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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한 항일부대의 요녕 민중자위군 가입
한국사총설DB > 국사관논총 > 國史館論叢 第44輯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국문]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Ⅲ. 朝鮮革命軍과 遼寧民衆自衛軍의 연합항일
 
 
1) 요녕민중자위군의 성립
 
위지샨(于芷山/우지산)과 그의 부하 제1단 단장 쟝첸워(姜全我/강전아)가 공연히 일본놈의 개다리로 된 후, 애국심 있는 제1단 부단장 탕쥐우(唐聚五/당취오)가 변복하여 베이핑(北平/북평)(현재 북경)에 살며시 들어가 장쉐량(張學良/장학량) 장군에게 동변도의 군사형세를 보고하고, 于·姜 두 반역자와의 관계를 끊는 결심을 내리고 북평에 남아 張장군에게 효력(効力)하겠다고 하였다. 
* 개다리 : 앞잡이의 방언
* 효력(効力) : ? 
 
장학량은 탕씨(唐氏)를 위안하고 칭찬하였으나 북평에 남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를 원지방에 돌아가 각 현의 군경이 반역자와 관계를 끊고 공동으로 항일할 것을 연락하며 기회 봐서 동변도를 귀복하게 하였다. 장학량은 또 唐聚五를 성방(省防) 제1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원래의 단장 姜全我의 위치를 대신하게 하였다. 唐은 제1단 제1영 주착한 환인현에 돌아간 후 즉시로 단장직무에 나서서 선서하고 동변도 각현 현장, 공안국 국장과 연락하여 항일을 준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민중구국회(東北民衆救國會) 위원 황위저우(黃宇宙/황우주)는 그 회의 파견을 받고 또 장학량의 친필 ‘수유(手諭)’와 그 회의 위임장(委任狀)을 가지고 동변도로 왔다. 黃과 唐이 만난 후 장학량의 신임에 어긋나지 않고 하루속히 항일할 결심을 표시하였다. 黃이 돌아간 후 동북민중구국회는 또 선후로 20여 명의 군정간부를 보내어 唐聚五의 항일준비를 도와 주었다. 1932년 2월 동북민중구국회 상무위원이자 이름있는 애국교육가 처샹천(車向忱/차상침)이 다시 환인에 와서 唐과 항일에 관한 여러가지 구체적인 일들을 상론하였다. 준비공작은 이미 성숙되었다. 그래서 唐聚五는 각파 대표에게 전보를 보내어 3월 21일에 환런/환인에서 회의를 열기로 통지하고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왕칭먼/왕청문에 있는 왕통쉬안(王彤轩/王彤軒/왕동헌)·양서봉(梁瑞奉) 등이 요녕민중자위단 대표신분으로 회의에 참가하기를 환영한다고 하였다. 이 기간에 조선혁명군도 참모장(參謀長) 김학규를 환인현에 파견하여 唐聚五와 회견시켰으며 분공합작(分工合作)의 원칙아래 민족·국적 등을 가르지 않고 공동으로 항일공작을 책임지자고 상정(商定)하였다.
* 양서봉(梁瑞奉) = 양세봉(梁世奉)
* 분공합작(分工合作) : 협력? 협동?
 
3월 21일 환인·통화·관전·신빈·임강·집안·무송·휘남·봉성·수암 등 각현 대표 31명이 환인에 집중되었다. 왕통쉬안(王彤軒)은 전투 후에 참가하러 왔다. 이 회의에서 ‘요녕민중구국회’를 성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구국회 아래 정치위원회·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왕위원(王育文/왕유문)이 담임하고 각현 현장이 위원이며,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唐聚五가 담임하고 각현 공안국장이 위원이었다. 또 요령민중자위군을 성립하고 탕쥐우(唐聚五)가 위원장 겸 총사령이었다. 요녕민중자위군 총사령부 아래는 19개의 로(路)군으로 편성되었으며 요녕민중자위단이 11로군으로 편성되었고, 왕통쉬안(王彤軒)이 사령, 양서봉(梁瑞奉)·량시푸(梁希夫/양희부) 등이 지휘를 협조하게 하였다.
 
4월 21일 요녕민중자위군은 환인현성사범학교(桓仁縣城師範學校)에서 취직(就職) 선사식을 지냈다. 그 당시의 성전(盛典)은 참석한 자가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天晴氣朗 日麗風和 民衆皆扶老携幼 肩摩踵接 自黎明直至平旦 爭先恐後 奔走若狂 街巷皆滿 圍會場數十匝 尙蜂屯蟻聚 絡繹不絕 內有朝鮮人數百 亦來參加.  
* 취직(就職) : 고위직 취임
 
오전 10시, 예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唐聚五의 연설이 있었다. 이 군대의 항일 목적을 보고 하고 일본군의 침략죄행을 폭로시켰고, 연설 중에 격동할 때는 칼을 뽑아 오른손 손가락을 피내여 혈서 “살적토역 구국애민(殺敵討逆 救國愛民)”을 써서 전장(全場)에 보여주었다. 唐뒤에 많은 사람이 등장하여 연설하였는데 한인교포 대표는 아래와 같이 연설을 하였다.
有朝鮮人金永淵與朴慶平者……歴訴其被倭寇凌虐之苦 泣如雨下 希我國此次與倭寇作殊死戰 彼必合作以爲援助 藉報祖國之仇 而謀將來之福 全塲朝鮮人 聽未罷皆泣不成聲.註 027  
* 전장(全場) : 전체 청중
 
회의 이후 唐聚五 등은 전국에 선사선언 전보를 보내고 〈제1호 안민포고(第1號 安民布告)〉와 〈제2호 군법포고(第2號 軍法布告)〉를 부쳤다. 이에 의하여 양서봉(梁瑞奉)은 왕청문 총부에서 조선혁명군 각사 사장(師長) 회의를 열고, “현재 우리는 요녕민중자위군 성원이기에 자위군에서 내린 일체명령은 반드시 준수하고 복종하여야 하며 절대로 위반해서는 안된다. 어긋나면 군법에 의해 처리한다”라고 지적하였다.
* 사장(師長) : 항일 유격대 사단 지휘자
 
 
2) 조선혁명군
 
조선혁명군의 일부는 리춘룬(李春潤/이춘윤)부에 편입하였다. 환인선사와 동시에 요녕민중자위군 제6로 사령(司令) 리춘룬(李春潤)은 다음과 같이 제출하였다. “이 로(路)는 원래의 성방군(省防軍) 제1단(團) 제3영(營)의 수백명 관병이어서 세력이 약하니, 제11로군의 지원을 요구한다”. 그래서 리춘런(李春潤)·왕통쉬안(王彤軒)·양서봉(梁瑞奉)·량시푸(梁希夫) 등의 협상에 의해 원 량시푸(梁希夫)의 ‘대도대(大刀隊)’와 조선혁명군 제4사 조화선(趙化善) 부대를 제6로에 편입하며 조화선(趙化善)부를 조선특무부대로 고치고 원 제4사 사장 조화선(趙化善)을 특무부대 대장으로, ‘대도대(大刀隊)’를 무술대로 고치고 대장은 역시 왕통쉬안(王彤軒)이 겸임으로 하였다.
 
 
3) 조선혁명군 각부가 요녕민중자위군 각부와 제각기 연합군으로 형성
 
1932년 5월 초 조선혁명군은 참모장 김학규(參謀長 金學奎)를 파견하여 퉁화(通化/통화)의 唐聚五 총사령을 만나게 하였다. 회견기간 두쪽은 진일보의 합작을 위하여, 또한 제각의 전문을 발휘하기 위하여 동변도 각현의 조선혁명군을 요녕민중자위군 각로에 편입하게 하였다. 이름을 조선특무대(朝鮮特務隊)로 고치고 최전선작전(最前綫作戰)에 배치하였다. 註028 동년 6월 초 양서봉(梁瑞奉)은 唐聚五의 요청에 의해 통화에 가서 요녕민중자위군 총부에 조선특무부대 사령부를 설치하고 양서봉(梁瑞奉)이 사령을 담임으로 상정되었다. 5월 5일에는,
由總司令唐聚五提議 分置朝鮮革命軍特務隊於自衛軍各路 使之協力作戰 同時在通化縣江甸子開設朝鮮革命軍速成學校 訓練幹部人員 800餘名註 029  
라고 하였다. 이 협의에 의하여 양서봉(梁瑞奉)은 조선혁명군이 조선특무대로 고쳐진 사령부를 지휘하며 그 아래 8개의 특무대는 요녕 민중자위군의 8개로군에 분치되어 있는 것도 포함하였다. 그 중에 조화선부(趙化善部)가 이미 제6로군에 편입된 이외 문영찬부(文英燦部)가 제5로군(路軍), 김광옥부(金光玉部)가 제16로군, 최윤구(崔允龜=최원룡/崔元龍) 부(部)는 역시 제11로군에 남겨져 있으며 그들은 각 조선특무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 담임 : 담당?
 
조선혁명군 이천민(李天民)·이희원(李希元)·조옥호(趙玉浩) 등의 부(部)는 제6로군 무술대에 가입하여 이 부대의 실력을 크게 하였다.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소재지(왕칭먼/왕청문)에 문무청부 경위)文武淸部 警衛를 설치하였다. 부대를 다시 조절한 이후에도 조선혁명군 주력은 역시 대부분이 신빈현 내에 집중되고 있었다. 요녕민중자위군 제6로군(李春潤부), 제11로군(왕통쉬안/王彤軒부)과 같이 신빈현 내에서 전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서봉(梁瑞奉)도 조선특무대 사령부를 신빈에 이사하여 李春潤·王彤軒 등과 같이 중한(中韓) 항일부대를 건립하여 같이 적들과 싸워 휘황한 성과를 창조하였다.
* 휘황한 : 눈부신
 
 
註) 027 : 리지(李季)의 《요녕동변민중자위군기의구국상기(遼寧東邊民衆自衛軍起義救國詳記)》(요녕사회과학원 지방당사 연구실소장)를 인용.
註) 028 : 이청천(李靑天)의 《조선혁명군재동북의 항일전선(朝鮮革命軍在東北的抗日戰線)》(《화미(華美)》 잡지, 제1권 제34기)에서 인용.
註) 029 : 위와 같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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