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50_0040_0020_0010_0020_0010

 

가.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항전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 1) 조선혁명군의 성립과 항일무장투쟁의 전개 > (2) 중국의용군과의 연합항전과 변천
 
 
중국 동북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은 한국이 일제에 병합된 뒤 지속적으로 중국 동북의 군벌과 국민당 정권에 한중연합항전을 호소했다. 실제로 1931년 6월 경 국민부 길흑(吉黑)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이대(金履大) 등은 중국 길림성 당국자와 접촉하고 공산당의 소탕과 조선혁명 지원, 일제 구축(驅逐) 및 주구기관과 주구배 파괴·박멸 등을 밀약한 바 있었다.618) 또 비슷한 시기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겸 군 총사령 현익철은 길림에 가서<동북한교정세일반)東北韓僑情勢一般>과<중한(中韓)민족 합작의견서>를 제출하고 한중연합투쟁을 제의하였다.619)
* 구축(驅逐) : 몰아서 내쫓음
 
하지만 그해 7월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발발하고 8월 말 현익철이 심양(瀋陽)에서 일제에 체포되는 등 상황이 악화되어 이 계획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중국인이나 중국 관헌들이 일제의 직접적 침략책동이 없는 한 일본과 충돌하여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 이유도 컸다. 그러나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전면 침공한 ‘9·18사변(만주사변)’이 일어난 뒤부터 한중합작문제는 큰 진전이 있었다.
 
조선혁명당과 군의 주요간부들은 1932년 1월 19일 신빈시엔/신빈현(新賓縣)에서 당면 대책회의를 개최하다가 일본 경찰과 중국 관헌의 습격을 받고 대거 체포되는 불상사를 겪었다. 이 때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군 사령관 김보안(金保安)(일명 김관웅/金寬雄, 본명 김준택/金俊澤), 부사령관 장세용(張世湧)(본명 장원제/張元濟), 국민부 공안부집행위원장 이종건(李鍾建)(본명 이종순/李鐘淳), 박치화(朴致化)·이규성(李奎星) 등 핵심간부 10여 명이 체포되었다.620) 또 이후 3월 초까지 계속된 일본 경찰의 검거로 국민부와 조선혁명당·군의 관계자들은 모두 9개 현에서 80여 명이 검거되는 커다란 타격을 받고 말았다.621)
 
그러나 그러한 위기를 겪은 뒤에도 조선혁명당·군·국민부는 고이허(高而虛)와 양세봉(梁世奉)·양기하(梁基瑕)(호는 하산/荷山) 등 피신한 간부들에 의해 곧 재건되었다. 이 ‘신빈사변’ 이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은 양기하, 당의 위원장은 고이허, 군사령관은 양세봉이 분담하였다.622) 조선혁명군은 이후 신빈·퉁화/통화·환런/환인 등 지방부대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400여 명의 편제를 갖추고 사령부를 신빈현 왕칭먼/왕청문에 두는 한편, 남만주 각지의 유력한 중국인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연대를 모색하였다.
 
특히 9·18사변 이후 일제가 중국 동북을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우자 중국 동북 각지에서는 구 동북군벌계의 중국의용군은 물론 마적, 대도회(大刀會)·홍창회(紅槍會) 등 종교집단 계통의 각종 항일부대까지 대거 봉기하는 국면을 맞이하였다. 양세봉을 비롯한 조선혁명군 간부들은 이러한 기회를 맞이하여 중국의용군과 공동투쟁의 방략을 적극적으로 강구하였다.
 
1932년 3월 초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중국인 왕통쉬안(王彤轩/王彤軒/왕동헌)과 량시푸(梁锡福/梁錫福/양석복) 등 대도회 세력이 이끄는 의용군과 연대하여 공동투쟁키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같은 달 6일 조선혁명군은 이들과 함께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일설에는 요녕민중자위단)이라는 한중연합의용군을 조직하여 남만의 유하현 스푸캉(四鋪炕/사포항)에서 선포식을 거행하고 연합군의 봉기를 내외에 천명하였다.623) 이 때 사령관은 왕동헌, 부사령관은 양세봉이 맡았는데, 전체 병력은 2,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 달 11일 조선혁명군은 요녕농민자위단 부대와 함께 근거지인 왕청문에서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첫 출정을 단행하였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신빈현 난도링(南陡嶺/남도령)에서 신빈에 주둔하고 있던 괴뢰 만주국 공안대와 격전을 치른 뒤 신빈의 시용링지에(西永陵街/서영릉가)를 점령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신변현의 무치(木奇/목기)·헤이뇨(黑牛/흑우)·상자허(上夾河/상협하) 등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큰 전과를 거두었다.624) 이 같은 전투는 조선혁명군이 중국항일의용군과 연합항전을 개시하는 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는 조선혁명군이 각 지방에서 분산활동하고 있던 병력을 집결시켜 체제를 재편성하고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여 본격적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나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혁명군이 요녕농민자위단의 일원으로 투쟁하고 있을 때 베이징(北京)에서 결성된 ‘동북항일민중구국회’에서는 만주의 항일투쟁을 촉진하기 위해 환인현에 주둔하고 있던 구 동북군부대 지휘관 탕쥐우(唐聚五/당취오) 등 동북정권 관련자들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봉기를 촉구하였다. 특히 9·18사변 직후 관내로 피신했던 중국국민당의 동북군 수뇌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항일의지가 굳은 탕쥐우/당취오를 방어군(요녕육군 보병 제1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적극 후원하였다. 이리하여 국민당 특파원 왕위원(王育文/왕육문)·리춘룬(李春潤/이춘윤) 및 왕펑거(王鳳閣/왕봉각) 등 유력자들과 동변도 10개현 대표 30여 명이 3월 21일 환인현에 모여 ‘요녕민중구국회(遼寧民衆救國會)’를 조직하게 되었다.625) 이 조직 아래에는 정치 및 군사의 두개 위원회가 있었는데, 군사위원회 아래 ‘요녕민중자위군’ 총사령부를 두었고, 탕쥐우/당취오가 군사위원회 위원장 및 총사령을 겸직하였다. 이 때 신빈 동다잉(東大營/동대영)에 주둔하고 있던 구 동북군의 영장 리춘룬/이춘윤이 군사위원회 위원겸 제6로군 총사령이 되었다.626)
 
조선혁명군이 참여해서 같이 싸우고 있던 요녕농민자위단 사령관 왕통쉬안/왕동헌은 추후 이 소식을 듣고 이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조선혁명군은 왕통쉬안/왕동헌 등의 부대와 함께 요녕민중자위군의 제11로군으로 편성되었다. 조선혁명군은 이 연합부대에 참가했지만, 독립군으로서의 독자적 지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새로운 작전협정을 요구하였다. 즉 4월 29일 참모장 김학규를 환런/환인에 파견하여 요녕민중자위군 총수 탕쥐우/당취오 등과 한·중 양 민족의 연대투쟁 문제를 협상케 했던 것이다.627)
 
이 협정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제5항으로서, 조선혁명군이 장차 한국내로 진격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목표의 수립은 조선혁명군이 중국의용군과 같이 일제와 싸우는 한편, 지속적으로 국내침투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실제로 1932년 한해 동안 조선혁명군은 16차에 걸쳐 101명의 대원을 국내로 침투시켜 군자금의 모집과 일제 기관의 습격, 친일파 처벌 등의 투쟁을 벌였다.628) 이 수치는 일제 당국에 포착된 경우만 밝혀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32년 3월 결사대원 이선룡(李先龍)을 국내로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케 한 경우였다. 이선룡은 양세봉의 특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여 동일은행(東一銀行) 장호원 지점을 습격했다. 그는 13,000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빼앗았으며 충청·경기·강원 일대의 치안을 교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는 일인 경찰과 교전하여 중상을 입히는 등 크게 활약했고, 비록 4월 5일 체포되고 말았으나 그가 일으킨 파문은 매우 컸다.629)
 
조선혁명군은 요녕민중자위군의 일원으로 투쟁하면서 자주적 협정을 체결하고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뒤 이 부대는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성되었고, 총사령관 양세봉은 특무대 사령으로, 김광옥(金光玉)은 선전대대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독립군부대가 이렇게 편성된 것은 중국군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무대는 8개 산하부대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1932년 10월까지 다른 요녕민중자위군 부대와 함께 공동으로 거의 200여 차례의 대소전투를 치르며 크게 용맹을 떨쳤다.630) 조선혁명군은 이 무렵 요녕민중자위군 사령부이자 임시항일정부인 ‘요녕성정부’ 소재지인 퉁화(通化/통화)(江甸子/장디엔쯔/강전자)에 속성군관학교를 설치하여 400여 명의 장교 및 병사들을 양성하였다. 이 때 조선혁명군은 중앙군(현역, 정규군)과 지방군(예비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중앙군의 규모는 300명 가량이었다.631)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1932년 한해 동안 조선혁명군이 중국의용군과 함께 전개한 주요 전투를 간단히<표 1>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대활약으로 남만일대에서 조선혁명군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또 300여 명의 조선혁명군은 1932년 9월 량시푸/양석복이 거느리는 대도회군과 함께 대도시인 푸순(撫順/무순)공략전에 참가하여 일·만군과 격전을 치렀다.632) 물론 이밖에 상세히 알려지지 않은 전투도 많다. 우리는 이를 통해 조선혁명군이 중국의용군과 함께 매우 다양한 항일투쟁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표 1>1932년 4월부터 8월까지 조선혁명군이 행한 주요 연합전투 및 단독전투
*신빈만족자치현민위조선족지편찬조 편(新賓滿族自治縣民委朝鮮族志編纂組 編),≪신빈조선족지(新賓朝鮮族志)≫(심양/瀋陽:요녕민족출판사/遼寧民族出版社, 1994), 27쪽.
 
조선혁명군이 중국의용군과 공동작전을 수행하는 기간인, 1932년 8월 경 조선혁명당·군의 본거지인 신빈 또는 퉁화/통화에 국민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독립정부 수립’ 구상이야말로 조선혁명군 계열 인사들의 독자성과 자존심을 상징한다.633) 왜냐하면 그들은 상해 임시정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만주 무장투쟁 세력이야말로 진정으로 민족해방운동(독립운동)의 정통성과 주류적 위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존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존중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반임시정부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독립정부 수립계획은 1932년 10월 일본군이 신빈·퉁화/통화·환런/환인 지역에 대거 출동하고 공동투쟁하던 중국의용군이 패퇴함으로써 실천되지 못하였다. 일제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중국의용군 총수 탕쥐우/당취오와 협상하여 장차 의용군의 지반이 공고해지면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10만여 명의 병력과 무기를 대여하고 적극적 원조를 시행키로 하는 밀약을 체결했다고 한다.634) 물론 이 정보의 사실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는 조선혁명군의 원대한 독립전쟁 전략을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61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591쪽.
619) 김학규(金學奎),<삼십년래한국혁명운동재중국동북(三十年來韓國革命運動在中國東北)>(≪광복/光復≫1-4, 1941년 6월: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년 영인본), 28쪽.
620) 金學奎, 위와 같음.
<중국구일팔사변후조선혁명당재동북공작경과상황(中國九一八事變後朝鮮革命黨在東北工作經過狀況)>(≪진광/震光≫6호, 1934년 9월: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영인본), 15쪽.
<李浩源 등 가출옥 관계서류>(정부기록보존소 소장, 수원대 박환 교수 제공).
62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606·613∼616쪽.
622) 김학규(金學奎), 앞의 글(1941), 29쪽.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121, 69쪽(이명영/李命英,≪권력(權力)의 역사(歷史)≫, 성균관대출판부, 1983, 88쪽에서 재인용).
623)  차오원치(曹文奇/조문기), 앞의 책(1990), 202쪽.
624) 김학규(金學奎), 앞의 글(1941), 29쪽.
625) 譚譯·왕쥐(王駒/왕구)·샤오유춘(邵宇春/소우춘),<9·18사변 후 동북의용군과 한국독립군의 연합항일>(≪國史館論叢≫44, 1993), 201쪽.
장홍쥔(張洪軍/장홍군),≪구일입전사(九·一入全史)≫3(심양/瀋陽:요해출판사/遼海出版社, 2001), 155쪽.
626)오원치(曹文奇/조문기), 앞의 책(1990), 112쪽.
김학규(金學奎), 앞의 글(1941), 29쪽.
장홍쥔(張洪軍/장홍군), 위의 책, 181쪽.
 
627) 협정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동비엔다오(東邊道/동변도)(압록강 건너편과 남만주 남쪽 일대) 일대(즉 탕쥐우/당취오 관할지)에서 조선혁명군의 활동을 정식으로 승인할 것.
② 탕쥐우/당취오군 관할 내에 예속하는 각급 관공서와 민중이 조선혁명군의 활동에 관한 일체에 대하여 적극 원조해 줄 것을 탕쥐우/당취오군 사령부에서 지시할 것.
③ 조선혁명군의 군량 및 장비는 중국 당국에서 공급할 것.
④ 일본군을 향하여 작전할 때 쌍방이 호응원조함으로써 작전의 임무를 완성 할 것.
⑤ 조선혁명군이 일단 압록강을 건너 한국 본토작전을 전개할 때 중국군은 그 전력을 기울여 한국독립전쟁을 원조할 것(김학규/金學奎,<백파자서전/白波自敍傳>,≪한국독립운동사연구≫2, 1988, 586∼587쪽).
 
628)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 警務局),≪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의 치안상황)最近に於ける朝鮮の治安狀況≫(京城, 1933), 213쪽.
629) ≪조선일보≫, 1932년 3월 31일·4월 13일.
≪동아일보≫, 4월 1·15일.
630) 김학규(金學奎), 앞의 글(1941), 29쪽.
―――, 앞의 글(1988), 587쪽.
631) 계기화(桂基華),<3부(府)·국민부(國民府)·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독립운동 회고>(≪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987), 140쪽.
張洪軍, 앞의 책, 185쪽.
632) 계기화, 위의 글, 410∼411쪽.
張洪軍, 위의 책, 185쪽.
 
633) 1932년 8월 5일 신빈현 葦子谷에서 부근의 한인 농민대표와 조선혁명당 국민부 조선혁명군의 주요 영도자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때 이들은 ① 국민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정부 조직, ② 독립정부의 군대편성, ③ 각현 행정기관 정비, ④ 재만 조선인 단체의 통일 및 중국 국민당정부와 연락, ⑤ 조선 현재의 사회·정치기구 교란·파괴, ⑥ 재정방침 및 징병제도의 확립과 임원선임 등의 주요방침을 결정했다(<재만조선인의 불령행동급취체상황(在滿朝鮮人の不逞行動及取締狀況)>,≪일본외무성경무사(日本外務省警察史)≫재만대사관/在滿大使館 第1, 국회도서관 소장 일본 외무성문서 제책본 제2268권, 2614∼2616쪽).
 
63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607∼608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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