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njejbm
<28>이순신의 리더십 (10) 처벌을 통해서라도 한마음이 되게 하라
패망위기 암흑서 엄정한 군율 집행 필승 시스템 완성 한줄기 빛으로…
2012. 07. 23 00:00 입력 | 2013. 01. 05 08:11 수정
해남 명량대첩기념공원 내 조성된 회령포 결의 조각상.
회령포 전경.
지난주까지 필자는 이순신이 지닌 리더의 덕목에 관해 지식, 신의, 사랑, 용기, 정성, 역사의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리더의 덕목이 구성원들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면 리더십은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어떤 리더십을 구사해야 구성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조직에 주어진 목표 달성 또는 임무 완수를 위해 자신의 역량을 십이분 발휘토록 할 수 있을까? 현장의 리더들이 늘 고민하는 주제다.
구성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리더십은 아무렇게나 도출되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인간의 본성이나 행동양태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앞으로 살펴볼 리더십이 기초해 있는 인간관은 대개 4가지 정도다. 인간은 ‘해로운 것을 싫어하는 존재’ ‘이익을 좋아하는 존재’ ‘이성적 존재’ ‘감성적 존재’라는 것이 그것이다. 군대와 같은 수직적 계급 사회에서 많이 보이는 엄격한 처벌이나 제재는 어떤 인간관에 기초한 것일까. 그것은 첫 번째로 제기한 인간관 이른바 ‘인간은 해로운 것을 싫어하는 존재’라는 데 기초한 리더십이다. 처벌에 의존하는 리더십은 비록 일시적, 타율적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가장 빨리 구성원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손무·오기열전>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연약한 궁녀조차도 단시간 내에 정예 병사로 만든다. 병사들의 목숨과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전쟁터에서 리더는 승리를 위해, 부대의 임무 달성을 위해 강제로라도 병사들의 전투력을 극대화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군대 사회에서 명령과 복종이라는 엄격한 수직적 관계가 허용되는 것은 군의 임무가 개인의 이익추구나 기업의 이윤창출과는 달리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하며 나아가 인류 평화유지에 기여한다는 대의명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무기 관리·보수 소홀 땐 일벌백계
이순신은 무서우리만큼 군율 집행에 엄격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이순신은 이런 극단적, 타율적 리더십 방법을 택했을까.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부임한 이순신에게 전쟁 준비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일본의 침략을 직감한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무너진 성을 보수하고 예하 부대의 무기 관리 및 보수 상태를 점검했다. 임무를 소홀히 한 담당자에 대해서는 일벌백계했다. “아침 먹은 뒤에 나가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갑옷·투구·화살 통·환도 등도 깨어지고 헐어서 볼품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色吏)와 궁장(弓匠), 감고(監考)들을 처벌했다.”(임진년 3월 6일)
임진년(1592년) 4월 13일 이후부터는 이른바 전시 상황이었다. 연이은 조선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민심은 흉흉하고 병사들의 마음도 불안한 상태였다. 임진년 첫 출동을 하루 앞둔 5월 3일 여도 수군 황옥천이 집으로 도망을 갔다. 이순신은 즉시 잡아들여 목을 베고 진중에 높이 매달았다. 부하를 처형하고 출동한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 앞서 이순신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고요하고 무겁기를 태산같이 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고 병사들을 단속했다.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첫 해전을 앞둔 이순신, 그의 긴장감과 비장함이 느껴진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고된 노역에 지친 병사들과 노를 젓는 격군(格軍)들이 도망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순신은 도망을 주도한 병사나 격군들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처벌을 단행했다. “이날 경상도에서 옮겨 온 공문에 포로가 됐다가 돌아온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 등 명부에 올린 해군 80여 명이 도망갔다고 하며 또 뇌물을 많이 받고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므로 군관 이봉수와 정사립을 비밀리에 보내 70여 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어 주고, 김호걸과 김수남은 그날로 처형했다.”(계사년 2월 3일) “흥양 보자기 막동이란 자가 장흥 군사 30여 명을 그의 배에 싣고 도망간 죄로 사형에 처하여 효시하였다.”(갑오년 8월 26일) 이처럼 도망자들에 대해 극형으로 다스린 것은 전시에 병력을 유지,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군량을 여러 번 훔친 자에 대한 처벌도 매우 엄격하게 집행했다. “각 배에서 여러 번 양식을 도둑질해 간 자를 처형하였다.”(갑오년 7월 3일) “일찍 수루에 나가 남평의 색리와 순천의 격군으로 세 번이나 군량을 훔친 자를 처형했다.”(갑오년 9월 11일) 군량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생명줄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군량을 훔친 자에 대해서는 거의 도망자 수준에 준할 정도로 처벌 수위를 높였다.
삼도 수군통제사 임명 후 처벌 수위 높여
이순신의 처벌 횟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수위가 강화되는 시기는 칠천량 해전 패배 이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직후부터다. 이때 조선 수군은 거의 와해된 상태였고 장병들의 사기 및 군기 또한 말이 아니었다. 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이 8월 13일 보성에 도착했는데 전라좌수영의 참모장격인 우후 이몽구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다음 날인 8월 14일 아침 이몽구를 잡아다 곤장 80대를 때린 것을 시작으로 조선 수군의 기강 확립에 들어간다. 8월 17일에는 회령포에 도착해 군량을 도둑질해 간 하급 관리를 잡아다 곤장을 쳤으며, 8월 19일에는 뱃멀미를 핑계로 나타나지 않은 경상 우수사 배설을 대신해 그의 군관을 불러다 곤장을 쳤다. 또 회령포 만호 민정붕이 사사로이 피난민에게 수군의 물건을 준 죄로 곤장 20대를 때렸다. 8월 25일에는 백성 중에 남의 소를 훔치기 위해 왜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두 명을 잡아다 목을 베고 효시했다. 이순신의 엄정한 군율 집행 이면에는 전투준비태세와 군기의 확립 그리고 군심(軍心)과 민심(民心)의 안정이라는 대의(大義)가 포함돼 있었다. 13척으로 133척을 대적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이순신도 어쩔 수 없이 강력한 처벌을 통해 조선 수군 장병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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