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9>후고려기(後高麗記)(22)
2009/10/02 14:08 광인
뜬금없는 얘기지만 MAXIM 잡지를 많이 본다. 꼴에 사내놈이라고, 얼굴 & 몸매 착하신 모델분들 사진에 혹해서 두 권이나 샀다. 그런 종류의 가십잡지ㅡMAXIM의 문체는 발랄하면서도 톡톡 튀고 읽는 내내 풋 하고 웃음을 튀어나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해야 할까. 고사성어의 유래나 쿠바 마약상들과의 전쟁, 일본의 5대 검술이며 우리 역사에 대한 기사들도 일부 다루면서 되게 재미있게 문장을 풀어놨다. 조선시대 기준으로야 '속된' 문체지만 사실 이런 문체로 역사를 풀어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딱딱한 국사교과서 이미지가 아니라 저런 '가십거리' 잡지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역사를 배운다면 731부대가 독립군이라는 개같은 소리를 나불대는 사람이 총리랍시고 앉아있는 꼬락서니 안 봐도 될것이다. 그렇다. 나는 야사가다. 야사가 무엇인가. 그 시대의 가십거리 아니던가.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문장에 이리저리 '기교(라고 쓰고 뻘짓이라고 읽는다)'를 부리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문장은 딱딱하고, 조횟수는 그리 나오지 않고 리플도 없다. 무플의 설움이 이런건가. 개그를 너무 진지하게 해서 그런가보다. 자학개그.
[貞元十年五月,師古服闋,加檢校禮部尚書.]
정원 10년(794) 5월에 사고가 복상을 마쳤다[服闋].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尚書)를 더해주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794년 5월, 사고왕은 복상을 모두 마쳤다. 납왕이 죽은 시점으로부터 계산해보면 2년 여에 걸친 긴 복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상중에는 대외적인 적대행위를 자제한다고 한다ㅡ유교적인 관례상ㅡ그 말은 곧, 탈상한 사고왕에게는 더이상 어떠한 행동 제약도 없다는 말이 된다.(나아가 사관들이 사고왕을 깔 구실도 없어졌다는 얘기지.) 상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검교예부상서의 벼슬을 내려준 것은 사전에 제의 도발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해(795)에 당에서 발해왕 숭린(崇璘)을 책봉하였다. 처음 발해왕 흠무(欽茂)가 대력(大曆) 연간에 스물다섯 번 당에 조공하고 일본의 무녀(舞女) 열한 명을 당에 보냈으며, 정원(貞元) 연간에 동남쪽의 동경(東京)으로 천도하였다. 그가 졸함에 시호를 문왕(文王)이라 하였다. 아들 굉림(宏臨)이 일찍 죽었으므로 족제(族弟) 원의(元義)가 왕이 되었는데, 시기하고 포악하므로 1년을 못 넘기고 국인이 그를 죽이고 굉림의 아들 화서(華嶼)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다시 상경(上京)으로 환도하고 연호를 중흥(中興)이라 고쳤다. 그가 졸함에 시호를 성왕(成王)이라 하였다. 다시 흠무의 아들 숭린을 세워 왕으로 삼고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하였다. 당에서 조명으로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제수하고, 책봉해서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왕을 삼았다.
《동사강목》 권제5상(上), 을해년(신라 원성왕 11년, 당 덕종 정원 11년: 795년)
《동사강목》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쳐주지 않았다ㅡ기보다는 정통국가가 아닌 '참국(僭國)' 정도로만 여겼다. 뭐랄까 왜정시대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가 일본으로부터 '가정부(假政府)', 즉 '가짜 정부'ㆍ'사기꾼 정부' 따위 정도로만 취급받았던 것과 같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신라가 발해를 오랑캐라고 부르신다는데(그러면서 대조영에게 대아찬 관품까지 내려줬다는 기록을 최치원의 문집에서 확인할 수 있음을 예전에 말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마는 그러면서도 발해라는 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는 적어주셨다. 《통고(通考)》에서 보충해서.
문왕의 사망부터 폐왕 대원의와 성왕의 잇따른 요절 및 문왕의 '적손' 강왕 대숭린의 즉위에 이르는 역사를 간략하게 적은 《동사강목》의 기록을 필두로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6대 가독부 강왕의 이야기를.
[康王諱嵩璘, 文王少子也. 改元正曆.]
강왕(康王)의 휘는 숭린(嵩璘)이며 문왕의 작은아들이다.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中 강왕
숭린왕의 즉위는 문왕이 승하하고(794) 폐왕 대원의가 피살된 뒤 즉위한 성왕이 재위 1년만인 795년에 세상을 떠난 뒤에 이루어졌다. 《발해고》에서는 숭린왕에게 당조의 책봉사가 도착한 것이 정원 11년이라 했는데, 곧 태세 을해(795)이며 성왕 중흥 2년, 당 정력 원년이다.
[貞元十一年二月乙巳, 唐遣內常侍殷志贍, 冊王右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渤海郡王.]
정원 11년(795) 2월 을사에 당이 내상시 은지섬(殷志贍)를 보내 왕을 책봉하여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다.
《발해고》 군고(君考) 中 강왕
앞서 말했지만 발해는 당 보응 원년(762)에 '군왕'에서 '국왕'으로 승격된 바 있음을 얘기했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숭린왕에게 내려진 작호는 우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 '발해군왕'. 문왕 때보다 지위가 더 내려가 있다. 당조가 의도적으로 지위를 깎아버린 것일까. 하긴 절도사들도 골치아픈데 딴에는 번국이라고 생각하는 발해에게 멀쩡한 작위 내려주자니 심사가 뒤틀릴 법도 하겠다. 하지만 일단 국왕으로 인정했으면 그대로 쭉 국왕으로 밀고 나가야지 뭐 이유도 없이 국왕에서 군왕으로 깎아버리나 그래.
[十一月丙申, 出羽国言 "渤海国使定琳等六十八人, 漂着夷地志理波村. 因被劫略, 人物散亡." 勅, 宜遷越後国, 依例供給.]
11월 병신(3일)에 데와노쿠니(出羽国)에서 말하였다. “발해국 사신 정림(定琳) 등 68인이 이지(夷地)의 지리파촌(志理波村)에 표착하였다. 겁략(劫略)을 당한 탓으로 사람과 물건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칙하기를 마땅히 에치고노쿠니(越後国)로 옮기고 예에 따라 물품을 대주도록 하였다[供給].
《유취국사(類聚国史)》권제193 발해(渤海)・《니혼기랴쿠(日本紀略)》인용
《니혼고키(日本後紀)》 권제4 일문(逸文), 엔랴쿠(延暦) 14년(795)
일본 고대사의 1차사료는 여섯 종의 사서가 중심이 된다. 편찬된 순서대로 《니혼쇼키》, 《쇼쿠니혼키》, 《니혼고키(日本後紀)》, 《쇼쿠니혼고키(續日本後紀)》, 그리고 《분토쿠지로쿠(文德實錄)》와 《니혼잔다이지로쿠(日本三代實錄)》 순으로 돌아간다. 이 여섯 종을 한데 묶어서 '일본 6국사(國史)'라고 부른다. 세번째 서열이 《니혼고키》인데, 간무(桓武) 미카도 엔랴쿠(延暦) 11년(792)부터 시작해서 준나(淳和) 미카도 텐쵸(天長) 10년(833)까지, 사가(嵯峨) 미카도 고닌(弘仁) 10년(819)에 편찬을 시작해서 닌묘(仁明) 미카도 죠와(承和) 7년(840)에 40권으로 완성해서 같은 해 12월 9일(양력 1월 5일)에 완성보고를 올렸는데, 15세기 이후로 책의 일부가 없어져서 지금 전하는 것은 5, 8, 12, 13, 14, 17, 20, 21, 22, 24권뿐. 892년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가 편찬한 《뤼죠고쿠시(類聚國史)》나 11~12세기경의 《니혼기랴쿠(日本紀略)》 등에 《니혼고키》의 일부분이 인용되어 전해지는 것을 토대로 에도 시대인 겐로쿠(元禄) 5년(1692년)에 지은 것이 40권짜리 《일본일사(日本逸史)》이다.
[十一年十二月, 以靺鞨都督密阿古等二十二人, 並拜中郎將, 放還蕃.]
11년(795) 12월에 말갈도독(靺鞨都督) 밀아고(密阿古) 등 22인에게 모두 중랑장(中郎將) 벼슬을 주고 돌려보냈다.
《당회요》
《당회요》에 나오는 말갈도독이 왜 당에까지 가서 중랑장 벼슬을 받아 돌아왔는지.
[十二年正月,檢校尚書右仆射.]
12년(796) 정월에 검교상서(檢校尚書)ㆍ우복야(右仆射)가 되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검교상서우복야는 일찍이 이정기가 요양군왕이라는 작위와 함께 받았던 관직이다.
[十五年四月戊子, 渤海国遣使献方物. 其王啓曰 "袁緒已具別啓. 伏惟, 天皇陛下, 動止万福, 寝膳勝常, 嵩琳視息荀延. 奄及祥制, 官僚感義, 奪志抑情, 起続洪基, 祇統先烈. 朝維依旧, 封域如初, 顧自思惟実荷顧眷, 而滄溟括地, 波浪漫天, 奉膳無由, 徒増傾仰. 謹差匡諌大夫工部郎中呂定琳等, 済海起居, 兼修旧好, 其少土物, 具在別状. 荒迷不次." 又告喪啓曰 "上天降禍, 祖大行大王, 以大興五十七年三月四日薨背. 善隣之義, 必問吉凶. 限以送滄溟, 所以緩告, 嵩琳無状招禍, 不自滅亡. 不孝罪咎酷罸罹苦, 謹状■奉啓, 荒迷不次. 孤孫大嵩琳頓首. 又伝奉在唐学問僧永忠等所附書."]
15년(796) 4월 무자(27일)에 발해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 왕의 계에서 말하였다. “애통스러운 마음[袁緒]은 이미 별계(別啓)에 갖추어 놓았습니다. 삼가[伏惟] 천황 폐하께서는 모든 일에 복이 가득하시고[万福] 침식도[寝膳] 항상 건승하신지. 숭린은 구차히 목숨이나 부지하다가[視息荀延] 어느새 상제(祥制)를 맞이하였습니다. 관료들이 의(義)에 감동하여 뜻을 빼앗고 정을 억누르는 바람에 대통[洪基]을 이어받아 선열(先烈)의 뒤를 이었습니다. 조정의 법도[朝維]가 예전처럼 되었고[依舊] 봉역(封域)은 처음과 같이 되었습니다. 가만 생각하니[顧自思] 실로 돌봐주신 큰 은혜를 입었건만 바다[滄溟]가 땅을 누르고[括地] 파도[波浪]는 하늘까지 치솟아[漫天] 문안드릴 길도 없이 우러러 보는 마음만 간절해졌습니다. 삼가 광간대부(匡諌大夫)ㆍ공부낭중(工部郎中) 여정림(呂定琳) 등을 차임하여 바다를 건너 안부를 묻고 겸하여 옛 우호를 닦으려 합니다. 약간의 토산물[土物]도 별장(別状)과 함께 올립니다. 황급하고 혼미한 탓에 글에 두서가 없습니다[荒迷不次]." 또한 고상계(告喪啓)에서 말하였다. "상천(上天)이 화를 내리시어 조부[祖]이신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 대흥 57년(793) 3월 4일에 돌아가셨습니다[薨背]. 선린(善隣)의 의리로 따지면 마땅히 길흉(吉凶)을 알려야 됨에도 불구하고 큰 바다[滄溟]로 막혀 있는 것이 한이라 이리도 늦게 알리게 되었습니다. 숭린(嵩琳)은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서[無状] 화를 불러왔으면서도[招禍] 스스로 죽지도 못하고 불효죄의 대가로 혹독한 벌을 치르고 있습니다. 삼가 별도로 서장을 올려 아룁니다만 황급하고 혼미한 탓에 두서가 없습니다[不次]. 고손(孤孫) 대숭린은 머리를 조아리고 아룁니다[頓首]. 또한 재당(在唐) 학문승인 에이쥬(永忠) 등이 부친 글을 전하여 올립니다.”
《유취국사(類聚国史)》권제193 발해(渤海) 인용
《니혼고키(日本後紀)》권제4 일문(逸文), 엔랴쿠(延暦) 15년(796)
일본의 사신 강왕 정력 2년ㅡ당 덕종 정원 12년이자, 일본 간무 미카도 엔랴쿠 15년(796). 《해동역사》에서는 이때 발해의 사신 여정림이 고한 국상이란 발해 문왕의 초상이라고 했다. 《발해고》에 따르면 숭린왕은 재위 기간 동안 두 번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王二遣使聘日本], 일본에서 온 사신들에 대해서는 그냥 "일본의 사신 진인광악(眞人廣岳)이 왔다. 숙례하무(宿彌賀茂)가 왔다. 숙례선백(宿彌船白)이 왔다[日本使眞人廣岳來. 宿彌賀茂來. 宿彌船白來]"고 담담하게만 적어놓고 치웠다. 이름은 그들이 사신으로 온 시간적 순서에 맞춰 배열되어 있는데, 첫머리에 나오는 진인광악은 일본 역사에서는 미나가노마히토(御長眞人) 히로타케(廣岳)으로 사신으로 보내질 당시에는 임시로 코즈노스케(上野介)를 맡고 있었고, 관위는 정6위상(上)이었다.
[丁未, 渤海国使呂定琳等帰蕃. 遣正六位上行上野介御長眞人廣岳, 正六位上行式部大録桑原公秋成等押送. 仍賜其王璽書曰 "天皇敬問渤海国王. 朕運承下武, 業膺守天. 徳沢攸覃, 既有洽於同軌, 風声所暢, 庶無隔於殊方. 王新纉先基, 肇臨舊服, 慕徽猷於上国, 輸礼信於闕庭. 眷言款誠, 載深慶慰, 而有司執奏 '勝宝以前, 数度之啓, 頗存体制, 詞義可観' 今検定琳所上之啓, 首尾不慥既違旧義者. 朕以脩聘之道, 礼敬為先. 苟乖於斯, 何須来往. 但定琳等, 漂着辺夷, 悉被刧掠, 僅存性命. 言念艱苦, 有憫于懐. 仍加優賞, 存撫発遣. 又先王不愍, 無終遐寿, 聞之惱■然, 情不能止. 今依定琳等帰次, 特寄絹廿疋, ■廿疋, 糸一百■, 綿二百屯. 以充遠信. 至宜領之. 夏熱, 王及首領百姓, 平安好. 略此遣書, 一二無委." 又附定琳, 賜太政官書於在唐僧永忠等曰. 云々.]
정미(17일)에 발해국사 여정림 등이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정6위상(上) 행(行) 코즈노스케(上野介) 미나가노마히토(御長真人) 히로타케(廣岳)와 정6위상 행식부대록(行式部大録) 쿠와바라노기미(桑原公) 아키나리(秋成) 등을 보내어 압송하였다. 그 왕에게 새서(璽書)를 내렸다. "덴노는 공경히 발해국왕에게 묻소. 짐은 하무(下武)를 이어받아 선왕의 법을 이음을 업으로 삼았소. 깊은 은택으로서[徳沢] 마침내 한 자리에 모여 풍속을 교화하는 명성을 널리 떨쳤으니 다른 나라라고 특별히 차이가 있는 건 아니오. 왕께서는 새로이 선기(先基)를 이어받아 구복(舊服)을 조림(肇臨)하고 상국에 대해서는 그 아름다운 법도를[徽猷] 사모하여 궐정(闕庭)으로 예신(礼信)을 보내왔소. 간곡한 말은 성실하고, 축하하고 위로함은 아주 깊거늘, 유사(有司)에서 집주(執奏)하되 쇼호(勝宝) 이전의 어떤 국서보다도 더욱 진실하며 자뭇 체제를 갖추었고 사의(詞義)가 볼만하다 하였다. 지금 정림이 올린 계문을 살펴보니 수미(首尾)가 서로 맞지 않아[不慥] 결국 구의(舊義)를 어기고 있소. 짐은 수빙(脩聘)의 도리로서 예경(礼敬)을 앞세우는 사람이외다. 이것에 어긋난다면[苟乖] 굳이[何須] 이렇게 오고갈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다만 정림 등이 辺夷에 표착하여 갖고 있던 것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여 언념(言念)이 어렵고 힘들어[艱苦], 측은한 마음이 있었소. 이에 대우를 더하여 상을 내렸고, 위로하여 안심시키고[存撫] 돌려보내노라. 또한 선왕이 뜻하지 않게[不愍] 장수하지 못하셨다 들었소. 측은한 정을 쉬이 그칠 수 없소. 이제 정림 등이 돌아가는데 부쳐서 특별히 絹 스무 疋, ■ 스무 疋, 사(糸) 1백 ■, 면(綿) 2백 둔을 보내니 먼 곳에서의 사의를 보이노라. 이르는 대로 받으시오. 여름이 더워지는데 왕과 수령(首領)ㆍ백성들은 평안하시기를. 보내는 글에 줄인 말이 한두 개가 아니오." 또한 정림에게 부쳐 태정관의 편지를 당에 있는 승려 에이쥬 등에게 보내게 했다 한다.
《뤼죠고쿠시(類聚国史)》 권제193 발해(渤海) 인용
《니혼고키(日本後紀)》 권제4 일문(逸文), 엔랴쿠(延暦) 15년(796) 5월
《니혼고키》에 이른바 숭린왕의 국서는 일본 조정에서, 지금까지의 어떤 국서보다 진실하며 깊은 뜻을 품은 '개념있는(?)' 글로 호평을 받았지만, 발해와 일본 사이에 수차례 계속되었던 '표문논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글 속에서 간무 미카도는 숭린왕에게 '앞뒤가 서로 안 맞는다', '결국 구의(舊義)를 어겼다'며 표문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지금 남아있는 표문을 봐도 표문의 내용에 뭔가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표문의 내용 앞이나 뒤에 덴노가 보기 민망한 내용이 있었고, '구의를 어겼다'는 말은 결국 발해의 국서에 일본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것은 생각건대 일만복 때와 같은, 발해와 일본을 '숙부와 조카', '장인과 사위' 관계로 규정했던 것이나 발해의 국왕을 일본 덴노 앞에서 '천손(天孫)'이라고 칭한 것이 아닐런지. 일본이 일본 잣대로 발해를 자신의 조공국으로 규정했던 것과는 달리, 발해도 발해 잣대로 일본 앞에서 자신들을 천손국이라고 자칭하며 일본 조정과 마찰을 일으켰던 것이다.
[十一月, 師古丁母憂, 起復左金吾上將軍同正.]
사고가 모친상[母憂]을 당하였는데, 기복(起復)하여 좌금오상장군(左金吾上將軍) 동정(同正)으로 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구당서》에 따르면 사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은 당 덕종 정원 12년, 발해 정왕 정력 2년 11월의 일인데, 좌금오상장군 동정이란 벼슬은, 앞서 모친상을 당했던 납왕이 탈상 뒤에 받았던 관직이기도 하다. 기복(起復)이라는 한자에 대해서 찾아봤는데, '기복출사(起復出仕)'라는 단어의 준말로 부모 상중에 벼슬을 한다는 의미다. 원래 부모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도 불구하고 사고왕의 어머니가 죽자마자 당조에서 그를 바로 조정에 복직시킨 것이다.(납왕 때에도 탈상을 모두 마친 뒤에야 새로운 관직을 주었다) 당조는 사고왕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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