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13820001
졸본성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고구려의 첫 도읍지
일반정보
고구려의 첫 도읍지(기원전 37-기원후 3)로 현재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되며 근처 평원의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과 함께 산성과 평지성을 이용한 고구려의 관방체계를 보여준다.
전문정보
주몽이 세운 고구려의 첫 번째 도읍지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북부여조와 고구려조에서 동명제(東明帝) 혹은 주몽(朱蒙)이 졸본주(卒本州)에 도읍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세웠는데, 이것이 고구려(高句麗)의 시초라고 하였다. 반면 『위서』 권100 열전88 고구려조에서는 주몽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머무르고 나라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렇게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 『삼국사기』에는 졸본(卒本),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 그리고 『위서』에는 흘승골성(訖升骨城) 등 여러 지명으로 보이는데, 그 지역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졸본(卒本)”과 “홀본(忽本)”은 글자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위서』 고구려조의 “흘승골성(訖升骨城)”의 “승(升)”은 “본(本)”의 잘못으로 보는 의견이 있고 “골(骨)”은 고구려에서 성을 의미하는 “구루(溝婁)”와 통한다고 한다. 따라서 졸본․홀본․흘승골성이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킨다는 것이다.(田中俊明/다나카 도시아키, 1995)
졸본은 현재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으로 비정되는데, 환인현은 요녕성 동남단의 산악지대에서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渾江)의 중류에 위치한다. 환인에 고구려의 건국지가 있었다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잊혀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졸본(卒本)에 도읍한 시기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3년까지 40여년에 불과하지만, 고구려의 후대의 왕들이 도읍을 옮긴 후에도 이곳에 와서 시조묘(始祖廟)에 대한 제사를 지낼 정도로 중시된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양(平壤)의 동북에 있는 대동강(大同江) 상류의 성천(成川)을 졸본이라 하였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졸본을 흥경(興京), 즉 지금의 신빈(新賓) 땅이라 하였는데 꽤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주목하는 것은 고구려가 후에 옮겨졌다고 여겨지는 “국내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을 올날산성(兀剌山城)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올날산성은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의 별칭으로 그것을 고구려에 결부시켜 보았다.
오녀산성을 최초 고구려의 흘승골성에 대응하여 환인을 졸본으로 인정한 연구가 나왔다.(白鳥庫吉/시라토리 구라키치, 1970) 이후 북한에서 1963년에 산성의 문지(門址)와 연못을 조사하여, 축조기법 등에서 고구려의 산성이라고 추측했지만, 연대는 한정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환인에서 정밀한 조사가 진행되어 그런 문제가 해소되게 되었다. 1986년 오녀산성 정상부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적석총도 상고성자(上古城子) 묘군(墓群)도 3세기 이전의 구조를 보였다. 따라서 환인은 90년대 중반 졸본으로 비정되는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田中俊明/다나카 도시아키, 1995)
졸본성(卒本城)은 현재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근처의 평원(平原)에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이 있어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되는 고구려 도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주몽이 활용한 도성은 평지성인 하고성자성이라 추정된다.(李殿福/리덴푸 외, 1990)
오녀산성(五女山城)은 환인현성(桓仁縣城)의 동북쪽 혼강(渾江) 북안(北岸)의 오녀산(五女山) 정상부에 있다. 오녀산성은 해발고도가 평균 800m에 서남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둘레가 절벽과 같이 깎여 있으며 상대적으로 주위산세에 홀로 서있다. 남북 길이 1,540m, 동서 너비 350-550m, 면적은 약 600,000㎡이다. 암벽산성으로 불규칙적인 장방형(長方形)에 가까우며, 성곽은 대부분 천연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은 천연이 절벽으로 되고, 동벽과 남북벽은 석축(石築)하였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4,754m 이고 그 중 천연 성벽(城墻)의 길이는 4,189m, 약 전체 성곽의 88%이며 인공으로 축조한 성곽은 565m이다. 동・서・남의 3개 성문과 1-3호의 대형 건축유적・병영・초소・거주유적・저수지・요망대 등 다양한 시설들이 확인되었고 관련유적도 시기별로 다량 출토되었다.
오녀산 출토 유물은 시기에 따라 5기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제3기 문화층에서 출토된 수이관(竪耳罐)은 집안 국내성석장하토원(國內城石墻下土垣)에서 출토된 도관(陶罐)과 유사하여 두 지역의 시기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성석장하토원(國內城石墻下土垣)의 시대적 하한은 발굴자가 한나라 초기로 상정하였는데, 고구려초기 적석관묘(積石棺墓)이다. 이로 인해 오녀산 제3기 문화의 대체적 시기는 한대(漢代)로 생각되므로 고구려 건국 전후에 해당하고, 따라서 오녀산성을 졸본성으로 볼 수 있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2004)
그러나 오녀산성은 높은 산 위에 있는 까닭에 정치, 경제적 발전과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불편한 점이 많고, 산상(山上)의 면적이 한정되어 있어서 많은 인구를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 산하(山下)의 평지에 도성의 일부가 옮겨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하여 환인현성(桓仁縣城)의 서쪽 2km 지점의 혼강(渾江) 서안(西岸)에 있는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이 있어 그러한 평지성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陳大爲/천다웨이, 1960) 하고성자성의 규모는 동 226m・서 264m・남 212m・북 237m로 강의 퇴적 및 주민생활공간이 중첩되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고 일부 고구려시기 유물이 출토되었다.(田中俊明/다나카 도시아키, 1995)
참고문헌
白鳥庫吉, 1970, 『白鳥庫吉全集』3, 岩波書店.
李殿福․孫玉良, 1990, 「高句麗的都城」, 『博物館硏究』1990-1.
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 2004, 『五女山城』, 文物出版社.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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