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尾聲"만 가져왔습니다
4. 조선혁명군의 연합항일 맺음말(尾聲/미성)
한국사총설DB > 국사관논총 > 國史館論叢 第44輯 >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국문]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Ⅲ. 朝鮮革命軍과 遼寧民衆自衛軍의 연합항일 > 4. 尾聲
1934년 후에 들어서서 동변도의 요녕민중자위군여부와 기타 항일의용군은 이미 관내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기타 지구와의 연락도 중단되고 있어 적후에서 고군작전하는 곤경에 이르렀는 바 만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부대는 점차 발전장대하여 육속(陆续/陸續) 통일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항일련군(抗日聯軍)이 조성되었다. 항일무장투쟁의 시련과 중공 항일민족통일 전선정책의 감화력으로 하여 계속 항일을 견지해온 각종 형식의 항일의용군 여부(抗日義勇軍 餘部)는 육속 동북인민혁명군(후에 동북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으로 개편함)을 따르게 되어 어떤 부대는 직접 동북인민혁명군의 편제에 편입(원 요녕민중자위군 제9로 바우징화(包景華/포경화)부(部)의 여부(餘部))되고 어떤 부대는 비록 편입하지 않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양징위(杨靖宇/楊靖宇/양정우)부(部)와 배합작전(配合作戰)(왕펑거/왕봉각, 덩테이메이/등철매 등의 부/部가 이러함)하였다. 이런 정황하에 조선혁명군 양세봉부도 상응하게 연합항일의 범위를 확대하여 기타 항일의용군여부와 연합작전하는 동시에 점차 양정우사령이 지도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연락을 가졌다.
* 동비엔다오(東邊道/동변도)(압록강 건너편과 남만주 남쪽 일대)
* 륙속(陆续/陸續/루쉬) : 끊임없이
* 배합작전 : 협동작전
1934년 봄, 양세봉은 신빈현 쐉라즈(雙砬子/쌍립자)에서 회의를 열고 국민부의 이름을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로 고쳤다. 김동산(金東山)은 계속 총령에 임명하고, 김호석(金浩石)은 군사위원장에 임명하고, 양세봉은 계속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임명한다고 결정지었다.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조선혁명당과 군대는 반드시 오랫동안 발을 붙일 수 있는 항일근거지를 창건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진일보 중국항일부대와의 연합을 확대하여야만이 철저히 항일할 수 있고 조국을 광복시킬 수 있다. 회의에서 원래의 조선혁명군 3개 방면군을 3개 사(師)로 개편시키고 원래 각 방면군 사령들이 해당 사장으로 되었다.
쌍립자회의가 있은 후 양세봉은 인차 판스(磐石/반석)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연계를 맺고 동북인민혁명군과 연합작전할 염원을 표시하였다. 그후 인민혁명군 제1군 사령 양징위(楊靖宇)가 리잉춘(李迎春/리영춘), 왕지런(王吉人/왕길인)을 신빈으로 파견하여 선후로 스다오고우(四道沟/四道溝/사도구)와 다황고우(大荒沟/大荒溝/대황구)에서 두차례나 양세봉 총사령을 만나 그의 연합항일에 관한 의견을 찬동한다는 양징위/양정우의 말을 전달하였다. 얼마 후에 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 사장(師長) 한호(韓浩)(조선족)가 부대를 거느리고 신빈에 와서 항일근거지를 개척하였다. 이에 이런 두갈래의 항일 경려(勁旅)는 신빈에서 호상의존하고 호상 배합작전하는 기세를 이루었다. 당시 반공색채를 띠고 있는 신문과 잡지까지도 이런 연합국면에 대하여 흥분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 사장(師長) : 사단장
* 경려(劲旅/勁旅) : 강한 군대?
東北人民革命軍 以獨立師爲主體 糾合附近愛國志士500及要求解放之朝鮮同志80名組成紅軍 其總司令爲揚靖宇…··上月(2月) 14日進擊金川大荒溝時 日僞軍頗蒙其害 …… 現日僞當局已督飭各縣加緊剿襲 但最近紅軍與朝鮮革命軍已有合流之勢 東北民衆反滿抗日氣焰亦漸由愛國熱情轉向思想戰之勢云.註 040
이 시기 조선혁명군은 동북인민혁명군과 기타 항일의용군 여부와 연합하여 유격전 전술로 일본침략군과 괴뢰군을 타격하였다. 그 주요한 승리는 다음과 같다.
1934년 5월 6일, 조선혁명군 제2사와 스즈위(蘇子餘/소자여)부가 연합하여 통화현 잉어부/영거부(英额布/英額布/영액포)촌의 괴뢰군 자위단(自衛團)을 들이쳐 여러 명이나 살상시켰다.
동년 6월, 조선혁명군 제1사는 라펑고우(砬蓬溝沟/砬蓬溝/립봉구)에서 일본군 한개 중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중대장 등 3명을 죽였다.
동월 조선혁명군 2사 1부는 신빈 전주링(珍珠岭/珍珠嶺/진주령)에서 일본군의 군용차를 습격하여 군차 1대를 불사르고 일본군 20여 명이나 소멸하였다.
동년 7월, 조선혁명군 500여 명은 양세봉 총사령의 인솔하에 통화현 콰이타마오즈(快大茂子/쾌다무자)에서 일본군 기병 150명, 보병 200명과 치열한 싸움을 거쳐 적 수십명을 소멸하고註 041 기관총 1대, 보총 50자루를 노획하고 적을 격퇴시켰다는 등등의 사실들이 있다.
동년 9월 18일, 산림대(山林隊/山林队)두목 야동양(压东洋/壓東洋)은 조선인 친일파 앞잡이 동변도 괴뢰유격대두목 박창해(朴昌海)의 시킴을 받고 ‘연합항일’의 간판을 걸고 환런/환인현 베이뎬즈툰(北甸子屯/북전자둔) 조선혁명군주재지에 들어가 기만 설교하고 양세봉을 샤오황고우(小荒沟/小荒溝/소황구)지구로 유인하였다. 이때 사전에 소황구지구에 매복하고 있는 박창해가 양세봉이 도착하자 마자 깜쪽 총을 쏘아 양세봉을 살해하였다.
* 산림대(山林隊) : 산림여단, 산림게릴라
양세봉의 피해는 중조항일지사들의 심한 비통을 자아냈다. “그 분은 오랫동안 혁명을 해 오신 조선혁명의 위대한 지도자이셨다. 지금 그분이 사망하였으니 조선독립운동의 앞날에 심대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註 042 그후 조선혁명군은 비록 계임(繼任)된 총사령 김호석(金浩石) 등의 영도하에 계속 항일을 견지하였지만 그 이전 세력에 크게 못 미쳤다. 나중에 동북항일연군 양징위/양정우부에 가입하였다.註 043
* 계임(繼任) : 임무를 이어 받음
註) 040 : 《동변항일세력확대여조선혁명군상호응(東邊抗日勢力擴大與朝鮮革命軍相呼應)》(《흑백반월간(黑白半月刊)》 제1권 제13기(第1卷 第13期)).
註) 041 : 일설에는 60여 명이라고 한다.
註) 042 : 《흑백반월간(黑白半月刊)》 제2권 제10기.
註) 043 : 차오원치(曹文奇/조문기), 《압록강반적항일명장양세봉(鴨綠江畔的抗日名將梁世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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