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10910001


흘승골성


천제(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의 도읍으로 정한 곳이다.



일반정보


천제(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北夫餘)의 도읍으로 정한 곳으로,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음을 『삼국유사』기이1 북부여(北夫餘)조의 분주에 기록하고 있다.



전문정보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1 기이1 북부여(北夫餘)조에서 「고기(古記)」 인용 가운데에는 있으며, 천제(해모수)가 내려와 북부여의 도읍으로 정한 곳이다. 또한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음을 분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요라는 표현을 미루어 분주는 11세기 후반의 「고기」에 있던 원주(原註)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三品彰英, 1975)


그러나 이와 다르게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에 인용된 『통전(通典)』과 「고기」에 보이는 흘승골성과 졸본(卒本)을 동일 지점으로 고증하면서 대요의 의주를 언급하였는데, 『삼국유사』의 『삼국사기』에 대한 참작의 정도를 고려해 볼 때 흘승골성에 대한 북부여조의 분주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유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이강래, 2005)


대체적으로 흘승골성은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된다. 오녀산성은 환인현성의 동북쪽 혼강(渾江) 북안(北岸)의 오녀산(五女山) 정상부에 있다. 오녀산성은 해발 804m에 남북 1540m, 동서 350-550m, 주위 4754m 암벽산성으로 전체적으로 장방형(長方形)에 가깝다.(여호규, 1998)


오녀산성(五女山城)은 환인현성(桓仁縣城)의 동북쪽 혼강(渾江) 북안(北岸)의 오녀산(五女山) 정상부에 있다. 오녀산성은 해발고도가 평균 800m에 서남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둘레가 절벽과 같이 깎여 있으며 상대적으로 주위산세에 홀로 서있다. 남북 길이 1,540m, 동서 너비 350-550m, 면적은 약 600,000㎡이다. 암벽산성으로 불규칙적인 장방형(長方形)에 가까우며, 성곽은 대부분 천연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은 천연이 절벽으로 되고, 동벽과 남북벽은 석축(石築)하였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4,754m 이고 그 중 천연 성벽(城墻)의 길이는 4,189m, 약 전체 성곽의 88%이며 인공으로 축조한 성곽은 565m이다. 동・서・남의 3개 성문과 1-3호의 대형 건축유적・병영・초소・거주유적・저수지・요망대 등 다양한 시설들이 확인되었고 관련유적도 시기별로 다량 출토되었다. 오녀산 출토 유물은 시기에 따라 5기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제3기 문화층에서 출토된 수이관(竪耳罐)은 집안 국내성석장하토원(國內城石墻下土垣)에서 출토된 도관(陶罐)과 유사하여 두 지역의 시기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성석장하토원(國內城石墻下土垣)의 시대적 하한은 발굴자가 한나라 초기로 상정하였는데, 고구려초기 적석관묘(積石串墓)이다. 이로 인해 오녀산 제3기 문화의 대체적 시기는 한대(漢代)로 생각되므로 고구려 건국 전후에 해당하고, 따라서 오녀산성을 졸본성으로 볼 수 있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그러나 오녀산성은 높은 산 위에 있는 까닭에 정치, 경제적 발전과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불편한 점이 많고, 산상(山上)의 면적이 한정되어 있어서 많은 인구를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 산하(山下)의 평지에 도성의 일부가 옮겨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하여 환인현성(桓仁縣城)의 서쪽 2km 지점의 혼강(渾江) 서안(西岸)에 있는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이 있어 그러한 평지성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陳大爲, 1960) 하고성자성의 규모는 동 226m・서 264m・남 212m・북 237m로 강의 퇴적 및 주민생활공간이 중첩되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고 일부 고구려시기 유물이 출토되었다.(田中俊明, 1995)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上, 塙書房.

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여호규, 1998, 『高句麗 城』Ⅰ, 국방군사연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 2004, 『五女山城』, 文物出版社.

이강래, 2005, 「『삼국유사』기이편의 자료 수용 방식」『『삼국유사』 기이편의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북부여)


北扶餘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見下]


북부여


「고기(古記)」에 의하면 전한서(前漢書)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기원전 58)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지경에 있다]에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였는데, 해(解)로써 씨(氏)를 삼았다. 왕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기었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北扶餘)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라 하였으니, 즉 고구려(高句麗)의 시작이다.[아래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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