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독립군의 성립과 항일무장투쟁의 전개
(1) 한국독립군의 성립 및 중국의용군과 연합항전
가. 한국독립군의 성립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 2) 한국독립군의 성립과 항일무장투쟁의 전개 > (1) 한국독립군의 성립 및 중국의용군과 연합항전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조선혁명군이 삼위일체로 중국 항일투쟁 세력과 연대하여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북만주와 동만주 일대에서도 한국독립당과 한족자치연합회·한국독립군이 1930년대 초반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 7월 북만주 웨이허현(苇河县/葦河縣/위하현)에서 창립된 한국독립당은 대부분 대종교 신자 및 유림·기호지방 출신 인사들, 그리고 한학(漢學) 수학이나 무관학교를 졸업한 양반·지주 출신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684) 이에 따라 이 당은 대체로 민족주의 및 반공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사실 이 당의 창건배경에는 북만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주의 계열 운동세력의 위기의식이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즉 한국독립당의 전신인 한족총연합회의 주요 지도자 김좌진(金佐鎭)이 1930년 1월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되고, 한인들이 대다수 거주하는 연변 및 북만지방에서 한인 중심의 공산주의운동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어서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 남만지역에 국민부와 조선혁명당·군이 성립한 상황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이 당은 창립시 당과 군의 조직체계 확립, 반공대책의 수립 등을 긴급현안으로 판단하고 몇 가지 사항을 결의하여 구체적 활동을 전개하였다.685)
한국독립당은 이러한 새 방침에 따라 독립운동 및 자치운동, 교육·산업진흥운동, 한인 교민 보호 등의 여러 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반공투쟁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장줘샹(張作相/장작상)과 같은 중국 군벌정권의 유력자와 연계하여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하였다.
이에 따라 이 곳에서 양 계열 사이에 바람직하지 않은 공방전이 벌어져 민족운동의 역량을 허비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30년 8월 초 180여 명의 한인 공산당원들이 하이린잔(海林站/해림참)에 있던 한국독립당 본부를 습격했다. 반대로 한국독립당의 남대관(南大觀)·권수정(權秀貞)(본명 이종형, 후에 변절) 등은 길림성 당국의 허가를 받아 ‘탐공대(探共隊)’를 조직하고, 이듬해 6월 경 동·북만 일대에서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하였다.686)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고한 한인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있어 북만지역 한인 대중의 원성을 사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반격의 명분을 제공하는 등 스스로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는 사례도 있었다.
* 권수정(權秀貞) = 이종영(李鍾榮) = 이종형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이 단행되자 항일투쟁의 좋은 기회가 온 것으로 판단한 한국독립당은 10월 5일 길림성(현재는 흑룡강성) 우창/오상현 다스허즈(大石河子/대석하자)에서 긴급중앙위원회의를 열고 급박한 시국정세와 향후의 투쟁노선을 논의하였다. 이 때 일제의 침략이 만주에 그치지 않고 중국관내 등 다른 지역까지 미치는 것은 물론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 예견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독립의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전망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중국군과 공동작전을 펴 이들의 지원을 받으며 투쟁하면서 세계연합군의 교전단체로 참가하여 국내로 상륙작전을 전개하면 전후 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전략이 세워지게 되었다.687) 이 회의에서 중요한 3가지 안건이 의결되었다.688)
한국독립당은 이 결의에 따라 하얼빈 근교의 중동선(中東線) 철도 연변을 중심한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재향군인의 소집과 청장년들의 징집을 실시하는 한편, 당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본명 지대형/池大亨)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의 편제를 정했다. 11월 중순의 편제를 보면 부사령관에 남대관, 참모관에 신숙(申肅), 재무겸 외교관에 안야산(安也山), 의용군 훈련대장에 이광운(李光雲), 의용군 중대장에 오광선(吳光鮮), 별동대 대장에 한광빈(韓光彬), 헌병대 대장에 배성운(裵成雲), 중국구국군 후원회장에 권수정 등이었다.689)
* 안야산(安也山) = 안후선(安珝善)
창립 초기의 한국독립군은 지휘부 위주로 편성되었고, 실제 병력은 약 150명 정도였다. 연변이나 남만지역과 달리 북만지역은 한인 사회가 드문드문 산재한 데다가 500호(戶) 이상 집단거주하는 한인사회가 거의 없어 그 기반이 취약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한국독립군은 중국항일군과 연계관계가 없어 오히려 중국군의 탄압을 받는 등 곤경을 치렀다. 하지만 11월 28일 중국군에 체포된 권수정의 적극 해명에 힘입어 총사령관 이청천과 참모 신숙 등은 12월 초순 북만 중국항일 세력의 본거지인 빈현(宾县/賓縣)에 가서 중국항일군과 연합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였다.690) 빈현에는 일제의 침략에 야합하여 성립한 시차(熙洽/희흡)의 괴뢰정부에 반대하던 청윈(诚允/誠允/성윤)이 11월 12일 길림성정부를 세우고 부근 10개 현을 기반으로 적극 항전하고 있었던 것이다.691) 이 때 양측에서 논의한 약속사항은 다음과 같다.692)
① 한·중 양군은 어떤 열악한 환경을 막론하고 장기항전을 맹세한다. ② 중동철로(中東鐵路)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맡고, 동부전선은 한국군이 담당한다. ③ 한·중 양군의 전시 후방교련은 한국군의 장교가 부담하고, 한국독립군의 소요일체 군수물자는 중국군이 공급한다.
위 협정에서 남만의 조선혁명군처럼 ‘한국(조선) 독립’이나 한국 독립전쟁의 지원과 같은 언급이 없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북만지역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사실상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기가 매우 어렵고 정착한 한인 교민의 숫자도 적었으며, 한국독립군 자체의 역량이 조선혁명군 세력에 비해 미흡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대가 무리한 측면이 있다. 이는 초창기 한국독립당이 독자적 항일투쟁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전략보다는 중국항일군과 연대투쟁하여 ‘교전단체’로 인정받으려는 현실적 방침을 우선 고려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693) 때문에 우리는 소수의 무장조직이 다수의 중국군과 연대투쟁을 모색하여 난관을 타개하려 한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동선 철도의 동쪽을 한국독립군이 맡은 이유는 그곳이 산악지대가 많았으므로 유격전을 수행하기 유리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총사령부의 위치를 흑룡강성 이란현(依兰县/依蘭縣/의란현)으로 정하고 한영호(韓永浩) 등을 당 중앙에 파견하여 위 내용을 보고했으며, 후방 각 군구의 조직들이 전선에 집중할 것을 촉구했다.694) 이에 한국독립당은 동·북만의 각 지역을 현(县/縣) 단위로 구분하여 조경한(趙擎韓)·오광선·홍진(洪震)(한국독립당 위원장) 등 12명의 징집책임자를 파견하고 각자 담당구역에서 새로 모집한 장정을 3·3제로 편성케 했다. 3·3제란 30명을 1개 소대, 3개 소대를 1중대, 3개 중대를 1대대, 3개 대대를 1연대로 편성하는 조직방침을 말한다. 또 한국독립군은 하사 이상 간부들을 소집한 재향군인 가운데서 우선 임명하여 초급훈련을 실시한 뒤,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지정구역으로 이동케 하고 추후 무기 등을 지급받아 작전에 임할 것을 결정했다.695) 이러한 분투 결과 1931년 말에는 약 300∼500여 명의 대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기와 장비 등은 별로 없어 실제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다.
684) 박환, 앞의 글, 143∼145쪽.
685) 이 때 아래의 사항에 결의되었다.
① 당의 지부는 현(县/縣) 지부·구(区/區) 지부 등 3칭체계를 둘 것.
② 군(軍)은 당군으로 편성하되 전 만주를 15구로 나누어 신병을 모집하며 3개월씩 일기로 미리 훈련할 것.
③ 당원 및 청소년 훈련을 적극 추진하여 적색(赤色)(공산주의)의 오염을 방지할 것.
④ 농민 성인에 대한 강습은 농한기나 가을·겨울간 야간을 이용할 것(조경한/趙擎韓,≪백강회고록(白岡回顧錄)≫, 한국종교협의회, 1979, 91쪽).
686) <昭和 6년 7월 2일 在間島岡田總領事發信幣原外務大臣宛報告要旨>(≪일본 외무성·육해군성 문서≫, 국회도서관 소장 복사제책본 제321권), 7125∼7129쪽
687) 趙擎韓, 앞의 책(1979), 94쪽.
688)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정비된 군사행동을 개시할 것.
② 당내 모든 공작을 군사방면에 집중할 것.
③ 특파원을 길림성 항일군사당국에 파견하여 한중합작을 상의할 것(일청/一靑(조경한/趙擎韓),<‘구일팔후 한국독립군재중국동북살적약사(九一八’後韓國獨立軍在中國東北殺敵略史)>,≪광복(光復)≫2-1, 1942년 1월;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년 영인본, 53쪽).
68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5(1970), 59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619쪽.
690) 趙擎韓,<韓國獨立軍與中國義勇軍聯合抗日記實>(≪革命公論≫창간호, 洛陽, 1933;독립기념관 소장 사본), 69쪽.
691) 郭廷以 編,≪中華民國事史日≫3(臺北: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84), 106쪽.
692) 一靑(趙擎韓), 앞의 글, 53쪽.
693) 사실상 이러한 전략은 한국독립당·군의 취약한 현실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한국독립군의 주요 간부로 활약했던 조경한은 후일 자신의 회고록(앞의 책)에서 한국독립군이 만주의 중국의용군은 물론 중국 중앙군과도 공동작전을 펴고, 나아가 세계연합군의 교전단체로 참가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당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694) 趙擎韓, 앞의 글(1942), 53쪽.
695) 趙擎韓, 앞의 책(1979),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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