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mahan.wonkwang.ac.kr/nonmun/2008non/1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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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원광대 http://tadream.tistory.com/7738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엄윤희"에서 "2. 발해의 외교" 중 "1) 당과의 외교"만 가져왔습니다.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엄윤희"에서 "2. 발해의 외교" 중 "1) 당과의 외교"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의 외교 : 1) 당과의 외교
(1) 당과의 국교 수립
고구려 멸망 후 영주에서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은 696년 이진충의 난을 계기로 요동 지역에서 독자 세력을 이루었다. 당의 회유를 거부한 이들은 698년 대조영의 지휘아래 천문령에서 당군을 격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침입이 계속되었으므로 대조영은 이를 피해 멀리 동북 오지인 무단 강 유역의 동모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중간에 위치한 거란(契丹)과 해(奚)가 돌궐(突厥)에 복속됨으로써 당은 결국 이들을 침입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는 당과 대립하던 돌궐과 신라에 각각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대외적 안정을 확보하였다. 이제 신흥 국가인 발해에게 시급한 것은 영역의 확보였다. 발해는 건국초기의 중심지인 동모산일대에서 서남쪽으로는 과거 고구려 영역이었지만, 그 밖의 지역을 고구려 세력권에 포함되었던 말갈의 거주지였다.
한편 요동에서 기능을 상실한 안동도호부가 결국 698년 6월 안동도독부로 격하된 이후 이 지역의 고구려 유민은 돌궐과 발해로 점차 달아났다. 이후 당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요동 지역의 고구려 유민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이 지역은 완충지대로 남게 되었다. 또한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북부 일대도 나당 전쟁의 여파로 완충 지대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발해는 건국 직후 두 완충 지대를 제외한 옛 고구려 영역의 일부와 말갈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5)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장에 대해 당은 기존의 침입 방침을 바꾸어 발해를 인정하고 국교를 수립하였다. 당의 이러한 입장의 변화는 동북 정책을 강화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이 시기 북아시아에서는 기본적으로 남쪽의 당과 북쪽의 돌궐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당은 동북방에서 돌궐에 복속한 거란과 대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의 동북 방면의 요충지인 영주는 이진충의 난 이후 거란의 점유하게 있었다. 따라서 당은 돌궐과 대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돌궐에 대해 우위를 점하기 위해 돌궐의 종속 집단인 거란을 평정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당은 우선 영주를 회복하려고 다각도로 노력하는 가운데 705년 안동도독부를 다시 안동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원래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영역의 관할을 위해 설치되었지만, 이때 부활된 안동도호부의 도호는 유주와 영주의 도독을 겸하였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영주 지역의 회복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6)
바로 이 시기에 당은 시어사(侍御史) 장행급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회유함으로써 발해와 국교를 수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로써 당은 발해에 대한 침입 방침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였다. 그 결과 대조영이 왕자를 파견하였고, 당은 대조영을 책봉함으로써 국교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비록 거란과 돌궐이 당의 변경을 침략함으로써 책봉이 실현되지는 못하였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당이 영주를 회복하기 위해 거란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발해에 접근하였음을 의미한다.
당과 발해의 국교 수립은 이로부터 8년이 지난 713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다. 이 기간에 당의 변장 정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절도사의 등장이다. 현종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710년 10월에 당은 처음으로 유주절도사를 설치하고 안동도호를 겸임시켰다. 절도사의 등장은 기미지배(羈縻支配)7)에 입각한 도호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무력 변방 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인데, 처음 유주에 설치되었다는 점은 역시 그 목적이 영주를 탈환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당은 713년 2월 낭장(郎將) 최흔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고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을 제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국교가 수립되었다.8) 그런데 그 배경에는 이 무렵 당과 돌궐의 화친이 이루어진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당과 돌궐의 화친 속에는 912년 6월 당은 영주 회복을 위해 해(奚)를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1월에는 도리어 해와 거란이 어양(漁陽)을 침략하였다. 이 직후에 당이 발해와 국교를 수립하였던 것은 거란 배후에 위치한 발해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의 책봉에 앞서 711년 11월 발해는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해 또한 당과 돌궐의 화친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독자적으로 대당 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은 영주 회복을 위해 변경 방위 체제를 절도사 체제로 개편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은 거란의 배후에 위치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발해에 주목하여 국교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한편 발해는 당과 국교를 수립한 이후 대외적 안정 속에서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2) 대당 관계의 악화와 개선
발해는 동북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당과의 활발한 교류를 매개로 불녈(佛篞) · 월희(越喜) · 철리(鐵利) · 흑수(黑水)말갈 등 주변의 말갈 부족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반농 반렵 생활에 의존하는 말갈 부족들은 필요한 물자를 당과의 접촉을 통해 얻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당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발해를 경유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718년 즉위한 무왕(武王) 대무예는 대조영에 대해 고왕(高王)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활발하게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720년 9월에는 거란을 토벌하자는 당의 제안을 거부하는 등 발해는 당의 책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하였다. 따라서 당은 거란 견제의 역할을 수항하지도 않고 오히려 세력을 확장해 가는 발해를 견제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당은 726년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흑수말갈을 기미주로 편제하고, 당의 관리를 파견하여 이를 관장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런데 흑수말갈은 그전에는 발해의 양해 아래 돌궐의 토둔(土屯)9)을 설치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흑수말갈이 돌궐에서 당으로 선회한 것은 발해의 세력 확장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당 또한 발해를 견제할 필요에서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흑수말갈과 당의 결탁으로 대외적 위기에 빠진 발해는 흑수말갈을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무왕의 동생인 대문예는 당과의 전쟁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발해 지배층 내부의 의견 대립은 흑수말갈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대문예가 재차 반대하며 당으로 망명함으로써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무왕은 흑수말갈의 토벌과 함께 당으로 망명한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당은 거부하고 732년에 당과 흑수말갈의 재결탁과 무왕의 큰아들 대도리행의 사망이 있었다.
728년 1월 흑수말갈이 사신을 파견하자, 당은 흑수말갈 추장에게 이헌성이라는 중국식 성명을 내려줌과 동시에 운휘장군 겸 흑수경락사를 제수하고 유주도독의 감독을 받도록 하였다. 726년 발해의 흑수말갈 토벌에도 불구하고 2년만에 당이 다시 흑수말갈과 결탁함으로써 발해는 대외적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728년 4월에 사망한 대도리행은 720년 계루군왕에 봉해진 발해의 왕위계승자였다. 왕위 계승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필연적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10)
이러한 대내외적인 위기를 무왕은 등주 공격으로 돌파하려고 하였다. 등주는 한이 고조선을, 그리고 수 · 당이 고구려를 해상으로 공격할 때 전진기지였다. 이진충의 난이 한창인 697년에도 당은 육로 진격과 함께 이곳에서 바다 건너 요동반도로 공격한 것이 있다. 당시 발해와 당은 영토가 맞닿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당의 군사적 위협이 점차 증가하는 가운데 발해가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느꼈다면 그 대상은 등주밖에 없었다.
732년 9월 발해의 장문휴가 이끄는 수군은 바다를 건너 등주를 습격한 후 곧바로 퇴각하였다. 당은 이듬해 본격적인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곧 733년 1월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11)의 병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도 발해를 공격케 하는 협공 작전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겨울에 출병하여 추운 날씨와 험한 도로 사정으로 군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였다.
등주 공격 이후 무왕은 현지에서 자객을 동원하여 대문예 암살을 시도하였다. 암살이 실패한 후 발해는 다시 마두산을 공격하였다. 발해의 대당 강경책은 당시 돌궐과 거란이 당과 대립하는 형세 하에서 이루어졌다. 이 무렵 거란도 내부적으로 정쟁이 발생한 결과 해와 함께 돌궐에 투항하여 730년부터 당을 공격하였다. 실제로 734년 4월 당 군이 거란을 격파한 후 작성한 승전 보고서에서는 거란이 돌궐 및 발해와 제휴하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같은 해 9월에 당은 발해의 재침에 대비하여 등주의 군대를 하구로 이동시키기도 하였다. 발해의 지원 세력이었던 돌궐은 734년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여, 그 결과 거란과 해가 당에 복속되었다. 또한 신라는 이 무렵 단독으로 발해를 공격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처럼 국제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감에 따라 발해도 더 이상 대당 강경책을 지속할 수 없었다. 736년 돌궐이 거란과 해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한 사신을 발해가 억류하고 당에 알린 사실이나, 발해가 당의 포로를 송환하고 당은 억류했던 발해의 사신을 방면한 사실들은 양국의 화해 분위기를 전해준다.12)
무왕의 아들 문왕(文王) 대흠무가 737년 초반에 즉위하자 당은 이듬해 8월 문왕을 책봉하였다. 그 사이에 발해는 두 차례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즉 발해는 738년 3월 『당례(唐禮)』등의 필사를 요청하여 허락받았고, 석 달 후에는 표서피 1000장과 건문어 100구를 바쳤다. 이때의 『당례』는 732년 완성된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를 가리키는데, 발해가 『당례』의 필사를 요청한 것은 단순한 문화적 욕구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일종의 질서 회복이나 화평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즉, 『당례』로 상징되는 당 중심의 세계 질서에 발해가 다시 편입하여 당과의 화평을 적극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석 달 후 특산물을 바친 것은 738년 윤8월이라는 시점에서 볼 때, 그 목적이 문왕 즉위를 인정받으려는 데 있었다.13)
문왕의 책봉은 이러한 외교 활동의 결과이며, 이로써 대당 관계는 완전히 개선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당이 책봉하였을 때, 문왕이 이를 계기로 국내에 사면을 내린 것이다. 대당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발해가 관계 개선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때의 사면에는 대문예를 지지하다가 그의 망명 이후 숙청되었을 친당파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친당파의 사면은 대당 관계를 개선하려는 발해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결국 문왕은 당의 책봉을 받고 친당파를 사면함으로써 발해의 대당 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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