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517202708654?s=tv_news
'빨갱이 낙인'에 망가진 삶.."그래도 후회 안 한다"
임태우 기자 입력 2020.05.17 20:27 수정 2020.05.17 20:27
최후까지 싸웠던 기동타격대..얼룩진 40년
<앵커>
또 1980년 5월 27일 새벽에 제 뒤에 도청에서 최후까지 싸웠던 시민군들, 기동타격대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문 때문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는데 빨갱이라는 오명까지 씌워져서 남들 같은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임태우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40년 전 광주 시내 다방에서 일했던 염동유 씨.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시민군이 됐고 기동타격대에도 망설임 없이 자원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에 붙잡힌 뒤 더욱 모진 구타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염동유/5·18 기동타격대원 : 메리야스 구석에다가 '순 악질'이라고 써놔 가지고, 천막에서 두들겨 패요. 그때는 아주 우리가 6개월 동안을 두들겨 맞았어요.]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장애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국가 배상금은 18년 전 받은 3천만 원이 전부입니다.
[염동유/5·18 기동타격대원 : 수술을 다리에 11번 했습니다. 지금은 (심한 통증으로) 이 머리가 이상하게 돼서 돌아버려요.]
계엄군 총탄을 손에 맞았던 김재귀 씨는 아직도 악몽에 시달립니다.
[김재귀/5·18 기동타격대원 : 눈만 감으면 꿈속에서 제가 누구한테 쫓기는 꿈. 아니면 우리들이 막 달아나는데 '저 ○○ 잡아라. 저 ○○ 잡아라!' 막 쫓아 오는 꿈(을 꿔요.)]
총상이나 악몽보다 이들에게 더 무서운 건 '빨갱이'란 낙인이었습니다.
[김재귀/5·18 기동타격대원 : 막노동이나 좀 하고, 어디 들어갈 데도 없어요. 공장에서도 안 받아줍니다, 솔직히. (전과기록을) 다 떼어보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빠꾸( 거절)…]
사회적 차별에 생활고까지 이들의 삶은 망가져 갔습니다.
40년 전 행동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임성택/5·18 기동타격대원 : 후회한 적은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도 총을 들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했다는 그 자부심 하나 갖고….]
(영상취재 : 오영춘, 영상편집 : 박기덕)
임태우 기자eight@sbs.co.kr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5 숨은 영웅' 美나바호족 참전용사에 마스크 1만장 전달 - 뉴시스 (0) | 2020.05.18 |
---|---|
"5·18 폭동" "북한 개입" 유튜브 점령한 제2의 지만원들 - 노컷 (0) | 2020.05.17 |
가해자들은 훈장 받고 잘 살고 있다... 구상권 왜 청구 못하나 - 연합 (0) | 2020.05.17 |
[인터뷰] '집단발포 명령자' 이번엔? 진상조사위 최용주 과장 - JTBC (0) | 2020.05.17 |
"5·18 왜곡·비방 그만"..'역사 바로세우기' 8법 추진 - JTBC (0) | 2020.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