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주요한 전투성과" 중 "1) 通化保衛戰"만 가져왔습니다.
 
조선혁명군의 주요한 전투성과 : 통화보위전(通化保衛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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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한 전투성과
 
환인 선서후, 소식이 퍼지자 일본관동군사령부(日本關東軍司令部)에서는 인차 괴뢰군과 경찰에 명령을 내려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에 중조연합부대(中朝聯合部隊)는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전투는 통화, 신빈 두 곳에서 먼저 전개되었다.
* 인차 : 곧
 
1) 통화보위전(通化保衛戰) 
 
1932년 4월 27일, 사카이 히로지(酒井碩二)의 인솔하에서 일군(日軍) 260여명(餘名)이 경중기창(輕重機槍) 20여가(餘架)를 휴대하고 박격포(迫擊炮) 4문(門), 치중차(輜重車) 40여량(餘輛)으로 심해로산성(瀋海路山城)에 하차하여 통화(通化)현으로 전진하였다.註 030 이번 행동은 명의상으로는 일본영사를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실은 통화를 점령할 욕심이었다. 16로 사령 순슈옌(孫秀岩/손수암)은 16로 자위군(自衛軍) 장병들을 이끌고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김광옥부(金光玉部)와 함께 적을 맞받아 나갔다. 이달 29일, 손수암은 위더셩(于得勝/우득성)단(團)과 김광옥부를 통화현 베이궈허다오즈(北過河道子/북과하도자) 북단의 고지에 배치하고 장스장(張思江/장사강) 독립 제2영을 과하도자 서산(西山)에 배치하여 지빙쿤(吉秉坤/길병곤) 독립 제3영과 서로 호응하게 하였다. 이달 30일, 오전 10시에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 치중차(輜重車) : 예전에, 군수품을 실어 나르던 차.
 
敵兵大部隊在機槍大炮掩護下 節節逼近 我軍勇氣百倍 唯武器不良. 雙方激戰7小時 前仆後繼 肉搏數次 敵棄輜重車輛 退據山上 掘壕筑壘.  
 
5월 1일 새벽, 적병은 수차 대거 포위돌파를 시도하였지만 번번히 격퇴되었다. 적들은 사상자가 늘어나고 기가 꺾인데다가 포장마차마저 아군에 노획된 후 급양이 따라가지 못했고 산위에 고립되어 있다 보니 물까지 단절되어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어쩔 수 없게 되자 적들은 몇몇 농민을 붙잡아 그들더러 산아래 내려가 손수암에게 화해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다. 손수암은 ‘평화담판을 허락한다’고 표시하였다. 이에,
 
敵方遣使西田實到部交渉 我方恐其和緩待援 敵方恐吾設伏出奇 結果秀岩提出辦法四條 ; 一, 日軍須退出境外 不作軍事行動 再行談判 ; 二, 領僑撤退 屬於外交範圍 須向縣政府聲明撤退之原因 ; 三, 始終不得違背信義 領僑撤退後 亦不得有侵犯行爲 ; 四, 議和專員須由日軍政外交雙方簡派. 於 4日早敵軍盡撤退至柳河縣境之㭬木台子. 是役吾軍陣亡官長 4員 士兵 25名 傷長官 6員 士兵 15名 ; 當場擊斃日軍官 2員 官兵 63名 傷20餘名 得獲步槍73棵 子彈9,000餘粒.註 031  
 
전후(戰後), 쌍방의 협의에 따라 통화주재 일본영사관 인원 및 일본교민을 경외로 내보내고 통화보위전은 초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註) 030 : 손수암, 〈第三軍區 第16路戰鬪經過〉(《救國旬刊》 제44기).
註) 031 : 위와 같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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