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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 엔하위키미러"에서 "3.7 발해와 소고구려 그리고 유민들"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와 소고구려 그리고 유민들

고구려가 망하고 일군의 고구려 유민들이 요서의 영주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영주에서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걸걸중상, 대조영 등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동모산으로 도망가서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698년 발해를 세웠다. 고구려 영역에서 고구려인들이 세운 덕분인지 고구려 계승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밖에 제2돌궐제국을 세운 묵철가한의 사위가 고구려 유민 고문간임을 볼 때 고구려 인들이 돌궐에도 망명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편,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당은 고구려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검모잠이 한성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결국 안승, 고연무등은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는 이들을 금마저에 살게하고 보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신라의 부용국 노릇을 하게 했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때 보덕국 사신을 딸려 보내 보덕국이 신라의 부용국임을 분명히 했다.

신라 신문왕이 안승을 경주로 불러 경주 근방에 식읍을 내리며 살게 하자 보덕국이 없어질 걸 두려워한 고구려 유민들이 안승의 서자 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계백에게 죽었던 화랑 반굴의 아들 영윤이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할 정도로 반란은 거셌지만 곧 진압되었다. 보덕국인들은 남쪽 군현에 사민되었고 9서당중 2개 서당인 벽금서당, 적금서당을 이루었다.

보덕국인과 별개로 신라에 정복된 고구려인, 말갈인들을 각기 황금서당과 흑금서당에 편재하기도 했다.

한편 삼국통일 후 고구려인들은 신라내에서 백제인들에 비해 대우가 좋았다. 백제의 지배층을 5두품에 편제한 반면 고구려 지배층들은 6두품까지 쳐주었다. 안승은 진골까지 됐으니 백제에 비해 대우가 좋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별개로 요동에선 별도의 고구려 부흥노력이 있었다. 고구려인들을 위무할 필요성을 느낀 당은 보장왕을 조선군왕으로 봉해 요동을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보장왕도 생각보다 물이 아니라 고구려 재건을 꿈꾸었다. 그런데 발각되어 유배되고 당은 다시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봉했고 고보원이 반당정책을 취하자 그를 폐하고 고덕무를 세웠다. 고덕무 이후 요동은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학자에 따라 소고구려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고구려는 약 100년간 존속한 걸로 추정한다.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이 요동을 차지한 점과 '고구려 승려'가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사를 볼 때 발해 선왕시기 발해에게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인근의 요서에서 산동으로 강제 이주된 이정기와 고구려 유민들이 산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를 건국했다. 아직까지 고구려 계승의식은 확인되지 않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제의 건국에 참여한 흔적들이 확인되고 연구결과에 의하면 제의 제도가 고구려,발해의 것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9세기에는 통일신라에서 현재의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흩어저 살던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의 밑에서 규합되어 후고구려가 건국되고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 무인집권기 서경에서 무인집권층에 반발해 고구려 부흥운동이 있었다. 고려=고구려를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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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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