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22120001
북부여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기원전 3-2세기부터 송화강을 중심으로 494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존속했던 국가.
일반정보
북부여는 기원전3-2세기 송화강을 중심으로 494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존속했던 국가이다. 『삼국유사』 기이1 북부여조에는 해모수가 흘승골성에 내려와 나라를 세워 북부여라하고 아들 해부루가 상제의 명령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전문정보
북부여(北扶餘)는 기원전3-2세기 송화강을 중심으로 494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존속했던 국가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북부여(北扶餘)조를 통해 “「고기(古記)」에 전한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기원전 58년) 4월 8일에 천제자(天帝子)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고 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하였다.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고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으며, 왕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기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웠으며, 상제의 명령으로 동부여에 도읍을 옮기고, 동명제가 나라를 세운 후에는 졸본부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 외에도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등을 통해서 “부여-동부여-북부여-졸본부여”라 지칭되는 다양한 부여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은 부여사의 전개과정 인식하는데 적지 않은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핵심은 북부여와 동부여의 실체규명 여하에 있으며, 이에 관한 논의는 북·동부여가 같은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견해와, 북부여에서 동부여가 갈라져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북・동부여가 같은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견해는 한・중학계 일각에서 개진되고 있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고구려 건국 당시 북부여·동부여가 같은 시기에 각기 다른 지역에 실재해 있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견해도 학자마다 매우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흘승골성(紇升骨城) 곧 환인(桓仁)지방을 그 중심지로 하는 북부여에서 출자한 동부여는 가섭원(迦葉原)에 입국하였으나, 기원후 22년 대소왕(帶素王)대에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 공멸되었다고 주장하는 중국 학계 견해가 대표적인 것이다.(張博泉, 1981) 우리 학계에서는 고구려 건국당시 계루부(桂婁部)의 고지(故地)로 비정되는 두만강(豆滿江) 유역에 동부여가 실재했었는데,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정복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또 이 견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410년 원정한 동부여란 285년 모용씨에 의해 북부여가 망하자 그 잔류가 친연관계에 있는 이 동부여의 고지로 옮겨 온 이래 성립된 존재라 보고, 494년 고구려로의 부여왕 내항(來降)을 이 동부여의 멸망과 연계시켜 이해하는 것이다.(서영수, 1988)
또 다른 견해는 송눈평원(松嫩平原)의 북부여와 송화강 유역의 부여 및 원부여 동쪽의 동부여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곧 동부여는 동해안 일대에 실재했던 국가라기보다는 원부여(북부여)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다.(송호정, 1997)
한편 1970년대 이래 북한 사학계는 “북부여=고리국(탁리국)=맥국”이라 상정하고, 부여와고구려 모두가 북부여에서 연원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한편 동부여란 고구려 건국 초부터 그에 예속된 지역으로서 부여의 동쪽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리지린・강인숙, 1976)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학계의 다수는 기존의 제 사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전제로 북부여는 원부여이며, 동부여는 훗날 이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세력이 세운 나라로 보고 있다.(노태돈, 1989; 박경철, 2004; 송기호, 2005) 이는 곧 북·동부여 통시적 분기론이라 볼 수 있다. 이 견해는 본래 주몽의 고향은 송화강 유역의 북부여(부여)로서 기원후 5세기말 고구려에 합병되었고, 동부여란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씨의 공격을 받은 북부여의 일족이 세운 나라인바,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에 통합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북부여란 탁리국 동명집단이 중심이 되어 길림지방을 그 중심지로 기원전 3-2세기 말경 국가를 형성하고 기원후 4세기 중반 농안 지방으로 그 중심지를 이동하여 이후 494년까지 존속한 바 있는 부여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동부여란 고구려 건국 당초에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기원후 285년 선비 모용외의 제1차 부여 공격으로 부여(북부여)의 일부 핵심 지배집단이 옥저지방으로 망명하여 건국한 나라로서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사행동에 의해 공멸되었다는 견해이다.(박경철, 2006)
종래 우리 학계의 대부분은 부여의 초기 중심지가 이통하(伊通河) 유역의 농안·장춘일대라는 입장을 정설화 한 바 있다.(이기백・이기동, 1983) 북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 우리 학계 다수는 부여의 초기 중심지가 이통하 유역의 농안·장춘 일대라는 입장을 정설화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후 중국 및 우리 학계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문헌사료 등을 참작하여 부여의 초기 중심지를 파악하였는데 초기 부여의 왕성은 길림시 동단산(東團山) 남성자(南城子)로 파악하고 기원후 4세기 이후의 부여 중심지역을 농안으로 파악하고 있다.(노태돈, 1989) 한편 길림 동단산 남성자는 궁성으로, 용담산성 일대는 도성에 해당되며, 이 두성이 합쳐져서 부여 전기 왕성을 이룬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한편 후기 북부여 중심지를 농안・장춘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그 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부재를 근거로 요녕성 서풍현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제시한 견해가 있다.(송호정, 2003; 오강원, 2006)
부여의 기본적 지배질서를 엿볼 수 있는 사료는 『삼국지』이다. 우리 학계는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기록 “읍락에는 호민이 있고, 민은 하호로서 모두 노복으로 삼았다.(邑落有豪民 民下戶 皆爲奴僕)”으로 새기면서 부여의 기본적 지배질서가 왕과 제가 그리고 호민, 민(하호), 노복(노비)이라는 구조로 운영되었음을 상정하였다.(김철준, 1978; 이기동, 1983) 한편 부여가 연맹체적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해 가는 왕권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지 못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송호정, 1997)
참고문헌
리지린·강인숙, 1976, 『고구려사 연구』, 사회과학출판부.
張博泉, 1981, 「夫餘史地叢說」『社會科學輯刊』1981-6.
서영수, 1988, 「廣開土大王陵碑의 征服記事의 再檢討(中)」『歷史學報』119.
노태돈, 1989, 「夫餘國의 境域와 그 變遷」『國史館論叢』4.
송호정, 1997, 『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송호정, 2003, 『한국고대사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박경철, 2004, 「夫餘史 연구의 諸問題」 『동북아시아 선사 및 고대사 연구의 방향』, 학연문화사.
송기호, 2005, 「夫餘史 연구 쟁점과 자료 해석」『韓國古代史硏究』37.
박경철, 2006, 「부여」 『한국고대사입문』2, 신서원.
오강원, 2006, 『비파형동검문화와 요령지역의 청동기문화』, 청계.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북부여)
北扶餘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見下]
북부여
「고기(古記)」에 의하면 전한서(前漢書)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기원전 58)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지경에 있다]에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였는데, 해(解)로써 씨(氏)를 삼았다. 왕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기었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北扶餘)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라 하였으니, 즉 고구려(高句麗)의 시작이다.[아래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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