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조선혁명군의 중한항일동맹회의 결성과 해체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 1) 조선혁명군의 성립과 항일무장투쟁의 전개 > (2) 중국의용군과의 연합항전과 변천
 
 
1935년 조선혁명군(정부)은 일제의 토벌정책과 초토화작전으로 매우 어려운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 해 가을에 적의 ‘대토벌’이 개시되자 생존을 위해서 다른 항일부대와 연대하여 싸울 필요가 커졌다. 이에 제1사 한검추 부대는 동변도 지방에서 요녕민중자위군의 명맥을 유지하며 싸우고 있던 대도회 계통의 왕펑거/왕봉각 부대와 같은 해 9월 20일 집안현에서 만나 중한항일동맹회(中韓抗日同盟會)를 조직하고 공동투쟁하기로 합의했다.
 
이 한중연합투쟁 조직은 선언 및 서사(誓詞)·정강(政綱)·세칙(細則)과 군사조직 등을 발표하여 체제를 갖추었다. 이 조직의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고이허가 맡았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왕봉각, 군의 총사령관은 한검추가 담당했다. 전체 병력은 1,150명 정도였는데, 한검추 산하 조선혁명군 부대가 100여 명이었다. 조선혁명군 1사는 교도련(敎導連)으로 편제되었다.657)
* 서사(誓詞) : 맹세하는 말
 
조선혁명군은 중한항일동맹회를 통해 부족한 무기와 식량·피복 등 보급문제를 해결하고 일부 참모와 전투원에 중국인을 편입시켰다. 이를 통해 많은 중국인 대중의 간접적 지원을 받게됨으로써 항전역량을 강화할 수 있었다. 특히 이 동맹회의 성립 직전인 9월 초에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제1사 참모장으로 임명된 중국인 예징샨(叶景山/葉景山/섭경산)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중국 국민당정부에서 파견한 지하공작원이었기 때문에 한중합작 공작을 적극 주선하였다.658) 중한항일동맹회의 정강 2조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동북실지를 회복하며, 조선독립을 완성한다”고659) 명기하여 이 조직의 투쟁목적을 밝혔다. 조선혁명군이 자신의 부대규모보다 훨씬 많은 중국인 투쟁세력과 연합하면서 뚜렷이 ‘조선독립’을 양 세력 연합의 목표로 내세운 것은 나름대로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관철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중한항일동맹회 조직은 1년 정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1936년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왕봉각 부대가 거의 궤멸되고, 1937년 3월 왕봉각이 체포·처형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혁명군(정부)은 일·만 군경의 포위공격이 치열해지는 가운데도,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일제의 치안을 교란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충격을 주었다. 보기를 들면 1936년 6월 장진봉(張珍奉) 등 10여 명의 소부대가 평북 초산에 진공했고, 같은 해 9월에도 압록강 연안의 위원·벽동 파출소를 기습했다. 10월에는 정운준(鄭雲俊) 등 5명의 대원이 벽동의 한 경찰파출소를 기습공격하여 순사 4명을 사살하는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660)
 
 
657) 滿洲國軍政部 顧問部,≪滿洲共産匪の硏究≫1, 415∼417쪽.
<滿洲に於ける中國共産黨と共産匪>(≪思想情勢視察報告集 4≫, 京都:東洋文化社, 1973), 85쪽.
658) 金學奎, 앞의 글(1988), 590쪽.
<新派秘 第342號 昭和 12년 6월 19일 在新京服部昇治 朝鮮總督府 警務局長殿 朝鮮革命軍の狀況に關する件>(日本:山口縣문서관 소장≪林家史料≫), 821쪽.
659) <新派秘 第342號 昭和 12년 6월 19일 在新京服部昇治 朝鮮總督府 警務局長殿 朝鮮革命軍の狀況に關する件>(日本:山口縣문서관 소장≪林家史料≫), 807쪽.
660)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思想彙報≫10(1937년 3월), 31쪽.
이명영, 앞의 책, 100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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