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주요한 전투성과" 중 "(3) 제2차 신빈보위전"만 가져왔습니다
 
(3) 제2차 신빈보위전(6월 17일∼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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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랴오청/노성유격전(老城阻擊戰)
 
1932년 6월 17일, 일본군 히라다(平田)지대(支隊)와 괴뢰군 정안유격대(靖安游擊隊) 1부가 난자무(南雜木/남잡목)역에서 내려 신빈현성으로 진공하였다. 동시에 적들은 여러 대의 비행기로 신빈성안의 민택(民宅)을 폭격하였다. 이번 폭격에 시민 40여 명이 사망하고 허다한 가게방, 개인집이 파괴되었다. 적군이 진공해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이춘윤 사령은 위대영, 무술대, 조선특무대 등 정예병을 신빈노성에 집결시켜 방어공사를 구축하게 하고 그는 소수부대를 이끌고 연도(沿途)에서 유격전으로 적들을 습격하였다. 이에 적들은 하루 저녁에도 수차 놀라고 가다간 멎곤하다보니 전진속도가 달팽이처럼 굼떴다. 이달 19일, 괴뢰군은 신빈노성에 대한 진공을 개시하였다. 자위군은 용감하게 반격을 가했으나 적들의 화력이 너무 맹렬하고 자위군 방어공사가 폭격에 파괴되었기에 부대는 사망을 감소하기 위해 보바오고우(拨堡沟/撥堡溝/발보구)로 철수하였다.
 
 
② 보바오고우(拨堡沟/撥堡溝/발보구) 매복전
 
적아 쌍방이 노성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리춘룬/이춘윤은 명령을 내려 매복전에 장기가 있는 조화선으로 하여금 조선특무대를 인솔하여 발보구 부근의 도로 양측에 매복하게 하였다. 적들이 이춘윤부를 추격하여 발보구에 이르렀을 때 조화선부의 장병들은 도로 양측에서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한편 이춘윤부도 되돌아서 반격을 가하였다. 난장판을 이룬 적들은 발보구를 철퇴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잠깐 숨을 돌린 후 또다시 중조항일부대에 덮쳐들었다. 쌍방은 오후 4시까지 싸웠다. 중조항일부대는 탄약소모가 너무 큰 데다 보충할 길이 없어 부득불 왕칭먼(旺淸門/왕청문)으로 철수하였다. 신빈은 또다시 함락되었다. 이번 전역에서 적군의 사상자는 40여 명이었고 아군의 사상자는 10여 명이었다.
 
 
③ 현성 수복
 
요녕민중자위군 제6로 중조 장병들은 왕청문에 주둔한 후 정비, 보충을 거쳐 다시 신빈현성을 탈환하는 전투에 투입하였다. 6월 22일, 이춘윤은 6로군 주력을 인솔하여 신빈현성 남쪽의 왕바가이샨(王八蓋山/王八盖山/팔왕개산)에 이르렀고 왕통쉬안/왕동헌, 량시푸/양희부는 무술대를 이끌고 현성동쪽의 바이치바오춘(白旗堡村/백기보촌)에 이르렀으며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1부를 거느리고 현성북쪽의 허창춘(後倉村/후창촌)에 이르렀다. 4월 23일 동틀 무렵, 중조항일부대는 세 곳에서 동시에 진공을 들이대어 재빨리 성벽을 돌파하고 성내에 진입하여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었다. 점심때 쯤 하여 적들은 버티지 못하고 괴뢰군사령 우지산의 인솔하에 칭위안(淸原/청원)으로 도망쳤다. 항일군은 이미엔포(一面坡/일면파)까지 추격하여 적들과 또다시 교전하였다. 24일, 중조항일부대의 각 부는 개선하여 인민들이 길거리에 나와 환영하는 열열한 분위기 속에서 신빈현성으로 들어왔다. 제2차 신빈보위전은 승리를 거두었다.
 
두달에 가까운 신빈보위전에서의 중조항일부대의 연합작전은 언론계의 호평을 받았다.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迄李(春潤) 君擧義後 知韓人勇敢强悍 意志堅决 可資利用 因收編韓僑獨立黨(按 : 應書爲朝鮮革命黨) 300人爲特務隊 委趙化善爲隊長 歷次戰役 特務隊異常出力 韓僑捐款 亦特別踴躍……註 034
 
在新賓縣街附近與日爲軍大部隊對峙 激戰月餘 均由司令梁世奉(即梁瑞奉)指揮 奪還縣城三次 雙方均有相當的死傷.註 035  
 
두 차례의 신빈보위전을 전후하여 중조연합군은 상술한 전투성과 외에도 또한 각 로 자위군에 편입된 조선특무대와 소속된 각 부 자위군과의 연합작전도 있다. 예를 들면 최윤구 부의 500명은 자위군 6로, 11로와 함께 청원지대에서 괴뢰군 600여 명과 10여 일간 격전을 벌여 적 괴뢰장병 80여 명을 살상하고 적들을 격퇴시켰다. 김광옥부 400여 명은 자위군 16 와 함께 집안, 임강지대에서 일본 괴뢰군 5,000여 명과 대결하여 30여 일간 격전을 벌인 끝에 적들을 섬멸하였다.  문영찬(文英燦)부는 자위군 제5로와 함께 환인 따예허(大野河/대야하) 지대에서 괴뢰군 약 5,000명과 대결하여 반달동안 싸워 적들을 격퇴시켰다. 이와 같은 사실이 많다. 얼마 후, 7월 하순에 최윤구, 조화선은 2영을 인솔하여 자위군 1부와 함께 통화 콰이다이마우즈(快大茂子/쾌대무자)에서 적 80여 명을 격사하였다.
 
동년 8월 7일, 조화선 특무대 300여 명과 자위군(自衛軍) 800여 명이 칭위안시엔 마샨웨이즈(淸原县 马山卫子/淸原縣 馬山衛子/청원군 마산위자)에서 일본군(500여 명)과 부딪쳤다. 치열한 전투를 거쳐 적들을 격퇴하였다. 적들의 사상(死傷)이 매우 엄중하였다(죽은 자 36명, 상한 자가 퍽 많았었다).註 036


 
註) 034 : 《리춘룬항일순국기실(李春潤抗日殉國紀實)》.
註) 035 : 이청천, 《조선혁명군재동북적항일전선(朝鮮革命軍在東北的抗日戰線)》.
註) 036 : 이상의 각 격전 자료는 《조선혁명군재동북적항일전선(朝鮮革命軍在東北抗日戰線)》, 요녕성 당안관(檔案舘)에 소장된 적위(敵僞)당안〈봉천경비사령부초비당안(奉天警備司令部剿匪檔案)〉과 《흑백반월간(黑白半月刊)》 제2권 제9기간에서 찾을 수 있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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