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7071710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8>후고려기(後高麗記)(21) - 광인"에서 중앙관제 관련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의 제도정비와 중앙관제

《신당서》는 장건장의 발해 견문록인 《발해국기》(834)를 전거로 발해의 중앙관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삼성육부'란 곧 선조성ㆍ정당성ㆍ중대성의 세 성을 중심으로 충ㆍ인ㆍ의ㆍ지ㆍ예ㆍ신의 여섯 부를 거느렸고 그밖의 다른 부수적 기관들을 산하에 설치해 관리했다는 것임을 앞서 말한바 있다. 여기서는 발해 성왕 때에 발해의 기본제도가 '법령'으로 정착되었음을 전제하고 글을 쓰는 것임을 밝혀둔다.
 
3성 6부와 함께 7사(寺)ㆍ1대(臺)ㆍ1국(局)ㆍ1원(院)ㆍ1감(監), 군사조직으로 10위(衛)가 설치되었는데, 대체로 중국 제도를 본따서 설치했다. 소위 '5경 15부 62주'로 대표되는 발해의 행정구역 구획도 당조의 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신당서》에는 개주와 숭주를 제외한 60주의 이름만을 수록하고 있다.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는 741년을 마지막으로 발해에서 말갈인 고유의 이름을 띠고 있는 사신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점, 약홀주니 목저주니 하는 고려식 지명들이 759년까지 확인되다가 갑자기 834년에 이르면 당의 그것과 같은 한 글자식 지명으로 이름이 바뀌며, 그 변화가 759년에서 834년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지적한다. 문왕 시대를 기점으로 지명과 인명에 대한 당풍화(唐風化)가 강하게 진척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문왕이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으로 바꾼 것(773)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웃나라 경덕왕의 경우처럼 경덕왕이 한문식으로 바꾼 우리나라 고유지명이나 관직명 및 기구 같은 것은 경덕왕 사후에 즉위한 혜공왕 때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는데, 보력에서 다시 예전의 연호 '대흥'으로 되돌린 것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발해의 당풍화정책이 국내의 압력과 반발에 부딪쳐 결국 수포로 돌아갔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런지. 그리고 문왕이 실패한 당풍화정책을 다시 완성시켰거나 절충시키는 시도가 화여왕 때에 있었고, 그것이 화여왕으로 하여금 '성왕(成王)'의 존호를 받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758년 8월에 관명을 당풍으로 고쳤다가 다시 복구했고 신라에서도 경덕왕이 죽자마자 옛 제도로 회귀했지만 발해에서만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을 들어 하마다 고사쿠는 신라나 일본과는 달리 발해에서는 당풍화한 제도를 예전처럼 되돌려놓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과 다를 것이다. 완전히 되돌리지는 않아도 약간의 '절충'을 통해서 당풍의 제도와 나란히, 발해 고유의 제도를 되돌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7사란 곧 전중시ㆍ종속시ㆍ태상시ㆍ사빈시ㆍ대농시ㆍ사장시ㆍ사선시를 말하고,
1대란 중정대이며, 1국은 항백국, 1원은 문적원이며 1감은 주자감이다. 이들 관서의 역할에 대해 찾아보니까
전중시는 가독부의 의복·가마·음식 같은 생필품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고,
종속시는 가독부의 일가 친척의 족보를 맡고(고려나 조선의 종친부처럼)
태상시는 국가 제사 및 예절 문제를 맡아보던 의부(예부)소속 관아이고,
사빈시는 앞서 소개했듯 외교를 맡아보는 관청(홍려관처럼)
대농시는 농업ㆍ곡식업무 수행 및 창고 관리를 맡아보고
사장시는 외국과의 교역 및 재화를 관리하던 인부(호부)소속 관청이며(발해에만 있었음),
사선시는 궁중의 술과 음식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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