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50_0040_0020_0010_0010_0020
나. 조선혁명군의 투쟁목표와 이념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 1) 조선혁명군의 성립과 항일무장투쟁의 전개 > (1) 조선혁명군의 성립과 초기 활동
조선혁명군은 조선혁명당의 지휘통제를 받는 당군이었다. 이 독립군 부대는 조선혁명당의 결의에 따라 1929년 12월 20일 조직의 내용과 편제를 크게 개편하였다. 이 때 군사위원회에서 총사령에 이진탁(李辰卓), 부사령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이 선출되었다. 또 종전의 10개 부대가 7개 부대로 개편되는 한편 담당구역도 재조정되었는데, 주목되는 변화는 길림·액목·오상 등 북방구역이 제외되고 동만(東滿) 지방이 새로 추가된 점이었다.612)
* 이진탁(李辰卓) = 이준식(李俊植)
그 이유는 그곳이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어서 통제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또 북만주의 위하(葦河)·오상 일대에서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生育社) 등 기호지역 출신 민족주의계 인사들이 그곳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연유도 있었다. 동만 지역이 추가된 것은 그곳에 거주하는 많은 한인들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동만지역은 일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던 지역이었으며, 1920년대 후반 이후 공산주의운동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혁명군이나 국민부의 활동이 만만한 지역은 아니었다.
이 무렵 조선혁명군은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각 지역에 분산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재만한인들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으로 다수의 병력이 집중되면 충분한 보급지원을 할 수 없던 원인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포사회의 보호와 독립전쟁의 수행, 의무금 징수 등 다른 필요성에 따라 각 지방에 분산 배치되기도 했다.
조선혁명군 창립 초기의 투쟁목표와 이념 등은 창립시 발표된 선언서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613) 우리는 이 선언문을 통해 조선혁명군 등 만주 독립군의 임무가 친일파 숙청과 교민보호, 국내 진입작전 전개에 의한 일제 기관 파괴, 일제 관헌 및 악덕부호 응징 등을 주요 임무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사실은 ‘악질부호’를 응징해왔다고 선언한 점이다. 이는 만주 독립군이 단순히 항일투쟁만을 전개했던 것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 민족해방투쟁에 협조하지 않는 지주나 부호들도 처벌하는 등 계급투쟁 성격을 띠는 활동도 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조선혁명군의 경우 활동범위 내에 거주하는 가난한 한인 농민들을 구제하는 활빈(活貧)사업도 수행했던 사실이 새롭게 밝혀져 주목된다.614)
또 이를 통해 조선혁명군이 1920년대에 부단히 계속되었던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한 정통 무장조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무장폭력투쟁 노선을 견지하면서 제1의 투쟁목표를 우리 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 진입작전과 함께 국내 대중과의 연대에 의한 총궐기 방략을 주요 투쟁방략으로 삼고 있었던 사실도 확인된다.
그러나 같은 때 발표된 조선혁명당의 선언서는 ‘조선’의 절대독립 완성과 함께 노농민주정권의 확립, 대기업의 국유화, 대토지의 몰수와 농민에 대한 분배 등을 내세우며 다분히 좌경화된 내용을 밝혔다. 때문에 조선혁명당이615) 한인 대중의 광범한 지지와 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0년 8월 경 국민부와 조선혁명당·군 내부에서 독립운동 및 자치의 방법론 등을 둘러싼 노선투쟁과 이념대립이 폭발하기 전까지 조선혁명군의 초기 활동은 신민부(鮮民府) 등 일제 주구기관 및 친일파 처단, 국민부 의무금 징수 및 군자금 모집, 독립군 모병, 반공활동 등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활동은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의 근거지인 남만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군자금 모집과 관련해서는 평안북도나 함경남도 등 국내에 대원을 밀파해서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실 조선혁명군의 성립 초기에는 일본 군경과의 직접 대결이나 국내진입작전과 같은 독립전쟁 형태의 투쟁 비중이 크지 않았다. 이는 아직 조직체계가 정비되지 않았고 국내외적으로도 여건이 성숙치 않았기 때문에 본격적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 시기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계열의 활동 가운데 항일무장투쟁이 별로 없었던 것처럼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616) 잘못된 것이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에 걸쳐 만주지역에 공산주의운동이 점차 확산되면서 한인 주도의 공산주의운동이 점차 활발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민족주의계열의 민족해방투쟁을 압도할 정도로 그 세력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추세 가운데 민족주의자들 가운데도 공산주의사상에 동조하고 전향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사실 국민부와 조선혁명당·군 역시 창건과정부터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했고, 민족해방운동 및 한인교포 사회의 진로와 방법론을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대립과 갈등이 표면화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자와 이에 동조하는 인사들을 주축으로 한 비판세력이 무시 못할 정도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자(국민부와 조선혁명당·군 지지파)와 공산주의자 등 반대세력(국민부 반대파) 사이에 당·정·군의 진로와 운동방침을 둘러싸고 일대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한 내부갈등으로 1930년 11월 경 조선혁명군 사령관이 공석이 되고 당시 5중대장으로 있던 이종락(李鍾洛) 등의 소부대가 북만주 지부조직에서 이탈하여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吉江指揮部)(나중에 동방혁명군, 世火軍으로 개명)’를 조직하는 등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617) 특히 북만주 일대를 관장하고 있던 이종락의 이탈은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세력의 북만 장악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부와 조선혁명당·군은 진용을 재정비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10월 하순 조선혁명당 군사위원장 현익철이 총사령을 겸임하고 부대를 재정비 강화하였다. 이러한 내부투쟁 과정을 거쳐 조선혁명군은 조선혁명당과 국민부를 옹호하던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1934년 경까지는 대체로 반공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61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5(1973), 592∼593쪽.
613) 그 선언서의 내용은 다음의 자료를 참조.
강덕상·가지무라 히데키 편(姜德相·梶村秀樹 編),≪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조선(朝鮮) 5≫29(동경/東京:미스즈서방/みすず書房, 1972), 636∼637쪽.
<昭和 5年 길림지방조선인사정에 관한 건(吉林地方朝鮮人事情に關する件)>(일본외무성·육해군성 문서, 국회도서관 소장 복사제책본 제2299권), 10009∼10010쪽.
614) 조선혁명군(1934년 말 이후 조선혁명군정부)의 활동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바로 반봉건투쟁(反封建鬪爭) 또는 계급투쟁적 성격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일련의 활동이다. 즉 조선혁명군에서는 한인 농민중 극빈자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주어 구제하는 등 일종의 활빈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는 형식으로 부를 재분배하거나, 민중에게 평판이 좋지 않은 악질적 부호를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조선혁명군 대원들의 대부분이 궁핍한 농민 등 하층계급으로 구성되었던 사정과 관련된 것이다(<新派秘 第342號 昭和 12年 6月 19日 在新京服部昇治 朝鮮總督府 警務局長殿 朝鮮革命軍の狀況に關する件>795·797쪽 및<滿洲に於ける中國共産黨と共産匪>,≪思想情勢視察報告集≫6, 京都:東洋文化社, 1973, 87쪽). 또 국민부나 조선혁명당에서 민족운동에 종사하던 주요 지도자들 역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이 조직을 이끌었던 주요 지도자 후손들의 증언으로도 증명된다. 예를 들면 국민부 위원장을 지낸 양기하(梁基瑕)는 집 한칸없이 여기저기 유랑하였고, 입을 옷이 없어 남의 옷을 빌어입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손녀 양관옥/梁寬玉씨-46세-증언, 1997년 1월 22일 서울 자택에서 청취). 또 신빈 등지에 거주하며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정승국 옹/鄭承國翁 역시 비슷한 증언을 하였다(1991년 11월 21일 중국 심양/瀋陽에서 청취). 왜냐하면 남만지역은 연변지역과 달리 한인(韓人)들에게 토지소유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소작농민의 처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때문에 기존의 일부 연구(황룡국/黃龍國)처럼 국민부와 조선혁명당·군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개념으로 평가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61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478쪽.
616) 황룡국(黃龍國), 앞의 글(1990), 233쪽.
61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602∼6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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