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8553479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6>후고려기(後高麗記)(29) - 광인"에서 이사도 관련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이사도 (4)

사신을 보낸 것이야 의심스러운 것이 없지만, 인수왕이 간왕의 죽음을 고하고도 당조에서는 5월에 가서야 인수왕을 발해왕으로 책봉했다. 무려 넉달 동안이나, '권지국무' 인수왕에게 발해왕의 자리를 인정해주지 않은 것이다. 뭐 지들이 인정해주든 말든 인수왕이 이미 발해 안에서만큼은 '왕'으로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 없겠지만, 넉 달 동안이나 당조에서 인수왕의 계승을 공식승인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조의 혼란스러웠던 사정과도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조는 이 무렵 사도왕을 토벌하기 위한 마지막 숨고르기에 들어간 상태였고, 오원제 토벌 종료 뒤부터 번진들은 하나둘씩 당조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3월, 횡해군절도사 정권이 창주와 경주 2주를 바치며 당조에 항복했다. 사도왕의 동맹이었던 왕승종까지 이에 자극을 받아, 다음달 4월에 덕주와 체주를 당조에 바치고 항복해버리면서 사도왕은 고립된다.
 
[五月, 唐冊王, 銀靑光錄大夫ㆍ檢校秘書監ㆍ忽汗州都督ㆍ渤海國王.]
5월에 당이 왕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ㆍ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ㆍ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삼고 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선왕 건흥 원년(818)
 
《구당서》헌종 원화 12년 5월 을축조에는 은청광록대부라는 작호는 빠지고 검교비서감ㆍ홀한주도독ㆍ발해국왕이라는 호칭만 등장한다. 당조가 사도왕의 제를 무너뜨리고자 총공세를 준비하고 그렇게 제가 고립되는 와중에 발해가 제를 '동족'으로서 도왔다면 어땠을까. 같은 고려인이 세운 나라 아닌가.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 제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발해는 철저하게 제의 멸망을 방관할 뿐이었다.
 
발해는 정기왕 때부터 치청번진에 자국의 명마를 거래해온 경력이 있다. 자신들의 VIP 고객이나 다름없는 제가 당조로부터 고립되고 결국 총공세를 당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발해는 끝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마도 발해 조정의 '불온한' 내부사정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희왕이 뜬금없이 죽고, 간왕도 1년만에 살해되고 인수왕이 즉위하는 과정은 정상적인 왕통계승의 과정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과정들이었다.(폐왕 대원의가 죽고 성왕과 강왕이 즉위할 때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十三年七月, 滄州節度使鄭權破淄青賊於齊州福城縣, 斬首五百余級. 十月, 徐州節度使李愬ㆍ兵馬使李祐, 於兗州魚臺縣, 破賊三千余人.]
13년(818) 7월에 창주절도사(滄州節度使) 정권(鄭權)이 치청의 적들을 제주(齊州) 복성현(福城縣)에서 깨뜨리고 5백여 급을 참수하였다. 10월에 서주절도사(徐州節度使) 이소(李愬)와 병마사(兵馬使) 이우(李祐)가 연주(兗州)의 어대현(魚臺縣)에서 적 3천여 인을 베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창주절도사의 공격을 받아 제의 서북쪽에 있던 제주 복성현 방어선은 무너졌다. 여기에 병을 얻은 형을 대신해 무령군절도사가 된 이소ㅡ서주자사의 휘하병마사 이우가 남쪽에서부터 제를 공격해왔다.(서주와 연주의 사이는 서로 100km쯤 된다.) 서주절도사가 제를 치기 한 달 전인 9월경에, 선무절도사 한홍이 제의 서쪽 조주의 최남단 고성을 공격해 빼앗고, 회남절도사 이이간(李夷簡)은 제의 남동쪽 해주를 공격했다. 《신당서》에는 이때 이이간의 휘하였던 초주자사 이청(李聽)이 해주를 공격했다는데, 남쪽에서부터 술양과 구산을 함락시키고 멀지 않은 곳의 해주 치소(중심도시)였던 동해까지 점령하면서, 해주는 완전히 당조의 손에 넘어간다. 제가 신라와의 교역에서 항구로 사용하고 신라 사신들을 맞이하여 창안으로 안내하던 중간거점이 당조에 넘어가면서 제의 대신라무역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戊寅, 軍前擒到李師道將夏侯澄等四十七人, 詔並釋付魏博及義成軍收管. 要還賊中者, 則量事優給放還.]
무인에 군이 이사도(李師道)의 장수 하후징(夏侯澄) 등 47인을 붙잡았다. 조하여 용서하고 모두 위박(魏博) 및 의성군(義成軍)에 맡겨 부리게 하였다. 적들에게 돌아가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곧 노자를 주고 풀어주었다.
《구당서》헌종본기 원화 13년(818) 12월
 
12월 무인에 사로잡은 제의 포로들에게 헌종은 '천자의 이름으로' 특전을 내린다. 
 
[初, 東軍諸道行營節度, 擒逆賊將夏侯澄等共四十七人, 詔曰 "附麗兇黨, 拒抗王師, 國有常刑, 悉合誅戮. 朕以久居汙俗, 皆被脅從, 況討伐已來, 時日不幾, 縱懷轉禍之計, 未有效款之由, 情似可矜, 朕不忍殺. 況三軍百姓, 孰非吾人? 詔令頒行, 罪止師道. 方欲拯於塗炭, 是用活其性命. 誠為屈法, 庶使知恩. 並宜特從釋放, 仍令卻遞送至魏博及義成行營, 各委節度收管驅使. 如父母血屬猶在賊中,或羸老疾病情切歸還者,仍量事優當放去,務備相全貸,何所疑留。」及澄等至行營,賊覘知傳告,叛徒皆感朝恩.]
처음에 동군제도행영절도(東軍諸道行營節度)가 역적의 장수 하후징(夏侯澄) 등 47인을 생포했는데, 조를 내려 말하였다. “고려의 흉악한 무리에 붙어 왕사(王師)에 맞섰으니 나라의 상형(常刑)에 따라 모두 주살됨이 옳도다. 짐은 너희가 오래도록 우속(汙俗) 안에 살면서 모두 그 풍속에 물든 데다 모두가 협박 때문에 마지못해 따랐고 토벌을 시작한 이래로 시일이 얼마 안 되어 설령 전화위복의 계책을 품었다 해도 성심을 다할 길이 없었으니 사정이 가련하여 짐은 차마 죽이지 못하겠도다. 하물며 3군(軍)의 백성으로서 내 사람이 아닌 자 누가 있으랴? 조하노니 영이 행해질 때는 그 죄를 사도에게만 묻도록 하라. 방금 도탄에서 구하고 그 목숨까지 부지시켜주었다. 이는 실로 법을 어긴 처사이니 이 은혜를 모두에게 알리도록 하라. 아울러 특별히 석방한 자들은 위박(魏博)과 의성(義成)의 행영(行營)에 보내어 각 절도에게 맡겨 부리도록 하라. 부모와 혈속이 아직 적들 손에 있거나 여위고 늙고 병들어 못 돌아가는 자는 사정을 봐서 돌려보내되 반드시 노자를 주어 보내도록 할 것이니 무엇을 의심하여 남겨두겠는가.” 징(澄) 등이 행영에 이르자 적은 이를 탐지하고 서로 전했는데 반란을 일으켰던 무리들 모두 조은(朝恩)에 감격하였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헌종의 명으로 제를 토벌하는 군대는 '동군제도행영절도'라고 불렸다. 제가 창안에서 동쪽에 있으니 '동군'이고, '여러 절도사의 군대로 모인 비정규군'이라는 뜻으로 '제도행영절도'라고 한 것으로 당조의 중앙군이 아닌 지방번진의 연합부대로 제를 토벌하는 것을 보여준다.
 
헌종은 조서에서 '여흉당(麗兇黨)'이라는 단어를 써서 사도왕과 제를 지칭하고 있다. 흔히 '고려'의 뒷글자만 떼서 고려를 가리키는데 썼으니 '여흉당'이라는 건 곧 '고려의 흉악한 무리'라는 의미가 된다. 당조에게 제와 사도왕 일문, 그리고 그 땅의 백성은 '고려인'으로 불리고 있었던 타지인이었다. 고려 멸망과 발해 건국 이후 무려 2백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건만, 당조는 끝내 고려인들을 포섭하지 못했고 고려인들도 끝까지 당조에 흡수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당조에게 그들은 '흉악한 무리'였고 그들의 문화는 '나쁜 풍속'에 불과했다.
 
잡혀온 제의 군사들에게 헌종은 철저히 유화책으로 들어갔다. 죄는 제왕 이사도, 그 한 사람에게만 묻고 나머지에게는 모두 죄를 묻지 않겠다ㅡ라는 파격적인 제안은 철저하게 '천자'의 이름으로 공표되고 '천자'의 뜻으로 포장되어 반포되었다.
 
사실 헌종으로서도 이들을 철저하게 처벌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보다도 훨씬 세력이 약하던 오원제를 토벌하는 데에만 2년을 들였던 당조다. 자칫 잘못해서 제의 모든 백성들이 당조에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반발할 수도 있다. 흔히 조선놈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력으로 억누르고 총칼로 짓밟으면 밟을 수록 용수철처럼 더 강하게 맞서는 일이 허다했다. 당장 일제시대만 해도 '무단통치' 시대보다 '문화통치' 시대에 더 많은 친일파들이 나왔고 독립운동을 지도했던 1세대들 가운데 변절하는 사람도 늘어났지 않은가. 가만 생각하니 사로잡힌 포로들에게 노자를 주고 돌려보내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일찌기 당 태종이 고려를 칠 때 개모성과 요동성의 포로들에게 썼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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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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