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民衆自衛團-동변도지구의 첫번째 中韓연합항일武裝" 중 2) 興京事件과 연합항일방침의 확정"과 "3) 민중자위단의 성립"만 가져왔습니다.
2) 흥경사건(兴京事件/興京事件)과 연합항일방침의 확정
한국사총설DB > 국사관논총 > 國史館論叢 第44輯 >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국문]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Ⅲ. 朝鮮革命軍과 遼寧民衆自衛軍의 연합항일 > 1. 民衆自衛團-동변도지구의 첫번째 中韓연합항일武裝 > 1) 배경
9·18 사변 이후 동변도사수사(東邊鎭守使) 위지샨(于芷山/우지산)은 겉으로 항일을 찬성하는 척 하였다. 그래서 한 때는 각 현의 군인·경찰 및 민중단체는 무장항일에 그 자를 믿고 그 자가 거느린 성방군(省防軍)의 몇개 사단을 기초로 동변도 항일부대를 건립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는 기간에 위지샨(于芷山)은 일본의 퉁화(通化/통화) 주재 영사 오끼쓰 료우키(興津良郞/흥진량랑)과의 구결(句結)을 다그치고 있었다.
* 구결(句結) : 결론?
이어서 또 이 영사의 9월 29일 회의 요구에 의하여 10월 13일에 동변 각현의 한교단체 국민부의 골간분자(骨幹分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달 15일 ‘동변진수사서(東邊鎭守使署)’를 ‘동변보안총사령부(東邊保安總司令部)’로 고치고 동변보안총사령으로 자청하면서 공연적으로 일본놈의 개다리질을 하였다. 이어서 오끼쓰 료우키(興津良郎)이 사람을 파견하여 위지샨(于芷山)을 만나보고 빠른 속도로 왕청문 일대의 선비(鮮匪)를 소멸하라고 하였다. 당시의 조선혁명당, 국민부총부는 항일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사람을 파견하여 각지에서 공작하는 간부를 왕청문에 돌아와 회의를 열기로 통지하며 항일계획의 제정(制訂)문제를 상의하기로 하였다. 1932년 1월 5일 註 019 국민부 40여 명의 간부가 신빈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조선혁명군 제4중대장이 적들에게 고밀(吿密)하여 수십명 일본 군경이 갑자기 회의장을 포위하고 조선혁명당 현임주석 이효원(李孝源), 조직부장 장세용(張世用), 군사부장 김보안(金輔安) 등 31명의 중요간부들을 체포하였다. 정치부장 양하산(梁荷山), 국민부 중집(中執)위원, 조선혁명군 제5중대 대장 양서봉(梁瑞奉) 등 소수의 골간(骨幹)이 도망해 나왔다. 이것이 바로 한때를 놀래운 ‘興京事件’이다.
* 골간분자(骨幹分子) : 핵심인원
* 개다리질 : 방정맞고 얄미운 짓
* 양서봉(梁瑞奉) : 양세봉
* 제정(製訂/制訂) : 만들어 정하다
* 고밀(吿密) : 밀고
이 타격에 인하여 조선혁명당, 국민부는 기본상으로 해체될 상태로 되었다. 동년 2월초 양하산(梁荷山), 양서봉(梁瑞奉)은 깃발을 다시 세워 왕청문 지아허베이춘(夹河北村/夾河北村/협하북촌)에서 회의를 열어 또 다시 3개 총부를 세웠다. 고이허(高爾虛)가 조선혁명당 중앙위원회 주석, 양하산(梁荷山)이 국민부 중앙(中央)집행위원회 위원장, 양서봉(梁瑞奉)은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었다. 양서봉(梁瑞奉)은 임명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다수의 간부(幹部)가 체포되어 정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모든 동지들은 항일의지를 결정하여야 하며 “투항할 생각을 갖지 말고 초지(初志)를 관철하라”라고 하였다. 그는 또 전체 혁명당과 혁명전사들에게 경내의 한민(韓民)을 “신뢰와 보호로서 대하라” 註 020고 말하였다. 회의는 또 조선혁명군 대오를 확대하기 위하여 신빈, 환인, 통화, 유하 등 현에서 한인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입대시켰다. 그리고 총사령부를 왕청문에 설치하며 김학규(金學奎)를 참모장(參謀長)으로 임명하고 전군을 5개 사(師)(때로는 路/로라고도 불렀다)로 고치고 박대호(朴大浩), 한검추(韓劍秋), 조화선(趙化善), 최윤구(崔允龜), 정광배(鄭光培) 등 5사람을 1∼5사의 사장(師長)으로 임명하였다. 동시에 새로 모집한 전사를 각사에 보충시켜 대오가 4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번 회의는 조선혁명군이 적극 주동적으로 중국군대와의 연합항일을 결정하였고, 전문인원을 파견하여 중국항일군대와의 연락을 책임지웠다. 註 021
3) 민중자위단의 성립
9·18 사변 이후 중국 애국지사 왕통쉬안(王彤轩/王彤軒/왕동헌)은 왕칭먼(旺淸门/旺淸門/왕청문)에서 ‘농민자위대(農民自衛團)’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무기와 군사훈련 인재가 결핍했기에 왕통쉬안(王彤軒)은 친히 조선혁명당총부에 가서 한국 친구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양하산(梁荷山), 양서봉(梁瑞奉) 등은 자신들 역시 총탄과 군사인재가 결핍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국 친구의 애타는 마음을 돌보기 위하여 힘닿는 교관(敎官)을 파견하여 ‘농민자위단’을 훈련시켰고 크고 작은 총 20여 자루와 탄약을 선물해 주었다. 이 두갈래 무장은 왕청문에서 연합군을 조합하여 ‘민중자위단’을 건립 하였다. 민중자위단의 성립 정황은 당시 신문에 이렇게 기재되었다.
王彤軒誠一有志之士也… 9·18事變旣起 君即誓志抗日 投筆擧義. 乃以本村(旺淸門)爲中心 聯合中韓志士 組織民衆自衛團 由同志王季軒·王家訓·王銘族·孟昭春·于萬里·于海淸及韓僑獨立黨梁碧海(即梁瑞奉,亦稱梁世奉)·金曉奎(即金學奎)·梁荷山·金寰等加緊訓練. 不久即得武裝民衆1,500餘人 旋因械彈缺乏 乃悉蠲存粮 不足更出售良田 以購彈械而養士衆. 志士潘子明 馮惠民等 亦捐糧購置扎鎗短刀 以補充武器之不足.註 022
그렇지만 당시의 민중자위단은 아직 통일의 지휘기구가 성립되지 못하였다. 각부의 지휘권은 역시 원래의 군사두령손에 있었으며, 전투 중에서 서로의 배합을 위하였었다.
* 배합 : 협동
註) 019 : 회의시기는 1931년 12월 17일, 1932년 1월 5일, 1932년 2월 3일 등 세가지 설(說)이 있다. 본문은 《환인조선민족지(桓仁朝鮮民族志)》에서 1932년 1월 5일이 비교적 신임할 수 있다고 본다. 지점은 현성 하북(縣城 河北) 서세명(徐世明) 집이었다. 또 왕청문이라는 말도 있다. 이후 사증(査證).
* 사증(査證) : 조사하여 증명
註) 020 : 적위문서 《봉천삼도령사치방택외무대신전(奉天森島領事致芳澤外務大臣電)》(昭和 7년 2월 9일)에서 인용하였음.
註) 021 : 《원조선혁명군비서최윤걸회억(原朝鮮革命軍秘書崔允傑回憶)》(미간고/未刊稿) 요녕성사회과학원 당사연구소 소장.
註) 022 : 《왕자환거의사략(王紫寰擧義事略)》 요녕사회과학원 지방당사연구소 문서실, 원고가 소장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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