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bestchoi21/30013700445 
* 원출처가 고구려발해학회인데 현재 공사중이라 임시로 다른 주소를 올렸습니다.

국내성의 압록강 방어체제연구 
윤명철(동국대)

1 서론 
2 국내성(國內城)의 수도(首都) 조건 검토 
3 압록강의 군사전략적 환경   
4 압록강변 방어체제  
5 결론 


1  서론 
 
본고를 작성한 목적은 단순한 군사전략적인 관점에서 압록강(鴨綠江) 강변방어체제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가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한 이유와 좁은 지역에서 400여 년 간 도읍으로 삼고, 또 고구려를 크게 발전시킨 배경 가운데 하나를 찾아내는데 주된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압록강이라는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데 주목하고자 한다. 압록강은 다른 내륙의 강들과는 달리 서해와 연결된다는 강점이 있다. 결국 고구려가 발전하는 데는 압록강을 이용하여 海洋으로 뻗어나간 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첫째는 효과적인 대외진출을 목적으로, 둘째는 수도권과 압록강 水運 및 河口를 보호할 목적으로 압록강의 주위에 군사시설 내지 방어체제를 구축하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목적을 염두에 두면서 먼저 국내성의 수도조건을 검토하면서 압록강이 지닌 의미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압록강의 군사전략적인 환경을 살펴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가치와 기능을 검토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구려가 구축한 군사시설에 대해 살펴본다. 군사시설은 1차적으로 국내성 및 주변유역, 그리고 하류를 대상으로 삼아 전략적으로 중요한 몇 개 지역을 선정한 다음에, 현장을 직접 조사하고, 그 곳의 성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러나 필자의 현장 조사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고고학적인 조사 또한 불충분한 상태이므로 성곽 구조 시설물 등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언급은 소략하였다. 

2 국내성(國內城)의 수도(首都) 조건 검토 

1) 정치경제적 측면 
 
고구려는 몇 번의 수도천도가 이루어졌고, 수도가 파괴되었으며, 또 중심수도 외에 부수도도 있었다.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홀본(忽本)_(흘승골성:訖升骨城)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주몽이 비류수(沸流水)가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고구려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라고 하여 비류수가 산성에 도읍을 정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삼국지} 고구려전과 {후한서} 고구려전에 의거해 현재의 압록강인 대수(大水)와 그 북지류(北支流)인 소수(小水)인 혼강(渾江) 유역의 흘승골(紇升骨)에서 건국하였다고 한다. 소수가 혼강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첫 수도를 보통 혼강(渾江) 중류인 환인(桓仁) 지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혼강은 많은 지류와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평야도 발달해있다. 압록강의 중류지역으로 나가 황해로 진출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여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2대 유리왕(琉璃王)은 현재 집안시인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다.
 
집안분지는 동서 10km 남북 5km의 분지로서 노령산맥의 준봉들에 둘러싸여 서 동 북쪽의 방어가 용이하다. 반면에 남쪽은 한강개념인 압록강을 활용하여 대피가 가능한 천혜의 요새지이다. 이 안에 있는 국내성은 동벽 555m,서벽 665m,남벽 750m, 북벽 715m, 총둘레 2700m인 궁성이다. 필자는 수차례에 걸친 답사결과를 토대로 국내성은 도성(都城)개념이 아니라 궁성(宮城)개념으로 파악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럴 경우에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성뿐 만 아니라 현재 집안시내의 주변지역 및 압록강의 남북천변도 해당한다. 그렇다면 압록강은 수도권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강이거나 궁성주변을 흐르면서 해자의 기능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성은 수도로서 어떤 가치가 있으며, 또한 바람직한 수도조건에 얼마나 부합된 것일까? 수도란 권력의 집중지이므로 한 나라의 정치 군사 문화 등 모든 분야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따라서 수도의 선택에는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수도의 평가와 선택에는 수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이해를 기본토대로 삼아야 한다. 
수도는 몇 가지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로 정치외교()政治 外交)의 중심지(中心地)이어야 한다. 정부의 각 기관으로부터 전국 도처로 명령이  신속하게 전달되고, 그 조치결과가 집결되어야 하며, 교통 통신망이 방사(放射)되고 외국으로부터 정보가 입수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가능한 한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하고(중앙적 수도:中央的 首都  central capital), 교통의 이점이 최대한 있는 곳이어야 한다. 중앙적 수도는 중앙과 주변지역 간에 가장 짧은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가능한한 넓은 영토를 통치할 수가 있다. 따라서 중앙집권화된 수도로서 적당하다. 그런데 국내성은 중앙적 수도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외교전에 불리한 환경이다. 당시 외교의 주 대상은 중국력이었고 북방은 기본적으로 진출과 침략의 적대적인 관계이었다. 중국지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면 육로교통(陸路交通)이 불편하여 해로(海路)를 통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런데 국내성은 압록강을 활용하므로써 그 한계를 보완할 수 있었다.
 
고대의 수도는 단순한 정치의 중심지만이 아니라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고대는 인간의 이동이 자유롭고 물자의 집결이 용이한 곳은 도시이다. 그리고 자급자족품목(自給自足品目) 외에 일상 생활용품과 사치품 등을 필요로 하는 곳은 대도시 내지 수도이기 때문에 수도는 경제중심지 역할도 해야 한다. 고구려는 농업경제를 상당히 중요시 하고 있었다. 건국신화에 따르면 해모수의 부인인 유화(柳花)는 동부여를 탈출하여 남천(南遷)하는 고주몽에게 오곡(五穀)의 종자를 주었다. 또 동명(東明) 등 농작물 수확을 위한 제천의식(祭天儀式)이 국가적으로 행해졌다. 이는 초기부터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농업이 고구려 경제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큰 강의 주변에는 평지가 발달하여 농경에 적합한 토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으며, 하구로 내려갈수록 그 면적은 더 없이 넓어진다. 그러므로 보통 강을 따라 국가가 발원하고 점차 영토를 확보해 가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압록강 중류지역 일대는 산악이 많고 평야는 하천연번(河川沿邊)에 좁게 산재해 있으며 척박하여, 농경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못한 지대였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인들의 눈에도 동일하게 비추어져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多大山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其俗節食…'  그런데 국내성이 있었던 집안은 동서 10km, 남북 5km인 분지로서 따뜻하고, 사람 살기에 적합하며 압록강 중류지역에선 토지가 그 중 나은 편이었다. 집안 일대에서 상당히 많은 철제(鐵製) 농업생산 도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농업이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국내성은 압록강 등을 어업에 이용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유리왕 22년(A.D.3)에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축조했는데, 그 전 해에 설지(薛支)가 천도(遷都)를 간(諫)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농사짓기에 적합하고 또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의 생산이 충분하니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무궁하며 또 전쟁의 환난을 면하기에 가합니다.'즉 물고기의 획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국내성 지역의 通溝墓군 禹山下墓區 3283호 積石墓에서는 일련의 물고기잡이 道具, 흙그물추 등이 출토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출토된 것으로 철낚시고리(鐵漁釣) 등이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인들은 압록강에서 활발한 어로활동을 벌였으며, 생산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국내성은 수상운수(水上運輸)가 발전하는데에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상업과 교역활동이 활발하였고, 일찍부터 금속화폐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북방 요서 화북 강남지방 등 여러 지역들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국내성에서는 한대(漢代)의 오수전(五銖錢)과 반냥전(半兩錢), 동기(銅器), 남조(南朝)의 청자(靑瓷), 신강(=新疆 화전옥(和田玉) 귀걸이와 강남(江南)의 칠기(漆器) 등이 발견됐다. 이 지역이 초기부터 후기까지 내내 중원지구(中原地區) 및 북방, 남방과 교섭이 밀접했음을 알려준다.특히 백두산에서 서남방향으로 흐르다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압록강은 중류지역에서 명도전이 다량으로 발견되므로써상업교역의 중요한 통로였음을 알려준다.
 
미천왕(美川王)이 도피하던 시절에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소금장사를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압록강을 이용해서 소금운송과 판매를 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기록은 소금이 황해북부 해안, 즉 압록강 유역이나 요동반도 해안지대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수도는 文化의 집결지(集結地)와 개화지(開化地)의 기능을 해야 한다. 특히 고대에는 문화의 담당자들이 수도에 집중되어 있어 지방에 대해서는 문화의 보급지(普及地)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외국에서 문화를 수입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수도의 위치는 외국과 직접 교통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 수도 이외의 다른 도시에서 교통의 이점을 활용한 문화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수도와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몇 가지 수도의 조건과 고구려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수도조건은 역시 교통의 발달 즉 외부세계와 원활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국내성이 자리 잡은 집안지역은 교통이 편리하였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이어주는 이점이 있고, 외계(外界)와 연결하는 통로는 압록강 수로를 포함하여 크게 3갈래가 있다. 따라서 초기에는 비교적 중앙도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2) 군사적 측면 
 
고대에 수도는 국방상(國防上)의 요충지, 즉 국방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형(地形)이어야 한다. 국가가 전시체제(戰時體制)나 군사동원체제(軍事動員體制)를 유지할 경우, 그리고 국가간의 경쟁이 군사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무엇보다도 군사도시(軍事都市)로서의 성격이 강해진다. 
 
고구려는 주변소국을 정복하면서 성장한 정복국가적(征服國家的)인 성격을 지니고 출발했고, 지정학적인 위치상 항상 외국과 군사적인 갈등을 벌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국가간의 경쟁이 군사력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전시체제적인 성격을 지녔으므로 자연이 군사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도시나 군사적 거점이 국방상의 요충지에 있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특히 수도는 王城을 비롯하여 정부의 각 기관과 시설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적국에 노출되어 방어에 취약점을 지녀서는 곤란하다. 
 
국내성은 초기 단계에서 군사도시로서의 성격에는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만주지역에 힘의 중심을 두기에 적합한 팽창거점도시(膨脹據點都市)이며 주변의 소국가들을 병합하는 초기 성장과정에서 정복국가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조건이 좋다. 유리왕 21년에 국내를 보고 온 이후에 수도를 옮기는 이유를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에 오곡을 심기에 좋고---' 하여 방어조건이 1차적임을 알려준다. 국내성은 소집단의 공격에 대해서는 방어가 용이하고, 반대로 공격하고자 할 때는 주변의 강을 이용해서 효율적으로 군사행동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활동반경이 넓어지고 대상적국도 군사력과 기동력을 갖춘 집단일 경우, 방어전을 펴기에는 지형적으로나 준비기간으로 보아 조건이 불리하다. 
 
국내성은 초기부터 북방의 침입이 있을 때 마다 수도가 항상 위험스러웠으므로 군사수비성(軍事守備城)으로서 환도성(丸都城)을 두었다. 대무신왕대(大武神王代)에 한(漢)의 요동 군대(遼東 軍隊)와 격전을 벌였는데, 이 산성에서 장기농성전을 벌여 방어에 성공하였다. 그 후에 군사적인 환경이 변하면서 군사방어체제를 보다 강력하게 구축하였다. 국내성의 방어성이며 임시 수도역할을 하였던 환도성은 관구검의 침입 때 드러났듯이 초기의 소국가 병합단계를 벗어나 위(魏), 북방세력(北方勢力)과의 싸움으로 변화된 단계에서는 방어조건이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구축된 고구려의 군사방어체제에 대해서는 그 목적 분포양상 편제 숫자 등에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 압록강 이북에 대하여 북한에서는 요하 일대에 구축된 전연방어체계(前沿防禦體系:기본방어성)을 축으로 하고, 신성에서 국내성에 이르는 통로에 구축한 종심방어체계(태자하:太子河 상류와 소자하:蘇子河 일대) 수도방어를 위한 국내성 위성체계의 3중 구조로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위존성(魏存成)은 크게 3지역으로 나누어 압록강 중류·혼하·혼강일대의 초·중기 산성과 요동반도 남단에서 북방으로 요하를 따라 이룩된 후기 방어성 일대, 그리고 길림성(吉林省)의 연길(延吉)·장춘(琿春) 일대의 북방경계지역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들은 해양 및 강변방어체제 주목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거기에 반해 손영종은 관구검과 전투를 벌인 후에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호할 목적으로 압록강의 좌 우안에 성 등 방어진지가 구축되었다.고 하여 강변방어체제에 대한 인식이 있음을 보이고 있다. 서길수 역시 주로 강을 중심으로 성이 분포돼 있는 상황을 주목하고 분포상황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광개토태왕 때 쌓은 국남 7성, 황해도와 경기만 일대의 해양방어체제, 기타 요동반도와 압록강 하구 및 섬방어체제, 한강 하구방어체제 등 강과 바다를 중심으로 많은 전략적 지구에 다양한 형태의 군사시설물들이 본격적으로 구축되었음을 주목하였다.
 
고구려는 1차적으로 자연지형을 활용하고, 2차적으로는 산성·차단성 및 초소 등을 배치하였다. 적군의 침입로를 예상하면서 요소요소에 배치한 것이다. 군사적인 환경이 변하면서 수도권 방어체제는 더욱 강력하게 구축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군사도로 혹은 방어체제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및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고국원왕(故國原王) 12년인 342년에 전연의 모용황이 침입할 당시 적의 진입로는 남도 북도가 있는데, 북도는 평탄하고 넓으며 남도는 험하고 좁다.('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고 한다. 이 남도·북도를 국내성을 둘러싼 방어체제의 일환으로 여기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모용황이 침입할 때 사용된 것으로 기록된 이 남도북도는 수도권에 있었던 것은 아닐 것으로 판단한다. 간단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즉 첫째, 방향과 위치묘사가 틀리다. 기록과 달리 소위 남도·북도는 지리적으로 판단하면 모두 집안의 북쪽에 있고, 단지 남향해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길이다. 또한 국내성에서 보아서도 위치묘사는 맞지가 않는다. 남문이 아니라 서문을 통과해서 나가면 마선구(麻線溝)로 해서 소위 남도로 이어지고, 북문이 아니라 동문을 통과해서 나가면 북도로 이어진다. 둘째, 현재 남도·북도는 대규모의 병력이 충돌해서 접전을 할만한 공간으로선 적합하지 않다. 당시 고구려군과 연군대의 전투상황을 고려할 때 대병력이 조우하여 공방전을 벌일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알려진 망파령 관애와 관마장 관애가 있는 소위 남도 북도는 수도권 방어체제이다. 필자는 수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하여 그 군도들은 하나씩이 아닌 복수였을 가능성을 재삼 확인하였다. 이 수도권 방어체제는 이 궁성과 수도를 중심으로 노령산맥과 혼강·압록강 등 자연지세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단선적이 아니라 산성 관애 초소 등을 네트워크화한 축차방어(築次防禦)체제였다. 따라서 곳곳에서 새로운 산성  초소 등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혼강의 자안산성·오녀산성, 신개하의 패왕조산성 등 수도권 주변에는 많은 강변방어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러한 방어체제에도 불구하고 국내성은 동천왕 때와 342년인 고국원왕(故國原王) 년 간에 전연(前燕)의 침입을 받고 함락되고 말았다. 
 
고구려 역사를 살펴보면 강을 배경으로 전투가 수없이 벌어졌으며, 그 규모와 의미도 크다. 魏나라와 벌어진 전투에서 양 군은 비류수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폈다. 북방종족들의 남하를 저지할 목적으로 송화강가에는 용담산성·동단산성 등이 구축되었다. 수, 당과의 전쟁에서 요하(遼河)를 사이에 둔 공방전(攻防戰)은 대단한 격전이었다. 신성, 요동성, 백암성, 안시성, 오고성, 석성(장하:莊河) 등은 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성들이다. 이처럼 큰 강은 고구려가 역사를 발전시켜 가는데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압록강에 구축한 강변방어체제는 다른 육지 내부에 구축한 강변방어체제와는 성격과 기능이 다르다. 

3. 압록강의 군사전략적 환경   

고구려는 영토가 사방으로 확대되고, 주변의 국제정세가 변하면서 군사전(軍事戰)의 질도 달라졌다. 특히 대외적으로 진출할 능력과 기회가 많아지고, 해양을 활용하는 해상전을 대비한 방어체제의 구축이 필요해지고, 해양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압록강의 존재와 그 역할은 점증하였다. 압록강은 수도권을 방어하는 전체의 체제 속에 속한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질적으로 다른 독자적인 수도권방어체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압록강 방어체제를 더욱 복잡하고 치밀하게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압록강의 군사전략적인 환경을 통해서 압록강이 방어체제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강이 가진 군사적인 측면은 공격과 방어라는 직접적인 충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군수물자(軍需物資)의 운송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강은 실질적인 생산장소에서 사용장소로 이동하는 가장 안전하고 빠른 지름길이 된다.  압록강은 백두산에 출발하여 내려오면서 크고 작은 강들과 만나 황해로 접어든다. 중류에서는 혼강, 독로강과 만나 수심이 깊고 수로가 길다. 또한 강 하류에는 많은 하상도서(河上島嶼)가 있고 끝나는 곳에는 만(灣)이 발달되어 황해로 접어든다. 따라서 통항거리가 길고(750km) 큰 규모의 선박이 항행(航行)할 수 있고 많은 선박들이 동시에 운행할 수가 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압록강은 고구려의 수도와 직접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물류통로였다. 필수적으로 강을 보호하는 군사시설을 구축해야 한다. 
 
또한 고구려는 점차 국제질서의 중심부로 진입하면서 대외관계가 원활해졌다. 주변국가들, 특히 중국지역의 정치세력들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런데 압록강은 국내성의 남벽과 붙어서 흐를 만큼 수도의 교통과 밀접해서 강상수운이 발달했다. 그러므로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로 나가 항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다. 국내성은 남쪽벽이 압록강과 거의 만나는 지점에 있다. 그런데 그곳에는 돌로 쌓은 부두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30M정도인데 국내성 성벽과 그 수법에서 공통적이라고 한다. 
 
국내성은 수도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내륙하항(內陸河港)의 역할도 한 것이다. 물론 압록강 하구에는 국내성의 내항(內港)과 이어지는 일종의 외항(外港)이 있었을 것이다. 외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은 서안평(西安平)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1920년대에 압록강 하류의 북부인 단둥(丹東)시에서도 부두석축시설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렇게 압록강은 내륙수운 뿐 아니라 바다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한편 압록강은 고구려가 외국으로 진출하고 군사작전을 펼 때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압록강의 종착점인 하구는 서한만(西韓灣)을 통해 해양으로 진출하는 출구이며 동시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입구이다. 그런데 서한만은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에서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경유하여 산둥(山東)까지 이어지는 남북연근해항로(南北沿近海航路)의 중간기점이고, 산동 및 화북에서 발해만을 지나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오는 항로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이다. 만약 압록강 하류를 장악하면 서한만을 장악하고, 서한만을 장악하면 황해북부의 해상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서한만과 압록강으로 모여드는 크고 작은 강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광범위하게 퍼진 하계망(河系網)을 이용하여 내륙의 상당한 지역을 장악할 수 있다. 즉 정치적으로 내륙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고, 경제적으로 물류체계를 원활하게 하여 경제권을 형성한다. 따라서 압록강 하류와 서한만은 지정학적(地政學的)·지경학적(地經學的)·지문화적(地文化的) 입장에서 보아 필연적으로 각 국간의 질서와 힘이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반면에 압록강은 해양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방어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해졌다. 고구려는 서북방면으로 팽창하기 위한 전진기지를 구축하고, 요동연안 혹은 근해항로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육로연결과 해로연결도 차단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압록강 하구유역을 확실하게 장악해야 했다. 한편 중국측 역시 낙랑(樂浪) 등 한군현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고구려의 황해연안 진출은 현실적으로 해로 혹은 하구 연안지대를 이용하는 양 지역간의 교통에 상당한 위협을 주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중국과의 긴장관계를 염두에 둘 경우에 육상전 뿐 만 아니라 해상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압록강 하구는 중국지역에서 한반도로 오기에 가장 적합한 노철산항로(老鐵山航路)의 종착점(終着點)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연안항해(沿岸航海)를 하여 압록강 유역으로 공격해 올 경우, 국내성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 해상이동거리가 짧고, 일단 상륙한 다음에는 수도로의 거리가 짧고, 수륙협공작전이 용이하다. 만약 압록강 이남의 해안지대 등으로 상륙을 허용할 경우에는 배후에서 협공당할 우려가 다분히 있다. 이미 후한 광무제(後漢 光武帝)의 낙랑정벌과 위명제(魏明帝)의 낙랑 대방 정벌은 해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압록강과 서한만의 이러한 군사전략적 가치를 초기 단계부터 인식했던 것 같다. 태조대왕(太祖大王) 94년(146)에 서안평을 공격했다. 후에 동천왕(東川王) 16년(242)에 다시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동천왕 때는 손권의 오나라와 몇 번에 걸쳐 사신을 교환하였으며, 일종의 교역도 하였다. 오서(吳書)는 사신들이 도착한 항구를 압록강 하구에 있는 안평구(安平口)라고 기록하였다. 한서(漢書)에는 서안평(西安平)을 설명하면서 안평구와 서안평이 동일한 지명임을 말하고 있다. 한서지리지(漢書 地理志) 하(下)에서는 "西安平 莽曰北安平(… 吳志所謂安平口也. 新唐志 安東府 南至鴨綠江 北泊灼城七百里 故西安平也.… )"라고 하여 서안평이 역시 압록강 하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후한서(後漢書)에는 오(吳)의 사신(使臣)이 도착한 안평구(安平口)는 북현해구(北縣海口)라고 되어 있다. 모든 기록들은 서안평이 양국간에 활용된 항구였음을 알려준다. 그들은 이 외항에 도착한 다음에 육로 혹은 다시 압록강 수로를 거슬러 올라와 국내성에 닿았을 것이다. 
 
고구려는 마침내 미천왕(美川王) 12년(311)에 서안평을 점령한 후, 완전히 서해안에 진출한다.   그 후 압록강은 고구려의 적극적인 해양활동과 관련하여서 국가정책 및 군사전략 방어체제 등의 비중이 더욱 더 높아졌다. 고구려는 330년, 연(燕)에 대한 견제책으로 후조(後趙)에 사신을 보내고 다시 같은 해에 사신과 함께 호시(矢)를 보내어 양국이 군수물자를 교환한다. 그런데 중간의 연(燕)을 피해 해로를 이용해 신속하고 안전하게 산동지방으로 잠입한 것이다. 336년 3월에는 고구려가 해로를 이용하여 동진(東晉)에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에 해양을 이용하여 각국들이 사신왕래를 빈번하게 했음을 알려준다. 해양은 적대국가의 국경을 통과하지 않고도 교섭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때는 산동지역에 있었던 남연(南燕)과 해로로 교섭을 했다. 능비문 영락 6년 병신조(陵碑文 永樂 6年 丙申條)는 대왕이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한 기사가 나온다. 이때 압록강 하구지역은 어떠한 형태로든 이 수군작전과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진출과 개척과정에서 고구려는 압록강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와 교통로의 길목을 중심으로 치밀하고 견고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을 것이다.
 
그 후 해양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수·당과의 전쟁에서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방어체제로서 격렬한 공방전을 펼쳤다. 648년 당군은 산동북부의 래주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넌 다음에 압록강 하구에 닿았다. 이때 압록수에 들어와 100여리를 지나 박작성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탐(賈眈)의 도리기에는 발해와 당간의 교섭로인 소위 압록도가 바다를 건너 압록강하구인 박작구(泊灼口)에 이르고 여기서 배를 타고 집안인 환도현성을 경유하여 위쪽 200리에 있는 신주인 임강(臨江)에 닿았다고 하였다. 압록강 수로를 이용한 것이다.
 
이처럼 압록강은 수도방어라는 측면, 전술적인 측면, 또 국가정책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가 있었다. 국토의 보존이라는 원론적인 기능 이외에 외교통로 및 교역로를 보호하며 적 수군의 침입을 방어하고 수군활동을 양성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졌다. 특히 서한만과 이어지는 하류의 방어체제는 요동반도의 해양방어체제와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따라서 그 위치와 규모·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당시의 전황은 물론 전쟁의 기본성격과 변화하는 국제질서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4 압록강변 방어체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압록강 변에 구축한 군사시설은 방어(防禦)와 진출(進出)이라는 이중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의 기능과 위치 등 등은 이러한 이중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구축되었음을 전제로 이해해야 한다.   

1) 압록강 중류지역
 
중류지역은 수도권 방어체제의 일부로 활용되었다. 압록강은 중류에서 통구하(通溝河) 부이강(富爾江)·신개하(新開河)·위사하(葦沙河), 그리고 남쪽의 독로강(禿魯江) 등과 만나면서 하류로 내려간다. 수로를 관측하고 물길을 장악하는 길목에는 반드시 방어체제가 있어야 한다. 압록강구는 폭이 좁아 적이 수로를 통해서 국내성까지 침입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강폭이 넓을 때는 강안에서 방어하기가 힘들지만 폭이 좁을 때는 충분히 강 양변에서 공격할 수 있다. 더군다나 강변에는 여러 가지 방어시설을 설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진성(津城), 강안보루(串城) 등 다양한 방어시설을 구축해 놓았을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방어시설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파주군(坡州郡)의 오두산성(烏頭山城), 연천군의 호로고루·당포성, 한강의 아차산보루 등 이 있으며, 황해와 예성강,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인 하음면의 하음산성(河陰山城:봉천/奉天), 그 건너편 황해도의 백마산성(白馬山城) 등은 비교적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한 강변방어체제이다. 그리고 강화도의 교동도(喬桐島) 등과 영산강·금강하구·섬진강 하구 등에도 있었다. 이 강변방어체제는 내륙에 포진한 군사체계와 유기적인 관계에 있어야 하며, 특히 하구가 아닌 중류지역에 있는 방어체제들은 내륙으로 진입하는 육상 교통로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국내성으로 들어오는 압록강의 좌우에는 방어시설들이 구축되어 있다. 집안 서남쪽의 해관, 외차구 차단성(遮斷城) 외에도 청수, 고제령 유곡령 계선에도 서남쪽을 막기 위한 토성들이 지나가고 있다. 

① 망파령 관애(望波嶺 關隘)
 
망파령 관애는 국내성의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전략적 요충지 가운데 하나이다. 신개하(新開河)를 사이에 두고 용두령(龍頭嶺)과 만난다. 낮고 움푹한 지형에 돌로 쭉 쌓아 적의 기병 등을 막게 한 일종의 차단산성이다. 총 길이가 260m에, 아래의 폭은 10m, 현재 남아있는 높이는 1,5m 내지 2m이다. 문도 있었는데 큰 돌로 쌓았으며 폭이 10m였으며 방향은 350도였다. 북쪽끝은 신개하와 이어졌는데, 돌로 쌓은 둑이 있었다. 남아있는 길이가 13m, 높이는 0,5~ 0,8m이다. 철화살촉과 화강암으로 다듬은 입구지름이 20cm, 깊이가 20cm의 돌절구도 발견됐다. 관애는 이 물속에 잠겨 있다. 1976년 댐이 생기기 전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능선자락과 신개하가 만나는 사이의 골짜기에 바로 관애가 있었다. 압록강 방어체제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근처의 패왕조(覇王朝) 산성과 함께 국내성 방어체제의 한 축으로서 상호보완의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패왕조산은 노령산맥의 본줄기에 있는데 해발 862,8미터이다. 산세가 험준하고 계곡이 깊다. 험준한 산봉우리들을 둘러가며 돌을 쌓아 산성을 만들었다. 집안에서 서북방향으로 97킬로 떨어져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 집안현에서 속해 있다. 환인 못미처 대천(大川)에서 산을 가로질러 이 강을 건너면 패왕조촌이다. 또 부이강(富爾江)과 혼강(渾江)이 만나는 곳에서 강을 건너 북둔자(北屯子)를 거쳐 패왕으로 올 수가 있다. 그래서 이곳을 통과하면 환도산성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화전자(花甸子)에서 청하(淸河)로 갈 때도 역시 이 권을 지나쳐야한다. 그러니 이곳은 전략적으로 요충지일수 밖에 없다. 환인의 오녀산성은 이곳에서 30킬로 서남쪽에 있다. 

② 칠개정자 관애(七個頂子 關隘)
 
집안시 서남쪽 65km인 량수향(凉水鄕) 외분구하(外岔溝河) 서쪽에 있다. 칠개정자산은 노령산맥의 줄기로서 길이가 15km되는 계곡이 있는데,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진다. 동벽과 서벽이 있으며,  참호의 작용을 하였을 부벽이 동벽 남쪽으로 있다. 이 관애의 건축방법은 통화(通化)를 출발해 두도(頭道) 청하(淸河)를 거쳐 집안으로 진입하는 길을 방어하는 관마장(關馬墻) 관애의 그것과 유사하다. 강의 수로를 막는 기능도 하였다. 
 
이 관애는 2가지 이상의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환인에서 이붕전자를 통과해  牌嶺(패령)을 넘어 대로(大路)를 통과해 량수(凉水) 유림(楡林) 대평(大平)을 거쳐 집안으로 들어간다. 이 길은 비교적 돌아가지만 비교적 평탄해서 많은 군마를 이동시킬 수 있다. 때문에 고구려는 이 지역에 노변장관애(老邊墻 關隘),칠개정자관애(七個頂子關隘)(기간정자관애:旗杆頂子關隘) 등을 설치하여 진로를 차단하고 있다. 또한 압록강에서 산쪽과 대로 쪽으로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거나 수로를 이용하려는 적을 초계하고 방어하는 기능도 겸했을 것이다. 지형상으로 보아 외차구에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시설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③ 노변장 관애(老邊墻 關隘)
 
집안현 량수향 해관촌 북쪽 1km 못미치는 통천령(通天嶺)의 동쪽 산기슭에 있다. 남쪽으로 압록강 강변과 4km가 채 안된다. 량수향에 남북으로 통과하는 길을 가로질러 동서방향으로 뻗은 석벽이다. 현재는 낮은 석벽만이 남아 있다. 지형상으로 보아 13km 떨어진 칠개정자관애(七個頂子關隘)와 마찬가지로 집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차단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역시 압록강 방어체제의 일환으로 강에서 접근하는 적을 막거나 강을 초계하는 기능도 겸했을 것이다.

압록강 중류지역에는 발견되고 보고된 것 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산성들과 관애 초소 등 다양한 군사시설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설물들은 수도권방어체제이며 직접 간접으로 압록강 방어체제와 연관을 맺고 있었을 것이다.

2 ) 압록강 하류지역 
 
신석기 유적인 단동시 동구현 마가정향 삼가자촌후와(東溝縣 馬家店鄕 三家子村 后洼) 유지 아래층( 6000년 이상 된 곳.)에서 배모양의 도기(주형도기:舟形陶器) 3개 발견되었다. 단동 지역의 고구려 박작성 내부에서는 우물 안에서 배유물이 발견됐다. 일찍부터 해양문화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하류에는 단동지역과 의주지역이 마주보고 있으면서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곳에는 군사적이면서도 경제적인 성격을 지닌 도시가 발달했을 것이다. 
 
해안도시(海岸都市)는 반드시 해안가에 위치해 있으며, 대부분 강과 연결이 된다. 따라서 강의 수로를 통한 내륙지방과의 연결이 원활하므로 내륙지방에서 생산한 물품을 쉽게 운반하여 바다를 통한 교역에 활용할 수가 있다. 반면에 바다를 통해서 들어온 물품들은 강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내륙지방으로 효과적인 공급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급지와 수요지, 그리고 집결지를 연결시켜 주기에 적합한 곳이 해안도시이다. 특히 외국과 교역을 할 경우에는 바다를 통한 팽창과 무역상의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다. 압록강 하류지역에서는 서안평이 이 해안도시일 가능성이 크다.  

①  서안평성(西安平城)
 
현지에서는 애하첨고성(璦河尖古城)으로 불리운다. 압록강구이고 서한만(西韓灣)의 입구이므로 황해북부의 연안항로를 이용하여 남북을 오고가거나 요동반도로 가려는 선박은 물론이고, 강을 통해서 고구려의 내부로 들어가려는 선박들은 모두 이곳을 거쳐야 한다. 서안평성은 수군의 공격을 사전에 방어하고, 해안선을 따라서 가는 적들을 공격하는 고구려군의 방어체제를 총괄하는 전략사령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개활지에 있으므로 전력을 집중시켜 방어하는 기능에는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바로 가까이 위치한 박작성과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공동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옥수수밭으로 변해버리고, 유지는 모두 땅속에 묻혀 있다고 한다.
 
평면이 네모꼴이며 북쪽 담은 길이 400m, 동쪽은 500m,남쪽 담은 60m가 남아있다. 서쪽은 애하(璦河)에 의해 훼손되었다. 성 내부에서 '안평락미앙(安平樂未央)'이란 와당이 발견되었다. 또한 안평성(安平城)이란 문양이 새겨진 도기의 입부분이 발견되엇다. 이 성은 퇴적이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층은 한의 시대, 윗층은 고구려시대의 것이다. 특히 홍색연화문 와당과 홍색(紅色 승문(繩文:빗살무늬), 사방격문판와(斜方格文板瓦) 등이 출토되었다.

② 구련성(九連城) 
 
단동에서 차를타고 북동 방향으로 15분정도 가면 '구련성교(九連城橋)'라는 다리가 나타난다. 조선 시대 지도를 보면 구련성은 애하(璦河)의 서쪽에 있는데 이 곳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까 단동서 올 때는 왼쪽 방향의 언덕으로 있다. 이 언덕들이 토성의 흔적이다. 언덕고개에서는 들판이 나타나고, 그 건너편에 물줄기가 보이면서, 뒤로는 산이 연결된다. 그런데 고개를 가운데 두고 군데군데 언덕들이 있다.
 
구련성은 9개의 성이 이어져서 강을 바라보면서 하나의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안에 있는 마을이 큰 구련성 방어체제의 안이다. 남동에서 북서방향으로 있는데, 이 성에서 남동 방향으로 애하(璦河)가 보인다. 현지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예전에는 근처에 돌로 쌓은 고분군이 있었다고 한다. 서안평성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고구려 시기에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대에까지 구련성은 중요했고, 그래서 조선시대 지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호산장성이 박작성이란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구련성을 박작성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았다.

③ 박작성(泊灼城)
 
박작성은 사료에 자주 나타나고, 특히 압록강구의 교통을 말할 때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성이다. 寬甸縣 虎山鎭 虎山村에 있다. 단동에서 관전(寬佃)으로 가는 길은 압록강변에서는 일반적으로 험한 편에 속한다. 주위에 산과 산이 겹쳐지고 있는데, 물론 높은 규모의 산은 아니고 동네 야산 정도의 크기이다. 현재는 明나라의 장성인 塔虎山城이 있다.
박작성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이다. 그 후 발해 시대에 발해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하는 장소로서 泊灼口가 나타난다. 648년에 당군이 침입할 때 수군 3만을 거느리고 萊州를 출발하여 발해를 빠져 나온 후에 황해북부를 횡단하여 압록강하구에 도달하였다. 이때 기록은 압록수에 들어와 100여리를 지나 박작성에 이르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박작성 남쪽 40리 되는 지점에다 軍營을 설치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압록강하구에서 100여리 내부로 들어간 지점을 찾아야 한다. 고구려의 성주 所夫孫은 기병을 거느리고 저항을 하다가 무너졌다. 이때 '박작성은 산을 의지하여 요새를 구축하였고, 鴨 水가 가로막아 견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박작성이 九連城이라는 주장들도 있고,또 蒲石河口에 있다는 설도 있으며, 漢西安平縣舊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1990년부터 발굴을 시작하여 석벽 500m를 발견하였는데,  커다란 돌로 쌓은 우물이 발견되었는데, 입구의 직경이 4,4m, 우물 바닥은 지면으로부터 23여m이다. 우물 깊이는 13m이다. 내부에서 길이 3,7m의 목선과 함께 몇 개의 나무노가 출토되었다. 고구려 시대의 유일한 목선이 발견되었다.   

④ 대행성(大行城)
 
단동에서 남쪽으로 20여km 내려와 浪頭鎭마을이 있다. 압록강 방어체제의 일환으로서 서안평 지역의 전진방어거점이다. 이세적은 668년의 薛賀水 전투에서 이긴 후에 대행성으로 진격하였다. 이긴 후에 모든 군대가 압록책에 이르러 고구려군과 큰 싸움이 벌어졌으나 당군은 이를 격파하고 2백리를 진격하여 辱夷城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667년 전투에서 원만경이 연남건에게 압록의 험한 곳을 지키라고 하자. 고구려군은 압록으로 병사를 옮겨 방어하므로 당병은 건널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압록강에 강한 방어체제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中國 歷史地圖集 東北地區資料匯編}에서는 대행성은 단동의 서북방향으로 32리에 있는 娘娘廟山城으로 말하고 있다. 필자가 1995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는 '小娘娘城'이란 붉은 펭키 글씨가 새겨진 자그마한 돌비가 서있다. 성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고, 밭 건너편에 도로의 진행방향과 횡으로 300m 정도의 작은 언덕이 이어진다. 풀숲과 작은 나무들이 엉켜 빗속에 더 푸르게 보인다. 옛날 토성의 흔적이다. 그 토성 바로 너머가 압록강이다. 주변이 평평한 들판이고 강이 바로 옆에 있으니 지형상으로 보아 산성일 가능성은 없고, 그래서 평지성이다. 지형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혹시 해안장성일 가능성도 크다.

필자는 북한 쪽의 압록강 변에도 크고 작은 성과 초소 등이 많이 축조되었다고 확신한다. 다만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대성의 일부분이므로 소개하고자 한다.

① 백마산성(白馬山城)
 
백마산성은 평안북도 의주군과 피현군의 경계에 솟은 백마산(410)의 자연지세에 의거하여 쌓은 석성이다. 이 산성은 鴨綠江을 건너 남쪽으로 들어오는 첫 요새지이므로 고려·조선시대까지 여러 번 보수· 확충하여 사용해 왔다. 고려 때에 강감찬 장군이 쌓은 내성 서쪽에 있던 원래의 성(古城 또는 牛馬城이라고도 함)이 고구려 때 쌓은 원성이다. 이 성은 1965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진행한 조사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산성은 백마산의 높은 봉우리에서 뻗어 내린 능선 사이에 형성된 2개의 골짜기 중에서 서남쪽 골짜기를 에워싸고 쌓은 고로봉식 산성이다. 성내에서 고구려 계의 붉은 색 그물무늬 기와조각들이 발견됐다. 이런 유물과 성벽축조기법 및 성돌모양에 근거하여 이 성을 고구려 때에 쌓은 것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②  계망성(契亡城)
 
걸망성은 백마산성 동남 15리 지점에 있는 평안북도 피현군 당후리의 쏙새산에 위치해 있다. 쏙새산은 白馬山(410)의 한 줄기가 남으로 뻗어 형성된 독립된 산인데, 성은 산의 남쪽 골짜기를 안에 넣고 주변의 봉우리들을 연결시킨 고로봉식 산성이다. 동, 남, 서쪽의 세 면은 삼교천이 자연해자를 이루어 감돌고, 북쪽은 산으로 겹겹히 막히었으며, 남쪽의 낮은 곳은 삼교천 평지와 잇닿아 있다.
 
걸망성에는 7개의 성문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치를 보면 동서남북에 각각 큰문 하나씩 있고 동, 서, 남쪽에 각각 작은 문 하나씩 더 설치되어 있다. 성내에서는 병영 터, 창고 터로 인정되는 집터들이 발견되었으며, 고구려 계의 붉은 색 기와조각과 함께 고려시기의 기와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한다. 걸망성은 고려시기에 와서도 계속 이용되었다. '契亡城'이란 이름도 거란군이 망한 성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후대에도 압록강 하구 방어체제의 역할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산성 외에도 하구를 둘러싼 지역에는 고구려의 강변방어체제들이 구축되었을 것이다. 
玉江(朔州郡)이나 가원령(義州郡) 산줄기에도 성유적들이 있는데, 이는 그 對岸인 대포석하 동쪽의 성유적들과 관련을 맺으면서 압록강 방어시설을 이룬다. 이러한 방어시설들의 적지않은 부분은 4세기 중엽까지 이미 축조되었으며 당시 서북방에 있었던 세력들의 해안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5 결론 
 
한 국가에서 수도의 선정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특히 대외모순이 심각하여 늘 외부세력과 긴장상태에 있는 고구려같은 나라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대외진출 발전방향 안보 경제상의 이점 등을 고려할 때 국내성은 대체로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이었다. 여기에는 압록강이란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 압록강은 본문에서 충분하게 언급했지만 내륙의 강이 아니라 서해와 가깝게 연결되므로서 수륙교통과 해륙교통이 모두 편리한 강이다. 또한 하구인 서한만은 육로를 통해서도 중국지역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을 연결할 수 있으며, 모든 항로의 중간 경유지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통 외교 경제적인 면에서  매우 효용성이 높다. 또한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수군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선단기지 역할도하고, 국내성 지역을 방어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해양전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수로공격이 이루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중요한 전략적 거점과 전술적인 요충지에 군사시설물을 설치하여 견고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방어체제는 특히 후대에 고수 고당 전쟁에서 그 효용성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본고를 작성하면서 압록강의 군사시설물은 물론이고, 수도권 방어체제의 실상, 그리고 고구려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해양 및 강이 역사에서 한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미약한 탓에 학계의 연구가 부족하고, 또 해당지역인 북한 중국지역에서의 연구 또한 불충분했다. 특히 고고학적인 성과물이 부족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다음으로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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