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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3>후고려기(後高麗記)(26)
2010/03/27 22:17 광인

발해의 5경 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5도(道)이다. 거란과 영주로 통하는 길, 신라로 통하는 길, 사신들이 조공하러 가는 길, 그리고 일본으로 가는 길. 이 중에 신라와 일본으로 통하는 길들은 동쪽과 남쪽의 수도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신라와 발해 사이에 39역참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고금군국현도사이술》에도 실려있는 이야기고, 일본으로 가는 사신들은 모두 남경남해부에 속해 있는 토호포 항구에서 배를 띄워 일본으로 갔다. 남경의 위치는 《발해고》에 해성현이라고 했다가 다시 함흥이라고 비정했었는데, 지금은 북청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僖王諱言義, 定王弟也. 改元朱雀. 定王卒, 王權知國務.]
희왕(僖王)의 휘는 언의(言義)이며 정왕의 아우이다. 연호를 주작(朱雀)이라 하였다. 정왕이 죽자 왕이 나랏일을 맡아보았다.
《발해고》 군고(君考), 희왕
 
주작. 간지로는 태세 계사에 해당하는 해였다. '나랏일을 맡아보았다'고 한 것이 선대 정왕의 죽음과 언의왕의 즉위 사이에 기간이 좀 많이 걸렸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당조로부터 책봉을 받기 전에 이미 언의왕은 발해의 모든 행정을 맡아보며 실질적인 국왕 노릇을 하고 있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元和八年, 正月庚子, 唐遣內侍李重旻, 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원화 8년(813) 정월 경자에 당이 내시 이중민(李重旻)을 보내어 왕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국왕으로 삼았다.
《발해고》 군고(君考), 희왕 주작 원년(813)
 
보통 한 나라의 왕이 정하는 연호에는 그 왕의 통치철학이나 지배이념이 반영되기 마련인데, 언의왕이 자신의 연호를 사신의 하나인 주작(朱雀)으로 정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 주작이 흔히 '봉황'과 동일시되는 일이 있는만큼 나름 태평성세를 지향하고서 정한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일본 연호 중에도 주작이 있었다는데 《일본서기》(니혼쇼키)에 실려있는 건 아니고 《해동제국기》에 실려 전하는 것이다. 왜황 효덕(고토쿠)은 치세 중에 흰 꿩이 나타났다고 해서 흰 꿩이 나타난 해를 백치(白雉, 하쿠치) 원년으로 정했는데 이건 치세 중에 나타난 상서로운 짐승을 기념한 것이고, 제명(사이메이) 왜황은 백봉(白鳳, 하쿠호)이란 연호를 썼으며(둘은 같은 것이라고도 한다) 천무(덴무) 왜황은 태세 병술(686년)에 주조(朱鳥, 슈쵸) 원년이란 연호를 썼다. 61대 왜황의 묘호도 주작(朱雀, 스자쿠)다.
 
《설문해자》에 보면 봉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봉(鳳)은 신조(神鳥)다. 동방의 군자국(君子國)에서 나는데, 사해(四海)의 밖에서 날아올라, 곤륜산(崑崙山)을 지나서 지주(砥柱)에서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서 깃을 씻고, 저녁에는 풍혈(風穴)에서 잔다.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태평해진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실려있는 기록들은 대부분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만을 추려 엮은 것이다. 군자국이라는 말은 중국에서는 으레 중국의 동쪽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 중에서도 우리나라를 가리킬 때 쓰였다.고 우리나라에서는 믿어왔던 것 같다. 기원을 찾자면 최치원이 당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의 나라를 근화향(根花鄕)
즉 '군자의 나라'에 많다는 근화(무궁화)가 많은 나라라고 부른 것이나(발해에 대해서는 호시국胡矢國 즉 호시의 나라라고 해서 활 쏘는 '오랑캐'의 나라라고 비하했으면서도 말이다.)《동사강목》은 《논어》에서 공자가 동방으로 가서 살려고 할 때의 일화도 적어놨다. 원래 《논어》자한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어느날 공자가 불쑥 구이(九夷) 땅에 가서 살겠다고 하자 누가 물었다. 
"누추할 텐데 어찌 지내시려 하십니까[陋如之何]."하자 공자가 대답한다.
"군자가 살고 있는데 어찌 누추하겠느냐[君子居之何陋之有]?"라고. 문맥으로 봐서는
'군자가 사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도 누추하지 않다'인지
'군자가 가서 살면 누추하지 않게 바꿀수 있다'고 한 건지 분간이 안 간다.
다들 전자를 따르고 있긴 하다만.
 


우습게도 일본도 자신들을 가리켜 '해 뜨는 동방의 나라'라고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평소의 일본의 이미지도 그렇고 중국이 말한 군자국이란 바로 우리를 가리킨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우리에게는 진짜 우스워 죽을 지경이다. 그래 똑같이 동방에 위치한 나라에서, 서쪽의 번화한 세계제국의 수도, 장안에서 두 사람의 승려가 만났다.
 
한 명은 발해에서부터 무거운 책상자를 짊어지고 걸어와 사문 응공(應公)의 제자가 된 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일본에서부터 사신을 따라 천리의 바닷길을 헤치며 목숨을 건 항해 끝에 간신히 닿은 처지였다. 두 사람 모두 불법을 배워서 도를 깨치겠다는 생각만큼은 서로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또한 그렇게 할 능력이 있었다. 두 사람의 논의는 그 격이 서로 지지 않을 정도로 투합되었고, 같은 불문의 제자로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발해에서 온 그 승려의 법명은 정소(貞素), 일본에서 온 승려는 영선(靈仙, 에이센). 함께 온 승려로는 최징(最澄, 사이초)과 공해(空海, 구카이)가 있었다.
 
[九月庚戌朔丙辰, 淄青李師道進鶻十二, 命還之.]
9월 경술 초하루 병진(7일)에 치청(淄靑)의 이사도가 송골매[鶻] 12마리를 진상하였다. 이를 돌려보냈다.
《구당서》헌종본기, 원화 8년(813) 가을 9월
 
헌종이 사도왕이 바친 송골매를 되돌려보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제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황실 재정을 줄이기 위한 경제적 이유. 헌종은 이미 806년에 양세법을 비롯한 개혁정치를 표방하면서 사냥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기실 덕종조에도 한번, 신라와 발해에서 매를 바치지 말도록 했다는 얘기는 있다만) 뭐 이 정도로 '오올~~~'하고 감탄할 만하긴 하다. 고려의 매가 얼마나 특등 상품인데.
 
중국이나 몽골에서 우리 나라 물품 가운데 특히나 탐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 매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때부터 이미 매를 길러 매사냥을 했는데, 고구려 벽화에 매사냥하는 그림이 있기도 하고 백제의 아신왕도 매사냥을 즐겼고, 《삼국유사》에도 매사냥과 관련한 신라 때의 사찰연기설화가 수록되어 있으니 고대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즐겼던 스포츠임을 알 수 있다. 당의 귀족 남자들은 모두 이 매사냥을 즐겼는데, 이들이 한결같이 엄지를 세워 칭찬한 것은 고려산 매였다. 오대 시대에 만들어진 《개천유사(開天遺事)》라는 책에 보면 황족 신왕(申王)은 고려에서 나는 붉은 매[赤鷹]를 길렀는데 천자가 아껴서 매번 사냥할 때마다 반드시 수레 앞에다 그 매를 놓아두고 쾌운아(快雲兒)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도왕의 제도 발해나 신라와 무역을 했으니 저 매는 분명 우리나라에서 수입한 것이 분명하리라.
 
12월에 발해의 왕자 대씨와 신문덕(辛文德) 등 97인이 와서 조회하니, 금채(錦綵)를 하사하였다.
《책부원귀》
 
위의 《책부원귀》 구절은 원래 대신문덕(大辛文德)이 원래의 이름이고 그 자체가 발해의 왕자인가 했는데 《발해국지ㆍ장편》에는 발해의 왕자라는 사람은 이름이 《책부원귀》에서 빠졌고 고례진 등 37명의 발해 사신들은 당 조정에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 각기 한 구씩을 바쳤다.
 
9년(814) 정월에 발해의 사신 고례진(高禮眞) 등 37인이 조공하면서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 각 1개를 바쳤다.
《책부원귀》
 
발해도 불교국가였다. 라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주작 2년(814). 불상을 바친 대가라고 해야 되려나? 아무튼 이들은 인덕전에 초대되어 잔치를 대접받았고, 물품도 하사받았다는 것이 《책부원귀》의 설명이다. 발해 사신들은 11월에는 발해산 매와 송골매를 바치고, 12월에도 발해의 종실 대효진(大孝眞) 등 59명이 장안에 왔다.
 
[癸卯, 渤海国遣使獻方物.]
계묘(30일)에 발해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4, 홍인(弘仁, 코닌) 5년(814) 9월
 
사신단의 대사가 왕효렴(王孝廉)이고 부사는 고경수(高景秀)이지만, 출운(이즈모)에 도착한 이들 사신이 발해에서 어떤 작위와 관직을 맡고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이들은 9월에 이르러 방물과 계서를 일본 조정에 바치고 정왕의 죽음을 전했다. 주작 2년, 일본 홍인(코닌) 왜황 즉위 5년(814)의 일이었는데, 이들의 총인원수도 기록에 없어 모른단다. 11월에 번객에게 제공하기 위해 출운(이즈모)의 전조에서 공상을 면제한 일이 있는데, 일행 가운데 평안경(헤이안쿄)으로 들어오지 않고 출운(이즈모)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南風海路連歸思    바닷길에 부는 남풍에 고향 생각 부쳐볼까.
北雁長天引旅情    북쪽 기러기는 하늘에서 나그네 시름 이끄는데
賴有鏘鏘雙鳳伴    다행히도 두분 칙사 나를 이처럼 위로하시니
莫추多日住邊亭    시름은 없네. 이 변정에 오래 있어도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분카슈료슈)》中
왕효렴, '출운주에서 두 칙사에게 정을 적어 부치다[出雲州書情寄兩勅使]'
 
이듬해 주작 3년(815년) 정월, 왕효렴 일행은 평안경(헤이안쿄)에서 조하했다. 일본 조정은 그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고, 그들에게 관위까지 주었다. 《일본후기》(니혼고키)에 기록된 바를 보면 대사 왕효렴은 종3위, 부사 고경수는 정4위하, 판관 고영선(高英善)과 왕승기(王昇基)에게는 각각 정5위하, 녹사로서 온 승려 인정(仁貞)과 오현시(烏賢偲), 역어 이준웅(李俊雄)에게는 종5위하와 함께 녹이 수여되었다. 따로 《발해고》에서는 왕효렴의 사신단을 따라온 사람중에 대당 월주인(越州人) 주광한과 언승칙이라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남용이나 왕효렴에 대해 한권짜리 《발해고》에서 '어느 왕 때에 갔는지 모른다'고 한 것은 유득공이 《일본후기》(니혼고키)를 미처 얻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권짜리 《발해고》에서는 이 내용이 따로 보충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신만(信滿)이 이르러 보내주신 서한 한 통과 새 시 한 수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감상하고 외는 데 입과 손이 쉬지를 않습니다. 만난다고 해도 어찌 이 기쁜 마음보다 낫겠습니까. 뜻밖에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데 아시는지 모르겠구료. 초봄의 남은 추위에 대사(大使)께서는 일상에 복이 가득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나라의 총애를 받아 항상 오는 물품이 1백 배가 되니 매우 깊이 경하드립니다. 소식을 알려고 기다렸더니 신만이 늦게 왔으므로 사귀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 송구하고 서글퍼서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돌아가야 되겠기에 알지 못하고도 미리 물으신 왕호(王好) 등의 관품은 모두 기록되어 다행입니다. 삼가 올립니다. 신만을 받들어 올리자면 일일이 다 말하지 못합니다. 삼가 드립니다. 정월 19일에 서악사문(西岳沙文) 공해(구카이)는 발해의 왕(王) 대사 각하께.
공해(구카이)의 편지. 《고야잡필집》 中에서
 
그 뭐냐, 아시는 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목포에 유달산이라는 산에 가보면 전망대 난간 너머로 보이는 일등봉 바위 표면에, 일제 시대 일본 사람들이 새겨논 불상과 승려상이 여든여덟 개쯤 있다고 한다. '일제잔재'라고 해서 이걸 철거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한때 의견이 분분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현지 사람들한테는 '홍법대사상(弘法大師像)'이라 불리는 일본 승려의 부조상. 바로 일본의 승려 공해(구카이)를 모델로 한 것이다. 강왕 정력 10년인 연력(엔랴쿠) 23년(804)에 견당사(켄토시)를 따라 당으로 건너가 2년 동안 불법을 배우고 귀국했고 돌아와서는 일본 진언종(進言宗)이란 불교종파를 열어 그 개조가 되었는데, 이 공해(구카이)와 왕효렴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미 구카이는 등원갈야려(후지와라노 카츠노마로)를 통해 발해의 어떤 왕자에게 서신을 보낸 적이 있다. (《편조발휘성령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발해 강왕 정력 11년으로 서기 805년의 일이다.)
 
정월 임진(20일)에도 이들은 또다시 조집당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甲午, 渤海国使王孝廉等歸蕃. 賜書曰 “天皇敬問渤海王, 孝廉等至, 省啓具懷. 先王不終遐壽, 奄然□背, 乍聞惻怛, 情不能已. 王祚流累葉, 慶溢連枝. 遠發使臣, 聿脩舊業, 占風北海, 指蟠木而問津, 望日南朝, 凌鯨波以修聘. 永念誠款, 歎慰攸深. 前年附南容等啓云 '南容再駕窮船, 旋渉大水, 伏望辱降彼使, 押領同來' 者. 朕矜其遠來, 聽許所請, 因差林東仁充使, 分配兩船押送. 東仁來歸不齎啓, 因言曰 '改啓作状, 不遵舊例. 由是發日, 棄而不取'者. 彼国修聘, 由來久矣, 書疏往來, 皆有故實. 專輙違乖, 斯則長傲. 夫克己復礼, 聖人明訓, 失之者亡, 典籍垂規. 苟礼義之或虧, 何須貴於來往? 今問孝廉等, 對云 '世移主易, 不知前事. 今之上啓, 不敢違常, 然不遵舊例, 愆在本国, 不謝之罪, 唯命是聽.' 者. 朕不咎已往, 容其自新, 所以勅於有司, 待以恒礼. 宜悉此懷. 間以雲海, 相見無由, 良用爲念也. 春首餘寒, 王及首領百姓並平安好. 有少信物, 色目如別. 略此還報, 一二無悉.”]
갑오(22일) 발해국 사신 왕효렴 등이 귀국하였다. 글을 내려 말하였다. “천황(미카도)은 발해왕에게 공경히 묻노니, 효렴 등이 이르렀을 때에 계(啓)를 보고 갖추어 具懷하였소. 선왕께서 오래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하니 슬픈 마음 누를 길 없소. 왕의 지위가 여러 세대를[累葉] 전함은 경사가 후손들에게[連枝] 미친 것. 멀리서 사신을 보내어 구업(舊業)을 사모하였고 북쪽 바다에서 바람을 점쳐 반목(蟠木)을 갖고 항구를 물으며 남조(南朝)의 해를 바라보고 고래같은 파도를 지나 수빙(修聘)을 하였소. 깊이 정성을 생각하니 기쁨과 위안이 더욱 깊소. 지난 해(814)에 남용 등에게 부친 국서에서 '남용이 다시 작은 배를[窮船] 타고 큰 물을 건넜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그 사신들을 배에서 내리게 하여 통솔하여 함께 오도록 해주시오'라 하였소. 짐은 멀리서 온 것을 가엾게 여겨 호소하는 바를 聽許하고 인하여 임동인(林東仁, 하야시노 아즈마히토)를 사신으로 뽑아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태워 보냈소. 동인(아즈마히토)가 돌아왔을 때 계를 가져오지 않고 '계(啓)를 고쳐 장(状)으로 하고 구례(舊例)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던 날에 내버리고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라 하였소. 그 나라의 수빙은 유래가 오래되었고 書疏가 오가는 데에는 모두 고실(故實)이 있는 것. 제멋대로 어기는 것은 오만함이 너무 지나칩니다. 무릇 극기복례(克己復礼)란 성인(聖人)의 밝은 가르침. 그걸 잃어버리면 망한다고 하는 것은 전적(典籍)의 垂規요. 실로 예의가 잘못된다면 어찌 내왕하는 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효렴 등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세대가 변하고 임금이 바뀌어 전사(前事)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의 상계(上啓)는 감히 평소 때와 다르지는[違常] 않았지만 구례(舊例)를 따르지 않은 잘못은 본국에 있으니 사죄하지 않고 오직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소. 짐은 지나간 일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고치라 허락하여 유사(有司)는 평소대로[恒礼] 대우하라 해주었소.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살피시기를. 구름 자욱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본 적은 없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초봄인데도[春首] 아직 춥소. 왕과 수령, 백성이 모두 평안히 잘 지내기를. 신물을 약간 보냈는데 목록은 별지와 같소. 약소하나마 이것으로 보답을 합니다만 일일이 적지는 못하겠소.”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4, 홍인(弘仁, 코닌) 6년(815) 정월
 
조집당 연회 이틀 뒤 그들은 왜국을 떠났다. 사가 덴노의 새서는 정왕의 승하와 언의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전 임동인(하야시노 아즈마히토)이 발해의 중대성으로부터 받아온 장에 대해서 국서 형식도 안 갖췄다고, 섭섭하다고 책망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 새서는 일단 희왕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으니, 왜냐면 왕효렴 일행의 꼬여버린 귀국로 때문이었다. 출운(이즈모)에서 출발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월전(에치젠)에 표류해서 몇 달을 머무르다가 간신히 큰 배를 구했더니 하필 그 지역에서 천연두가 도네. 천연두도 돌고 야마도 돌고, 왕효렴과 왕승기, 승려 인정이 이때 천연두에 걸려 발해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 이후 1년 뒤인 816년 5월에야 이들은 돌아갈 수 있었고, 차아(사가) 왜황은 이들에게 대사 왕효렴을 비롯한 발해 사신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새서를 주었을 뿐, 앞서번 국서의 섭섭함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정말?)
 
[癸丑, 渤海大使從三位王孝廉薨. 詔曰 "悼往飾終, 事茂舊範. 褒忠録績, 義存先彜. 故渤海国使從三位王孝廉, 闕庭修聘, 滄溟廻艫, 復命未申, 昊蒼不憖. 寔雖有命在天, 薤露難駐, 而恨銜使命, 不得更歸. 朕慟于懷, 加贈榮爵, 死而有靈, 應照泉□. 宜可正三位. 更賜信物并使等祿, 以先所賜濕損也."]
계축(14일)에 발해대사 종3위 왕효렴이 훙하였다. 조를 내려 말하였다. "죽음을 슬퍼하고 마지막을 장식함은 옛 규범에 많다. 그 충성을 표창하고 공적을 기록하는 뜻은 선인의 법도. 고(故) 발해국사 종3위 왕효렴은 조정에 교빙을 닦고 큰 바다에 배 타고 돌아가 복명을 미처 아뢰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바라던 바가 아니다. 실로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풀잎 끝의 이슬 같은 생명은 남아있기 어려우니, 사명을 띠고 돌아가지 못함이 한스럽다. 짐은 비통한 마음으로 영예로운 새 작위를 더하노니, 죽어서도 영혼이 있다면 응당 저승에서라도 밝게 비추리니 정3위를 내림이 옳도다." 또한 신물(信物)과 함께 사신들에게 녹을 주었는데, 앞서 내린 바 濕損였다.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4, 홍인(弘仁, 코닌) 6년(815) 6월
 
왕효렴은 비명에 갔지만, 그가 일본에서 주고받은 시는 아직도 일본에 남아있다. 주작 3년(815년) 정월 기묘(7일)의 평안경(헤이안쿄) 연회에서 읊은, '봉칙배내연'이라는 시.
 
海國內朝自遠方    바다나라 먼 곳에서 찾아와
百年一醉謁天裳    성은에 취하여 임금을 뵈도다
日宮座外何攸見    일궁 보좌 주위에 무엇이 보이는가
五色雲飛萬歲光    오색 구름 피어올라 만세 영광 기리도다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분카슈료슈)》中
왕효렴, '칙을 받고 내연에 참석하다[奉勅陪內宴]'
 
승려 인정도 시를 읊었는데, 제목은 '칠일금중배연(七日禁中陪宴)'이라 해서
 
入朝貴國塹下客  귀국에 입조하여 하객을 부끄러워하니
七日承因作上賓  이레의 은혜를 받아 상빈이 되었도다
更見鳳聲無妓能  다시금 봉황소리에 고상한 모습 뵈오니
風流燮動一園春  풍류가 움직이는 한 나라의 봄이로다
 
라고. 이들 시는 일본에서 편찬된 《문화수려집》(분카슈료슈)이라는 한시집에 남아있는데, 이밖에도 판상금계(板上今繼, 사카노우에노 이마츠구)와 왕효렴이 함께 지은 창화시, 시게노노 사다누시가 홍려관(고료칸)에서 머무르는 왕효렴에게 편지와 함께 준 시, 왕효렴이 귀국길에 영객사와 시게노노 사다누시를 비롯해 이즈모에서 배웅해준 사자에게 준 시부터 구와바라노 하라아카가 부사 고경수의 시에 화답한 시나, 판상금계(사카노우에노 이마츠구)가 판관 고영선과 녹사 인정에게 보낸 시도 남아있다.
 
主人開宴在邊廳    주인은 변청에서 잔치 베풀어
客醉如泥等上京    나그네는 상경에서처럼 몹시 취했어라
疑是雨師知聖意    우사는 성의를 알아챘는지
甘滋芳潤灑羈情    단비를 내려 나그네 적셔주네.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분카슈료슈)》中
왕효렴, '비오는 날에 정 자를 얻어서[春日對雨得情字]'
 
창화라는 것은 국가적으로는 두 나라 외교교섭을 원활하게 해주는 정서적인 윤활유이자, 개인의 정을 나누는 활동이기도 하다. 신라의 사신과 일본 사신이 시를 창화한 것이 장옥왕(나가야왕)의 저택에서 있었던 것에 비하면, 발해 사신들은 일본 사람들과 제법 두터운 사이를 유지했던 듯. 반대로 신라 사신이 당 시인들과 교제한 것은 발해 사신이 당 시인들과 교제한 것에 비해 월등히 그 수가 많으니 이것도 참 나름의 구도가 짜여있는 것도 같다. 
 
寂寂朱明夜    달 밝은 밤은 쓸쓸하기도 쓸쓸하지만
團團白月侖    하얀 보름달도 참 둥글기도 둥글구나.
幾山明影徹    몇군데나 되는 산에서 그 밝은 모습 드리웠을지 
萬象水天新    그 온갖 모습들이 물에서 다르고 하늘에서 또 달라서
棄妻看生恨    버림받은 여자가 보면 한탄이 나오고
羈情對動神    나그네 심정으로 대하면 반가워 신이 나는데
誰云千里隔    누군가 말했었지, "천리 멀리 떨어져 있지만
能照兩鄕人    두 곳 사람 쉽게 다 비춰줄 수 있노라"고.
 
이것도 왕효렴의 작품이다. 그리고 발해 한시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시다. (원래는 일본측 영객사 판상금계의 시에 화답하느라 지은 것) 발해의 한시는 좀 찾기가 많이 어렵다. 내 정보 수집 능력이 많이 미비한 탓도 있겠고, 발해 사람이 남긴 한시가 대체로 일본 쪽에 많이 남아있는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 한문집에는 《동문선》에서조차 발해 사람의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나 버림받고 있었을 줄이야. 슬프다. 발해라는 나라. 달빛은 지금도 그 옛날도, 천년 전의 하늘에서 발해와 신라 두 나라를 고르게 비추어 주었을텐데.
 
一面新交不忍聽    한번 만나 새로이 사귀고 정겨운 소리 차마 듣지 못했는데 
況乎鄕國故園情    하물며 그 나라의 깊은 정을 더 물어 무엇하리오
《고야대사광전》하권 中
발해대사 왕효렴이 중도에 죽음을 슬퍼함[傷勃海國大使王孝廉中途物故]
 
이건 일본의 홍법대사 공해(구카이)가 왕효렴의 죽음 소식을 듣고 보낸 시다.
 
흉변이 무상하여 동쪽에 가자미 하나는 가라앉고 한 쌍의 물오리 가운데 하나만 날고 있으니, 오호라! 애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통탄하나 어찌하겠습니까? 현실(賢實)의 나이가 한창인데 뜻밖에 이런 풍상을 당했습니다. 두셋의 어린아이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누구를 믿겠습니까. 애통합니다. 한가을 밤은 싸늘한데 평소대로 생활하시길 엎드려 빕니다. 빈도는 지난 달 어명으로 중무성(中務省)에 잠시 묵었습니다. 칙서안을 한 부 부치오니 한 번 보시오. 저 멀리 하늘가에 나를 가로막았으니 솔과 잣이 어찌 옮길 수 있겠습니까? 입경할 적에 조짐을 기다려 이 이전의 진중함을 듣지 못하고 삼가 이씨에게로 돌아가므로 글을 받들고 머물지 않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8월 10일. 사문 구카이가 왕 태수 기실께. 근공(謹空).
공해(구카이)의 편지, 《홍법대사전집》中
 
편지를 받는 사람은 일단 왕 태수의 기실(記室)이라고 했다. 기실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반적으로 '서기직'을 맡은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 내 생각인데 단순히 왕 태수, 즉 왕효렴의 서기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라면 어째서 '가자미'니 '물오리'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지, 그리고 '두셋의 어린아이'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발해국지ㆍ장편》에서는 가자미에 대해서 비목어(比木魚)라고도 불린다고 적고 있다. 《시경》이아(爾雅) 석지편에 나오는 건데 "동방에 사는 비목어는 짝을 짓지 않으면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목어는 이때문에 흔히, 연리지나 비익조처럼 '한 쌍의 남녀'를 가리킬 때에 쓰인다. 왕효렴의 기실이 여자였던 것일까?
 
내 생각인데 저 문장, 기실(記室)이 아니라 배실(配室)로 바꿔야 옳지 않을까 한다. 왕효렴의 휘하 종사관이 아니라, 왕효렴의 미망인 즉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편지에서 말한 '두셋의 어린아이'란 다른 사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왕효렴의 자식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말이다. 
 
"가자미 하나는 가라앉고 한 쌍의 물오리는 하나만 날고 있다[東鰈一沈, 雙鳧隻飛]."

이건 단순히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다. 
왕효렴과 그 '기실'이 서로 평소에 단순한 사무적이고 직업적인 관계 이상으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구카이가 저런 글귀를 편지에 넣었을 리가 없다. 그 시대에 동성애를 했던가 설마? '二三幼稚'라는 것도 풀이하면 '두셋의 어린아이'인데 왕효렴이 데리고 있던 사신단을 가리켜서 '어린아이' 취급을 했다면 그건 실례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표현했다면 기실도 대사에 비해 훨씬 낮은데 기실에게 조문한다면서 '어린아이'라고 불렀다면 그건 조문하는 편지라고는 할 수 없다.
 
현실(賢實)이라는 것도 실(實)을 실(室)로 고쳐야 할 것이다. 기(記)와 배(配), 실(實)과 실(室)은 둘 다 글자가 똑같고 실의 경우는 발음도 비슷하다. 얼마든지 틀리게 적을 수 있다. 구카이는 왕효렴의 휘하 종사관 '기실'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배실' 즉 아내에게 보낸 것이고, 왕효렴에게는 아내에게서 얻은 두세살 정도 된 아이가 있었다. 이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지만 글 속에서 왕효렴의 아내(관직도 없었을)에게 뭐하러 중무성의 칙서를 부친 것일까? 이 점은 좀더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발해는 측천무후 치하 당조 이래로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보다 여권(女權)이 신장된 나라였으니 여자도 관직을 맡아 지내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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