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hinain.co.kr/inobbs/bbs_read3.php?code=ibd03_ch_04_02&nbd=ibd03_ch_04_02&dbcal=no&uid=11

주몽은 알고 있다 - 고구려의 첫 도읍 환인과 오녀산성


비류수(沸流水)가 흐른다. 지금은 혼강(渾河)이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환인 분지를 끼고 돈다.

오늘의 환인은 그저 작은 시골일 뿐이다. 고층 건물도 없고, 호사스런 쇼핑가도 없고, 이렇다 할 놀이 시설도 없다.

혼강으로 이어지는 중심가의 서쪽 끝에 넓은 광장이 있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흥겨운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을 한다. 한 켠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고, 강 위에 배가 있고, 강 건너 절벽에서 떨어지는 인공 폭포가 있다.


환인시 서쪽 끝, 혼강변의 광장에서 해질녘을 즐기는 시민들

복잡하지 않다. 한적하다.

먼 옛날, 동에서 서로 흐르는 비류수의 건너편, 환인 시가지의 북쪽에는 상고성자(上古城子)와 하고성자(下古城子)가 있었다. 주몽을 따르는 옛 사람들은 이곳 상고성자에는 고분군, 하고성자에는 성을 쌓았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골목 안까지 샅샅이 찾아 헤매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어쩌다 마주 친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한결같이 “모른다”고 말한다.

하고성자 마을 앞에 1991년 9월 본계(本溪)시 인민정부가 ‘성급문물보호단위 하고성자성지’라고 써놓은 표지석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하고성자성지 표지석

2000여 년전, 환인 땅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주몽이 첫 도읍지를 정하면서 평지성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고자성은 흔적도 없지만 저 멀리 다리 건너 오녀산 위에 쌓았다는 산성은 그래도 흔적이 남아 있겠지.

오녀산성은 환인시에서 동북쪽으로 8.5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 이름은 주몽이다. 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유화는 ‘물의 신’ 하백의 딸이었다. 어느 날 ‘천제의 아들’ 해모수를 만나 웅신산 아래 압록강 가에서 정을 통한다. 그러나 해모수는 홀쩍 떠났고, 결국 유화는 부모님의 꾸지람을 듣고 귀양 길에 오른다.

유화는 귀양지에서 동부여의 왕 금와를 만났고, 금와왕은 유화를 보살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으슥한 방으로 들어온 햇빛이 유화만을 따라 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화는 잉태를 했고, 얼마 후 알을 낳았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금와왕은 알을 밖에 내다버렸지만 개나 돼지는 먹으려 하지 않았고, 말과 소는 밟지 않고 피해갔다. 오히려 새와 숲 짐승들은 알을 덮어 주었다. 하는 수 없이 왕은 알을 되가져와 유화에게 돌려 주었다. 그 알에서 껍질을 깨고 태어난 것이 바로 주몽이었다. 어린 아이는 영리하고, 튼튼했다. 특히 활과 화살을 만들고, 쏘는데 능했다. 백발백중이었다. 당시 동부여에선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 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주몽’이라 지었다.

재주가 뛰어나면 시기와 질투의 표적이 되는 법. 특히 금와왕의 일곱 아들 중 대소 태자가 주몽을 싫어했다. 아버지에게 간청해 주몽을 말먹이꾼으로 몰아냈지만 주몽은 영특했다. 일부러 좋은 말은 먹이를 조금 주어 여위게 했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자신의 미래를 예견하고 훗날을 도모한 것이다. 마침내 동부여 왕자와 신하들은 주몽의 살해을 음모하자, 그 낌새를 알아챈 어머니 유화는 아들 주몽이 화를 면할 수 있도록 조언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오이, 마리, 협부 등 충신과 함께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은 보화산을 거쳐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 제사, 묵골 등을 만나 졸본( 환인)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엄리대수에 이르러서는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자 ‘물의 신’ 하백의 손자이니 어찌할 방법이 없겠냐”고 호소했고, 갑자기 물 위로 물고기와 자라 떼가 올라와 순식간에 다리를 만들어 도강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졸본에 이르러서는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가에 집을 짓고, 그 곳에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씨로 정했다. 또 ‘위지 동이전’에는 ‘주몽이 이들과 같이 홀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거기에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고 쓰여 있다. 모두 기원전 37년의 일을 아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녀산성에 본 환인 분지를 휘감아 돌아가는 혼강

과연 보화산, 엄리대수, 비류수, 홀승골성은 하나같이 어디란 말인가.

고구려 역사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역사서에 언급된 아주 짧은 이야기들과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연대와 특징 등을 조사해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녀산성 안내서에는 ‘기원전 37년 북부여의 왕자 주몽이 산 위에 성을 쌓고, 고구려 정권을 건립했다. 이 성은 홀골승성이라 한다.(据史书记载,公元前 37年,北扶余王子朱蒙建立高句丽政权,在山上构筑了第一座都城,史称 '纥升骨城'。) 서기 3년 고구려의 2대왕 유리명왕이 국내성(길림성 집안)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 정권은 오녀산에서 40년 동안 존속했다(公元 3年,高句丽第二代王琉璃明王迁都国内,高句丽政权在五女山存续了40个春秋。) ’고 소개하고 있다.

하필이면 해발 821m나 되는 높은 산 위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을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난공불락이지만 그 높은 산 위에서 먹고 살 식량은 어찌 해결한단 말인가. 멀리서 보면 완만한 능선 위에 펑퍼짐하게 불룩 솟은 사다리꼴 모양, 마치 중절모를 쓰고 있는 형상이다. 가까이 가면 깎아지른 수직벽이 우뚝 솟아 있다.

고구려인들이 오르내리던 '십팔반'과 오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999계단

오녀산성의 서문으로 오르려면 일직선으로 만들어진 999계단을 올라야 한다. 요즘 사람들이 오르는 길이다. 예전 사람들, 고구려인들은 굽이굽이 열여덟 번이나 돌아가는 ‘십팔반(十八盤)’을 이용했다. 999계단을 나선형으로 끼고 도는 ‘십팔반’도 복원해 놓았다. 고구려인들이 산성을 드나들 때는 폭 1~1.5m, 총길이 938m의 흙길이었지만 지금은 그 위에 돌을 깔아놓았다.

‘오녀산성’이란 이름은 이 산에 다섯 명의 여신이 살아 산과 마을을 지켜주었는데 용과 싸우다 죽어 이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는 것이다. 지금도 ‘오녀송(五女松)’, ‘오녀천(五女泉)’이란 이름의 소나무와 샘물이 남아 있다.

오녀산성 서문터로 올라가는 입구의 안내판
 
산성에 오르는 길은 세 곳이다. 서문 길과 동문 길, 남문 길이 있다.
 
서문쪽 999계단을 곧장 올라가면 ‘천창문(天昌門)’을 지나 서문터와 성벽을 만난다. 오녀산성은 서문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다. 천창문 직전에서 십팔반과 이어지는 왼쪽 산길로 들어서면 월아관(月牙關)과 단풍나무가 무성한 언덕(楓林坡)를 통해 북쪽 평지에 이른다.
 
북쪽 산정에는 곳곳에 ‘결의송(結義松)’ 호한송(好漢松)‘ 등 근사한 이름이 붙어 있는 소나무들이 반긴다. 고구려인의 변치 않는 절개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오녀산성의 북쪽 절벽 위에 자라고 있는 호한송
 
솔숲인 북쪽에서 고구려 유적이 남아 있는 남쪽 산정으로 가려면 자매교(姉妹橋)를 건너야 한다. 인조석으로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이름 만큼은 아주 정겼다. 서문 터까지 능선이 이어지고, 그 사이에 비래봉(飛來峰)과 운해송해(雲海松海)를 만난다. 한결같이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오녀산성 북쪽 산정 역시 양쪽이 모두 깎아지른 직벽이 천연 방어선을 만들고 있다.

고구려 유적이 남아 있는 오녀산성의 넓은 남쪽
 
오녀산성의 남북 거리는 1500m, 동서 폭은 300~500m, 둘레가 2440m. 북쪽이 좁고, 남쪽이 넓은 형세다. 고구려 유적지는 주로 남쪽에 산재돼 있다. 궁궐터가 있고, 산성의 식수원으로 추정되는 ‘천지(天池)’가 있고, 초소가 있고, 숙영지가 있고, 점장대(點將臺)가 있다.
 
점장대에 서면 환인댐으로 만들어진 환인 호수와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수몰된 곳에는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과 고분군이 있었고, 이 지역을 오녀산성의 평지성인 나합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거대한 호수로 변한 비류수의 상류. 점점이 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묵묵히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오녀산성의 남쪽 끝 점장대에서 본 환인호수
 
점장대를 돌아 동쪽 길로 들어서면 절벽 위에 소점장대라 불리는 작은 정자를 거쳐 동문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 길 역시 가파르다. 한 사람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좁디좁은 절벽 사이의 계단 일선천(一線天)을 지나야 동문 터를 만난다.
 
동문 입구에서 남문 입구까지는 절벽 아래 길로 이어지면 서문 입구까지 연결된다.
 
중국은 1986년 오녀산 정상에 송신탑을 세우면서 동시에 유적 발굴을 실시했다. 당시 금나라 유물과 함께 고구려 유물들도 출토됐다. 그리고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에 걸쳐 전면적인 2차 발굴 작업을 펼쳤다. 볼썽사납던 송신탑과 장비 운송용 케이블카도 없애 버렸다.
 
두 차례의 발굴에서 출토된 철기, 토기, 화살촉 등 유물들은 현재 오녀산성 여행객 센터 옆에 새롭게 건립한 박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오녀산성은 2004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보존되고 있다. 
 
주몽의 전설이 남아 있는 땅, 환인과 오녀산성. 푸른 비류수와 넓게 펼쳐진 분지를 바라볼 수 있는 산정에 서서 다시금 주몽을 떠올려 본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꿈을 가졌던 주몽은 알고 있으리라. <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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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점장대
오녀산성의 남쪽 끝, 벼랑 위에 점장대가 있다. 이 곳에 서면 지금은 인공호수로 바뀐 비류수와 환인시를 한 눈에 내려볼 수 있다. <김종억 편집위원>
오녀산성 동쪽 내성
오녀산성의 동쪽 역시 가파른 경사지다. 동쪽은 외성과 내성이 있다. 숲에 쌓인 동성의 흔적이 보인다. <浩>


왕궁터
산정에 왕궁이 있었다 한다. 고구려의 유적인지, 금나라의 유적인지 불투명하다. 여하튼 궁터 유적지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浩>
방아 유적
오녀산성의 남쪽 길가에 커다란 맷돌 모양의 돌이 남아 있다. 방아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浩>


오녀산성의 천지
산성에는 물이 필수다. 오녀산성에는 마르지 않는 연못 '천지'가 있다. <김종억 편집위원>
오녀산성 서문터
오녀산성에는 3개의 문이 있다. 남문, 동문, 서문. 서문터는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고구려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浩>

천창문으로 가는 길
999계단 끝은 천창문이다. 커다란 바위 사이 좁은 문 '천창문'을 지나면 바로 오녀산성 서문과 만난다. <김종억 편집위원>
복원된 옛 돌길 실팔반  
중국은 옛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실팔반을 복원해 놓았다. 흙길이었던 것을 지금은 돌길로 바꿔 놓았다. <김종억 편집위원>


십팔반 안내판
고구려인들은 굽이굽이 돌아가야 하는 '실팔반'을 이용했다. '실팔반' 안내판에 간략하게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김종억 편집위원>
서문으로 오르는 999계단  
오녀산성의 서문터로 오르는 999계단은 곧게 뻗어있다. 관광객들이 주로 사용하는 길이다. <김종억 편집위원>



오녀산성 글목록  http://tadream.tistory.com/5590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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