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주요한 전투성과" 중 "(2) 신빈반공전"만 가져왔습니다.
(2) 신빈반공전(新賓反攻戰)(5월 16일∼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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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 각 부대는 환인 이호래촌에 철수한 후, 한면으로는 부대를 휴식·정비하고 한면으로는 총사령 탕쥐우/당취오에게 전보를 쳐 지원병을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당씨는 신빈이 자위군의 남로(南路)관문이고 한국 항일부대의 주요한 근거지도 신빈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병력배치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위군 제7로 궈징샨(郭景珊/곽경산)부를 이호래촌으로 파견하였다. 리춘룬/이춘윤, 왕통쉬안/왕동헌, 양세봉, 곽경산은 연구(硏究)를 거쳐 각 부의 병력을 나누어 신빈현성을 연합공격함으로써 이 군사 요충지를 탈환하기로 결정하였다.
* 연구(硏究) : 고려, 논의
① 우지아바오(吳家堡/오가보) 전투
5월 6일, 이춘윤 사령은 본 路軍 제16단과 조선특무 1소대를 인솔하여 예정 계획에 따라 신빈으로 떠났다. 부대는 우지아바오즈(吳家堡子/오가보자) 이북 지구에 이르러 괴뢰군 1부와 맞다들었다. 적들은 이미 구축해 놓은 진지를 턱 대고 고수하는 데다가 야포의 엄호까지 있었기에 중조부대는 수차 진공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사상자 30여 명이 나오고 連長 두분이 순국하였다. 이씨는 부대에 명령을 내려 길을 에돌아 현성(縣城) 남부로 전진하게 하였다.
* 연장/련장(連長) : 중대장
② 동창타이춘(東昌台村/東昌臺村/동창대촌) 전투
5월 20일 아침, 괴뢰군 소본량부의 천여 명은 동창대촌 서쪽에 이르러 갑자기 중한항일부대의 역습을 당하였다. 원래 이호래촌 장령회의의 결정에 근거하여 조선혁명군 최윤구(崔允龜) 부와 무술대 1부의 500여 명은 이미 홍먀오즈(紅庙子/紅廟子/홍묘자)에 갔었다. 그들은 샤오번량/소본량부가 동창대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인차 왕통쉬안/왕동헌의 인솔하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에 소본량괴뢰군은 호되게 얻어맞고 현성으로 물러갔다. 이번 전투에서 일본군 독전관(督戰官) 오오쯔카도끼아쯔(大冢昔農)를 격사하고 괴뢰군은 30여 명 사상자를 내었다. 중한장병은 부상자가 18명 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왕동헌, 최윤구는 부대를 이끌고 바이치바오(白旗堡/백기보)에 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梁布夫部 무술대와 모였다.
* 인차 : 곧/이내의 사투리
이상의 전투로 하여 자위군 주력은 시간을 얻게 되어,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1부를 인솔하여 신빈성북의 허창춘(後倉村/후창촌)에 이르렀고 곽경산부도 이미 현성에 핍근(逼近)하였으며, 자위군 35로 사령 리춘광(李春光/이춘광)(이춘윤의 친동생)도 펑청(鳳城/봉성)에서 달려와 신빈현 부근의 시솽먀오즈(西双庙子/西雙廟子/서쌍묘자)에 주둔하였다. 이로써 현성에 대한 남, 서, 북 삼면 포위의 태세를 갖추었다.
* 핍근(逼近) : 매우 가까이 닥침
③ 현성(縣城) 포위공격
위지샨/우지산은 자위군이 결심코 현성을 격파하려는데 비추어 5월 21일 기병 1단을 끌어다 신빈수비부대를 증원하였다. 이에 원래 있던 보병 3개단을 합쳐 약 5,000여 명이 되었다. 이달 22일 저녁, 자위군 각 부에서는 현성포위전투를 개시하였다. 샤오번량/소본량부는 요해지에 의거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일주야의 격전을 거쳐 쌍방은 모두가 비교적 큰 상망(傷亡)을 입었다. 23일 저녁, 현성을 공격하는 자위군의 화력은 더욱 맹렬해졌다. 소본량부는 시체가 지저분하게 늘렸고 소씨본인도 어깨에 부상을 입고 도망치자 남은 병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24일 오후, 왕동헌이 지휘하는 무술대와 조선혁명군 1부는 성동(城東)의 신시가(新市街)를 점령하였다. 미리 조선 농민으로 가장하여 성내에 잠입해 있던 조선특무대는 조화선의 지휘하에 일제히 무기를 빼들고 위지샨/우지산의 주둔지를 향해 진공하였다. 위/우(于)역적은 자기 부하들이 짐승들처럼 흩어진 것을 보고 급히 명령을 내려 성밖으로 철퇴한 후 산성진(山城鎭) 방향으로 도망쳐 버렸다. 25일, 이춘윤은 중조연합군 각 부대를 거느리고 현성으로 개선하였다. 시민들은 깃발을 내걸고 폭죽을 터뜨리면서 그들을 맞이하였고 신빈수복을 경축하였다.
* 요해지 : 지세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
* 일주야 : 만 하루
* 상망(傷亡) : 사상자
중조연합부대는,
自 5月 2日 起到同月 25日止 血戰 20餘日 每戰皆捷 頗受民衆歡迎與援助 共計敵方傷亡400餘人反正者200餘人 失踪者400至500人 獲戰利品頗多 野炮8門 步槍500餘枝 子彈兩萬餘粒 我方傷不過百人 耗去子彈5萬數千粒 註 033
하였고, 전투가 끝난 후 곽경산, 이춘광은 부대를 거느리고 각자의 방어구역으로 되돌아갔다.
註) 033 : 《遼東抗日救國軍第六路血戰紀要》(《救國旬刊》 제11기).
註) 033 : 《遼東抗日救國軍第六路血戰紀要》(《救國旬刊》 제1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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