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중연합군의 편성과 전투
(2)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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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동안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당 소속 조선혁명군이 별도로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즉 1931년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공하자 조선혁명당은 이 난국을 타개할 방안으로 한·중연합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학규(金學奎)·김이대(金履大)를 당대표로 선출하여 중국당국과 협의케 하였다.
 
이들 양인은 심양(瀋陽)으로 가서 그곳의 중국국민외교협회(中國國民外交協會) 및 중국 민간지도자들과 접촉하여 협의하였다. 이 양측회담에서 주로 논의된 사항은 재만한인의 국적문제와 더불어 한·중 양민족의 연합항일문제였다.註 016
 
그 후 이 회담에서 논의된 것을 기초로 하여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玄益哲)이 구체화시켜 「동성한교정세(東省韓僑情勢)」와 「중한양민족합작의견서(中韓兩民族合作意見書)」를 만들어 중국당국에 보내었는데 그 내용에 대하여 중국측은 열렬히 찬동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작전 구축이 구체화되기 전에 현익철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써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註 017 더우기 1931년 12월 조선혁명당과 혁명군 간부들이 신빈현(新賓縣)에서 간부회의를 개최할 때 일군경의 기습을 받아 회의장에 있던 30여 명의 간부 중 이호원(李浩源)·김관웅(金寬雄)·이종건(李鍾建)·장세용(張世湧)·박치화(朴致化)·이규성(李奎星) 등 중요간부 10여 명이 체포되는 비운을 맞이함으로써 치명적 타격을 받아 연합작전을 추진하지 못하였다.註 018
 
그러나 이 신빈사변에서 일제의 독아를 피할 수 있었던 양세봉(梁世鳳)·양기하(梁基假)·고이허(高而虛) 등 중견간부들은 이와 같은 불행에도 추호도 동요하지 않고 대원들을 규합하여 혈전태세를 적극 추진하여 갔다.
* 독아 : 남을 해치려는 악랄한 수단
 
1932년 2월 조선혁명군은 또다시 지도자를 잃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콴뎬/관전현(寬甸縣)에 주둔중이던 양기하부대가 국내에서 침입하여 온 평복 추샨/초산(楚山)의 일본경찰대와 만주군 연합부대의 기습을 받고 격전 끝에 전사한 일이다.
 
이 사건 후 혁명군 총사령관에는 양세봉이 선임되어 부대를 지휘하여 나갔다.
 
 
註 016  한국광복군총사령부편(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광복(光復)』제4권(第4卷) 제1기(第1期), P.28.
 
註 017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이 추진되고 있다는 정보를 탐지한 봉천일영사관(奉天日領事館)은 각지(各地)에 밀정(密偵)를 배치하여 현익철(玄益哲) 등 당간부(黨幹部)를 추적하였는데 현익철(玄益哲)은 밀정(密偵) 류득정(劉得貞)·정치곤(鄭致坤)에게 체포되었다.
 
註 018  주 16)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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