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db.history.go.kr/id/hdsr_004_0030_0030_0011
* "(2)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작전" 중 "ㄷ. 연합군의 연합작전"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ㄷ. 연합군의 연합작전 註 022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3. 한중연합군의 항일전과 독립군의 수난 > 2) 한중연합군의 편성과 전투 > (2)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작전
1933년 5월 8일 일본군과 만주군 1천 5백 명이 다시 영링지에/영릉가를 공략하여 오자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격전 끝에 이를 격퇴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관계로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시 린장/임강·환런/환인·신빈·뤼허/유하·후이난/휘남지방을 공격하였으며 또 중국군의 본거지인 퉁화/통화로 진격하여 왔다. 중국군은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숙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할 수 없어 격전 수 일 만에 통화를 버리고 멍쟝/몽강의 산림지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수차에 걸쳐 승리한 일본군은 의기양양하여 6월 15일에 대부대를 동원하여 양타이링/양대령(杨台岭/楊臺嶺)을 넘어서 싱징/흥경 칭위안/청원 등지로 공격하여 왔다. 이에 대하여 혁명군 1천 명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휘하에 칭위안/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의 병력으로 싱징/흥경을 사수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혁명군은 일본군에 기습 돌격작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대량 소탕하였으나 일본군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는 데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이해천(李海天)·김일룡(金一龍)·박석원(朴錫源) 등 3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수백 명의 비전투원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싱징/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마저 패전을 당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부득이 눈물을 머금고 난산청/남산성(南山城)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7월 7일 일본군은 또 다시 영릉가 스런고우/석인구(石人沟/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공격하여 왔다. 그러나 혁명군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영웅적 독전과 제3로군 조화선부대의 응원으로 일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중포 1문, 경기관총 3정, 소총 80여 정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7월 중순에는 한중연합군이 푸순/무순현 라오고타이/노구대(老沟台/老溝臺)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 1개연대를 공격하였다. 2일간에 걸친 격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하였다.
그 후 일본군 1개대대가 퉁화/통화현에 주둔하고 있는 제4로군의 최윤구부대를 습격하자 제4로군은 제3로군의 응원을 얻어 적을 격퇴시켰는데 이 전투에서 적은 8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끊임없이 아군을 공격하였으며 더우기 비행기의 공격은 아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중연합군의 병력은 일당백의 사기와 전투 경력을 지녔지만 화력의 열세와 항공기를 지니지 못한 약점으로 적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더우기 사방으로 포위망을 압축하며 집요한 공격을 전개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이와 비례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군의 사기는 저하되기만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조선혁명군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큰 불행이 찾아 왔다. 즉 일본군의 밀정으로 있는 박창해(朴昌海)라는 자가 평소 양세봉 총사령관과 친면이 있고 혁명군에 대하여 직접 간접으로 후원하여 오고 있던 중국인 왕씨라는 자를 매수하여 중국군 사령관이 양세봉을 만나 군사문제를 협의하기를 요청한다고 유인하게 하였다. 양세봉 총사령관은 왕씨의 전갈을 받자 앞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부관 김광욱(金光旭)과 김성해(金星海)·최창해(崔蒼海)·김추상(金秋霜) 등의 대원을 데리고 왕씨를 따라갔다. 일행이 따라즈고우/대랍자구(大拉子沟/大拉子溝)로 가는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변장한 수십 명의 일본군이 뛰어 나와 일행을 포위하였다. 이때 왕씨는 태도를 일변하여 양세봉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날의 왕모가 아니다. 이 총알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일본군에 항복하라”고 소리쳤다.
이와 같은 갑작스런 사태에 양세봉 총사령관은 만사가 마지막이라고 각오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왕씨의 행동을 꾸짖었다. 어떠한 위협으로도 양세봉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양세봉과 그 일행을 사살하였다. 이때가 1932년 8월 12일 밤이었다.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쳐 싸워왔던 양세봉 총사령관은 이렇게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독립전쟁을 계속하기 극히 어려운 상황에 있던 조선혁명군에게 양세봉 총사령관의 피살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김호석(金浩石)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다시 군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김호석은 조선혁명군을 개편하여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라는 군사정부로 바꾸었다. 이 군사정부는 법무·민사·재무·외교·교양·특무·군사부 등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지방을 9개 군구로 나누었다. 군사부는 총사령 김호석이 부장에 임명되었는데 그 예하의 부대편성은 다음과 같다.註 023
이 당시 병력은 양세봉이 총사령관으로 있었을 당시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1935년 일본군의 추계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조선혁명군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못되어 다른 무장부대와 합세하여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9월 제1사 사령 한검추는 중국자위대 사령관 왕펑거/왕봉각과 즙안현에서 회담을 갖고 한중항일동맹회(韓中抗日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를 조직한 목적은 한국·중국의 동지들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치단결하여 싸우자는 데 있었으며 한·중 양국인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동맹회의 조직 구성은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고이허를, 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왕펑거/왕봉각이, 군대 총사령에는 한검추가 임명되었는데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註 024
이 조선혁명군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1936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는데 일부는 1938년까지 만주에 잔류하면서 항일전투를 계속하였다.
註 022 蔡根植, 앞 책, pp.168~17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37~641.
註 023 金俊燁·金昌順, 『韓國共產主義運動史』제4권(청계연구소, 1986), p.214.
註 024 金俊燁·金昌順, 앞 책,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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