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id/hdsr_004_0030_0030_0011
* "(2)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작전" 중 "ㄱ. 영릉가전투"와 "ㄴ. 요녕구국회와의 합작"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ㄱ. 영릉가전투 註 019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3. 한중연합군의 항일전과 독립군의 수난 > 2) 한중연합군의 편성과 전투 > (2)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작전
1932년 3월 11일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은 참모장 김학규와 중대장 조화선(趙化善)·최윤구(崔允龜)·정봉길(鄭鳳吉)이 지휘하는 3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중국의용군(中國義勇軍)·왕통쉬안/왕동헌(王彤轩/王彤軒)·량시푸/양석복(梁锡福/梁錫福)부대와 합세하여 신빈 왕칭먼/왕청문에서 푸순/무순(抚顺/撫順) 첸진자이/천금채(千金寨)로 향하여 진군하다가 12일 신빈 남쪽의 도우링디/두령지(陡岭地/陡嶺地)에 도착 야영하였다. 이때 이 정보를 탐지한 신빈현성을 수비하던 일본군이 총동원하여 중무기로 무장하고 주변 고지를 점령한 후 박격포 기관총 등으로 맹공을 하여 왔다. 그러나 혁명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지리적으로 밝지 못한 일본군이 무리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혁명군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즉 주변지리에 능숙한 혁명군은 그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며 교전 1시간 만에 일본군이 장악하였던 주변고지를 탈환하고 맹공격을 가함으로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돌격전을 감행하는 혁명군의 기세에 일본군이 퇴각하자 혁명군은 계속 일군을 추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30여 리에 위치한 신빈성 서쪽에 영링지에성/영릉가성(永陵街城)을 점령하였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추격전을 감행하여 샹지아허/상협하(上夹河/上夾河)를 점령하였다. 5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은 무수한 사상자와 말·무기를 버리고 패퇴하였다.
이 첫번째 한·중연합전투에서 연합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보다 더 큰 의의는 한중연합군이 협동작전을 벌여 획득한 이번 승리가 한중 양민족의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높여 주게 되었으며 정신적 유대가 공고하여 졌다는 점이다.
ㄴ. 요녕구국회와의 합작 註 020
이와 같이 한·중연합작전의 승리는 더 본격적인 한중연합전선을 구축하는데 실마리가 되었다.
1932년 4월 20일 중국의 용군 탕쥐우/당취오(唐聚五/唐聚五)·왕위원/왕육문(王育文)·순슈엔/손수암(孫秀岩)·장종저우/장종주(张宗周/張宗周)·리춘룬/이춘윤(李春论/李春潤)·왕펑거/왕봉각(王风阁/王鳳閣)·쉬따샨/서대산(徐大山) 등이 항인성에 청천백일기(青天白日旗)를 높이 들고 요녕구국회(遼寧救國會)를 결성하여 항일전을 계획하였다. 동 구국회도 정치·군사 양위원회를 두고 상무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왕위원/왕육문이, 군사위원회 위 원장겸 요녕 민중자위군 총사령에는 당취오가 선임되었다.
반만항일무장군인 요녕민중자위군은 총사령부 아래 52개로 사령부를 두어 환런/환인·퉁화/통화(通化)·신빈·지안/즙안(辑安/輯安/집안)·린장/임강·뤼허/유하·번시본계(本溪)·후이난/휘남(辉南/輝南)·하이롱/해룡(海龙/海龍)·둥펑/동풍(东丰/東豊)·시펑/서풍(西丰/西豊)·안둥/안동(安东/安東)·펑청/봉성(凤城/鳳城)·칭위안/청원(淸原)·몽강(蒙江)·창바이/장백·안투/안도·진촨/금천(金泉/錦泉)·판스/반석·시안/서안(西安)·콴뎬/관전·카이위안/개원(開原) 등 20여 현을 관장하며 20만 대군을 거느리는 재만 제1의 항일군단이었다.
조선혁명당에서는 이들과 연합전선구축을 계획하고 당·군대표에 김학규를 선임하여 구국회에 파견하였다. 김학규는 환런/환인성으로 가서 왕위먼/왕육문·탕쥐우/당취오와 협상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결성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 양측이 합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註 021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군민은 절실히 연합하여 일치항전하고, 인력과 물력(物力)은 서로 통용하며, 합작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공작을 나누어 맡는다.
이상의 결의안에 의하여 자위군 내에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특무대사령부와 선전임무를 담당하는 선전대대를 설치하고 이 두 가지를 조선혁명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무대사령부를 퉁화/통화성(通化城)에 두고 양세봉이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김광옥(金光玉)이 선전대대장이 되었다. 또한 구국회 선전부내에 한인선전과를 두어 이곳에서 한글간행물과 신문 『합작(合作)』을 발간하였다.
특무대사령부는 8개 특무대를 두고 만주 각지와 국내에 특무공작을 전개하였으며 전투에 임하여는 선봉부대로 맹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계속 대원의 충원을 위하여 통화 장뎬즈/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속성군관학교(朝鮮革命軍速成軍官學校)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2천 명이 교육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각 특무대 소관 지역내에 노농강습소(勞農講習所)를 개설하여 한국의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약 5만 명이 수강한 강습소생은 혁명군의 후비병력(後備兵力)이었으며 2천 명의 군관학교수료생은 혁명군의 후보군관이있다.
註 019 蔡根植, 앞 책, p.165.
註 020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一期 ; 蔡根植, 앞 책, pp.165~167.
註 021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1期, p.29.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中韓兩國軍民切實聯合 來一致抗戰 人力物力須交互通用 在分工合作的原則下 不分國籍隨其能力 分任抗日工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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