니다. 조그만 것이나마 토모(土毛)를 보내니 삼가 별지(別紙)에 적어두었습니다. 도착하면 살펴 받으시기를. 청산(靑山)은 땅끝에 이르고 벽해(碧海)는 하늘과 이어있어 배알할 길 없이 홍애(鴻涯)만 더할 뿐입니다. 삼가 봉계(奉啓)합니다."
《류취국사(類聚国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조ㆍ《일본후기(日本紀略, 니혼기랴쿠)》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9, 일문(逸文), 홍인(弘仁, 코닌) 12년(821) 11월
이때 일본을 다스리던 것은 52대 왜황 차아(嵯峨, 사가)였다. 국서 안에서, 처음으로 정당성좌윤(政堂省左充)이라는 관직의 존재가 확인된다. 《발해고》에 보면 발해 6부를 지배하는 3성(省)의 이름이 언급된다. 3성 6부. 국사 시간에 발해의 정치제도 배울 때마다 꼭 외우던 것.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원래 당에서는 중서성ㆍ문하성ㆍ상서성이었던 것이 발해에 넘어와서 정당성ㆍ선조성ㆍ중대성으로 나뉘었다. 조선조에 영상(영의정)이 좌ㆍ우상(좌ㆍ우의정)을 통솔하던 의정부체제처럼 발해에서도 정당성 하나가 선조성과 중대성 모두를 관할했다.(6부는 정당성에 딸려있는 관아였다.)
정당성의 최고 수장이 바로 대내상(大內相)이고 좌ㆍ우 사정(司政), 좌ㆍ우 윤(允)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당조의 복야(僕射)와 승(丞)에 해당한다고 했는데, 선조성의 좌상(左相)ㆍ좌평장사(左平章事)ㆍ시중(侍中)ㆍ좌상시(左常侍)ㆍ간의(諫議), 중대성의 우상(右相)ㆍ우평장사(右平章事)ㆍ내사(內史)ㆍ조고사인(詔誥舍人)은 모두 정당성의 통솔을 받았고 선조성과 중대성의 좌ㆍ우 평장사는 정당성의 좌ㆍ우 사정보다 높았다.
같은 3성 6부라도 결정된 정령(政令)을 실제 집행하는 상서성이 중서성과 문하성의 지배를 받던 당조와는 정반대로 발해에서는 거꾸로 정당성이 선조성과 중대성을 지배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조성은 당의 문하성과 마찬가지로 세론(世論)을 대표해 신료들의 의견을 천자에게 알리며 때로는 천자가 내린 조칙에 대해 시시비비를 반박하는, 고려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대간처럼 간쟁 및 봉박의 기능도 맡고 있었던 관청이다. 그리고 중대성은 당의 중서성처럼 천자의 명령을 각 관청에 하달하는 기관이자 천자의 조칙(詔勅)을 기초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을 모두 실제 집행기관 즉 사법부와 마찬가지 격인 정당성이 모두 총괄했다면 발해의 행정은 법안을 새로 만들거나 법안을 반박하는 것보다는 법안을 실제로 집행할 수 있는 방법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말일까.
[穆宗長慶二年正月, 四年二月皆遣使朝唐. 長慶中凡四朝唐.]
목종 장경 2년(822) 정월, 4년(824) 2월에 모두 사신을 보내어 당에 입조하였다. 장경 연간에 무릇 네 번 사신을 보냈다.
《발해고》에서 목종 장경 2년 즉 건흥 4년(822) 정월에 사신을 보냈다고 한 것은 《책부원귀》에 따르면 정월 계사 초하루 임자(20일)의 일인데, "발해의 사신을 인덕전에서 면대하고 연향과 하사를 차등에 따라 하였다 [對渤海使者於麟德殿, 宴賜有差]."고 나온다.
[御豊樂殿, 宴五位已上及蕃客, 奏踏歌. 渤海國使王文矩等打毬. 賜綿二百屯爲賭. 所司奏樂, 蕃客率舞. 賜祿有差.]
풍락전에 행차하였다. 5위 이상과 번객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답가를 연주하였다. 발해의 사신 왕문거 등이 타구하였다. 내기로 걸었던[賭] 면 2백 둔을 내려주었다. 소사(所司)가 음악을 연주하자 번객은 춤을 추었다[率舞]. 녹을 차등있게 내렸다.
《류취국사(類聚国史, 뤼죠고쿠시)》권제72 사예(射禮)ㆍ권제194 발해조 및 《일본기략(日本紀略, 니혼기랴쿠)》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30, 일문(逸文), 홍인(弘仁, 코닌) 13년(822) 정월 무신(16일)
827년에 성립된 《경국집》이라는 일본 한시집에 보면 차아(사가) 왜황이 발해 사신의 격구를 보고 지은 시가 소개되어 있다. 차아(사가) 왜황이 즉위한 것이 809년이고 사망한 것이 842년인데 그 사이에 발해 사신이 격구한 기록은 왕문거가 왔을 때 뿐이니 아마 그때 지은 시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수록했다.
꽃 피는 봄날, 활짝 개인 이른 아침에
사신들은 때맞춰 앞뜰로 나선다.
초승달처럼 허공으로 휘두르는 막대
공은 유성이 달리듯 땅 위에 구른다.
좌로 받고 우로 막아 문을 향해 다투는데
떼지어 달리는 소리 우레처럼 어지럽네.
북을 울려라 외치면서 급하기도 하지.
관중은 오히려 빨리 끝났다고 아쉬워하는데.
격구는 발해인들의 주요 장기 가운데 하나였다. 나무로 만든 장채를 가지고 털실로 짠 공을 상대편의 구문 바깥으로 쳐내는 이 경기는 원래 당조에서 전래되었다. 고려나 조선조에 이르면 남녀노소 누구나 선호하는 스포츠로 발전하는데, 발해인들은 격구에 관한 한 동아시아에서 1,2위를 다투는 강국이었다. (지금 수원에 민속놀이로 전해지는 장치기놀이도 격구가 민속화해 생긴 것이다.) 한편 발해의 사신들은 이 달에 다시 조집전(朝集殿)에서 열린 잔치에 초청을 받았다.
조집전은 말 그대로 입궐한 신하들이 회창문(會昌門, 평안경 황궁의 남문)이 열릴 때까지 몸 점검도 하면서 기다렸던 일종의 대기실 같은 곳이다. 남문 전방 좌우에 두 개가 설치되었는데 각기 동ㆍ서 조집전이라 불렸고, 벽도 창호도 없이 개방되어 있었다. 대화(大和, 다이카) 3년(647년) 왜황 고토쿠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해, 관위를 가진 관리들은 매일 아침 오전 4시 무렵까지 조정의 남문 바깥에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해가 뜨는 대로 들어와 왜황에게 절하고 정오에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조당에서 정무를 볼 것이며 지각한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조집전은 나라의 당초제사(唐招提寺, 토쇼다이지)의 강당으로 천평승보(덴표쇼호) 4년(760년)께에 평성경(헤이죠쿄)의 동조집전을 옮겨 지은 것이라 한다. 지금 교토에 있는 헤이안진구의 정문 즉 신문(神門) 좌우의 전사(殿舍)도 조집전을 본떠 만들었다.
[癸丑, 文矩等帰蕃. 賜国王書曰 "天皇啓問渤海国王. 使至省啓, 深具雅懐. 朕以菲昧, 虔守先基, 情損善隣, 慮切来遠. 王俗傳礼楽, 門襲衣冠. 器範淹通, 襟礼劭挙. 其儀不■, 執徳有恒, 靡憚艱究, 頻令朝聘. 絶鯤瞑而掛帆, 駿奔滄波随雁序, 磬制絳闕, 不有君子, 其能国乎? 言念血誠, 無忘興寝. 風馬異壌, 斗牛同天, 道之云遥, 愛而不見. 不少国信, 至宜領受. 春初尚寒, 比平安好. 今日還次, 略此不悉.]
계축(21일)에 문거(文矩) 등이 귀국하였다[帰蕃]. 국왕에게 글을 내렸다. "천황(미카도)은 발해국왕에게 계문하노라. 사신이 이르러 계를 바치니 아회(雅懐)가 심히 잘 갖추어져 있었도다. 짐은 둔하고 우매한 몸으로[菲昧] 선기(先基)를 받들어 지키며 선린(善隣)에 대한 정의를 품고 있으나 오가는 길이 멀어 몹시 걱정하는 바이다. 왕께서는 세상에 예악(禮樂)을 전하시고 집안의 의관(衣冠)을 이어받으셨다. 법도와 규범에 두루 통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힘써 받든다. 그 의(儀)는 그르치는 법이 없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덕을 지키며 간절히 추구함을 꺼리지 않고 수차례 조빙(朝聘)하였다. 곤(鯤)이 사는 바다를 가로질러 돛을 달고서, 창파(滄波)를 빠르게 달려 나는 기러기의 줄을 따라 아름다운 벽옥을 궐에 보내니, 군자가 없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언념(言念)과 혈성(血誠)은 자나깨나 잊지 않고 있노라. 바람은 머나먼 이역을 말처럼 달릴 수 있고 두우(斗牛)는 같은 하늘에 있으나 길이 아득히 머니 사모하면서도 볼 수 없구나. 자그마한 국신(國信)이나마 보내니 도착하면 살펴 받으시라. 초봄은 아직 춥건만 편안하기를 바란다. 오늘 돌아가는 것은 이같이 생각하며 자세한 것까지 언급하지 못하겠도다."
《류취국사(類聚国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渤海) 및 《일본기략(日本紀略, 니혼기랴쿠)》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30, 일문(逸文), 홍인(弘仁, 코닌) 13년(822) 정월
왕문거 등이 돌아오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발해 남쪽의 신라는 시끄러웠다. 황족 김헌창이 웅천주(공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 反叛. 國號長安, 建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已屬.]
3월에 웅천주도독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세워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였다. 무진(武珍)ㆍ완산(完山)ㆍ청(菁)ㆍ사벌(沙伐)의 네 주 도독과 국원(國原)ㆍ서원(西原)ㆍ금관(金官)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 · 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으려 하였다.
《삼국사》 권제10, 신라본기제10, 헌덕왕 14년(822)
무열왕계의 왕통이 끊어진 신라에서는 한동안 무열왕계와는 상관이 없던 내물왕계 왕족들이 즉위해 다스렸는데, 흔히 알려진 바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이 휩쓸었던 하대신라의 이미지와는 달리, 원성왕 이래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평화는 원성왕의 증손자 애장왕이 숙부 헌덕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살해당하면서 깨져버리고 말았다. 왕위계승의 원칙이 '혈통'과 '법통' 같은 명분과 도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힘과 무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난세가 헌덕왕의 찬탈 때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후 신라는 엄청난 전란에 휩쓸려 결국 나라가 기울게 된다.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은 헌덕왕 때 일어난 반란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전국적이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다.
[浿江山谷間, 顚木生蘖, 一夜高十三尺, 圍四尺七寸.]
패강의 산골짜기에 쓰러진 나무에서 움이 돋아 하룻밤 동안에 높이가 열세 자, 둘레가 네 자 일곱 치나 되었다.
《삼국사》 권제10, 신라본기제10, 헌덕왕 14년(822) 3월
반란은 한 달만에 진압되었는데, 이 달에 패강에서는 쓰러진 나무에서 길게 움이 돋아있는 것이 목격된다. 죽은 나무에서 다시 싹이 돋았다는 이야기는 옛 기록에서는 으레, 죽은 줄 알았던 무언가가 새롭게 다시 살아나 크게 떨칠 징조로 해석되곤 했다.
[二月, 合水城郡·唐恩縣.]
2월에 수성군(水城郡)과 당은현(唐恩縣)을 합하였다.
《삼국사》 권제10, 신라본기제10, 헌덕왕 15년(823)
수성군은 《삼국사》잡지에 보면 "본래 고구려 매홀군(買忽郡)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本高句麗買忽郡, 景德王改名.]."고 나온다. 헌덕왕 때에 당은현과 합쳤다는 기록을 보면 이때에 당은현 즉 당은군은 수성군과 통합된 것 같은데 기록에는 빠져 있다. 『광개토태왕릉비』에 태왕이 백제로부터 빼앗았다는 58성 가운데 하나인 모수성(牟水城)이
수원의 옛 이름인 걸까. 한때 수원이 모수국(牟水國)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니. 고려 땅이라는 연고 때문에 소개해봤다.
[壬申, 加賀国言上 "渤海國入覲使一百一人到着状."]
임신(22일)에 가하국(加賀國, 카가노쿠니)에서 말하였다. "발해국의 입근사(入覲使) 101인이 장(狀)을 가지고 이르렀습니다."
《류취국사(類聚国史, 뤼죠고쿠시)》권제194, 발해(渤海)ㆍ《일본기략(日本紀略, 니혼기랴쿠)》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31, 일문(逸文), 홍인(弘仁, 고닌) 14년(823) 11월
발해에서 온 사신은 맞는데, 대사의 이름이 고정태(高貞泰)였고, 부사의 이름은 성을 알수 없는 장선(璋璿)이라는 것 말고는 이들의 관직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12월 무자(8일)에 정지(停止) 종4위하(下) 기조신(紀朝臣, 키노아손) 말성(末成, 스에나리)와 掾秦宿祢 도주(嶋主, 시마누시)를 시켜서 이들 사신의 안부를 물으러 카가에 갔더니, 하필 그 해에 눈이 많이 와서 오갈 길이 막혔다. 이듬해 정월 을묘에, 발해객도(渤海客徒)로서 대사(大使) 이하 녹사(録事) 이상 여섯 명에게 겨울 의복을 주었다고 《일본후기》(니혼고키)에서 전하고 있었다. 홍인(코닌) 15년을 천장(天長, 텐죠) 원년으로 고친 것도 824년의 일이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차아(사가) 왜황의 뒤를 이어 4월에 황태자가 순화(淳和, 준나) 왜황으로 즉위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2월 임오일에 이르러 일본 조정의 조치에 의해 거의 '쫓겨나다시피'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본후기》(니혼고키)에는 4월 병신(17일)조에 "월전국(에치젠노쿠니)에서 바친 발해국의 신물을 둘러보고, 아울러 대사가 따로 바친 물품도 살폈다[覽越前國所進渤海国信物, 幷大使別貢物]."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 거란산 큰 사냥개[大狗] 두 마리와 개 두 마리는 예전에 바쳐져 있던 것이라고 적었다.
한편 사신들은 내쫓기다시피 일본을 떠났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달만에 다시 돌아왔는데 《일본기략》(니혼기랴쿠) 4월 경자(21일)에 "되돌아온 발해의 부사 장선이 따로 별공(別貢)을 바쳤다[返却渤海副使璋■別貢物]"는 기록에서 건흥 5년(823년)에 발해에서 온 사신단의 부사 이름이 장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음달 "계해(15일)에 발해에 보내는 칙서의 날짜 적은 위에다 도장을 찍었다[印遣渤海勅書, 日月上一踏]."라고 한 것은 굳이 적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신들이 돌아갈 때에 발해에 보낸 칙서가 또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칙서의 내용은 기록의 부실로 알 길이 없다.
장경(長慶) 4년(824) 2월에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설평(薛平)이 사신을 파견하여 숙위(宿衛)하러 오는 발해의 대총예(大聰睿) 등을 압송하였는데, 이들이 낙역(樂驛)에 이르자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가서 영접하는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책부원귀》
발해 사신들이 '내쫓기다시피'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사정이 여의치 못한 탓이었다. 6월에 태정관에서 사신들에게 통보한 것을 보면 사신들에게 전례를 고쳐서 12년에 한번씩 사신으로 오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해마다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의 생활이 쪼들려서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것을 꺼리고 있다, 한 마디로 '우리는 너네 대접할 돈 없다' 이거였다. 원래 사신이 오는 것도 햇수나 기한에 제한이 없었건만 이때에 다시 12년에 한 번만 와 하고 제한해버렸다. 결국 고정태와 장선은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가 바친 사냥개도 도로 발해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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