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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주요한 전투성과" 중 "(1) 제1차 신빈보위전"만 가져왔습니다.
조선혁명군의 주요한 전투성과 : 제1차신빈보위전(1932.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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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한 전투성과
2) 신빈보위전(新賓保衛戰)
1932년 4월 하순, 봉천 괴뢰경비 사령 위지샨(于芷山/우지산)이 괴뢰경비군 4개단을 지휘하여 두 갈래로 나누어 신빈을 진공하였다. 한 갈래는 동변괴뢰보안사령부(爲東邊保安司令部/위동변보안사령부) 제3단 동궈화(懂国华/董國華/동국화)부(部)와 유격대대(游擊大隊) 샤오번량(邵本良/소본량)부(部)가 칭위안/청원현에서 출발하였다. 다른 한 갈래는 동변괴뢰보안사령부 제2단 티엔더셩(田德勝/전덕승)(子厚/자후)부와 기병단 왕디엔빈(王殿斌/왕전빈)부(部)가 난자무(南雜木/남잡목)에서 출발하여 신빈을 협공하였다.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방면에서는 리춘룬/이춘윤부의 제6로와 그 지휘를 받도록 배치한 양세봉 등 부의 조선혁명군이 연합하여 적과 맞섰다. 이에 전 동북을 들썩케 한 신빈보위전이 2개월이란 긴 시간을 걸쳐 진행되었다.
(1) 제1차 신빈보위전(1932.5.2∼1932.5.7)
① 신개령(新開嶺) 매복습격 전투
신카이링/신개령은 이번에 적들이 신빈을 진공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었다. 리춘룬/이춘윤은 사전에 무술대(武術隊), 위대영(卫队营/衛隊營) 제4련(連), 조선특무대(朝鮮特務隊)를 이곳에다 매복시켰다. 5월 2일, 전덕승·왕전빈이 거느린 보병·기병이 매복권에 들어서자 매복해 있던 아군은 돌연적으로 진공을 들이대었다. 적군은 정예한 무기를 턱대고 기를 쓰고 저항하였다. 전투는 아침부터 시작하여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적들은 버티어 내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적들은 사상자가 백여 명이었고 아군 역시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보총 30자루, 박격포 한문, 중기관총 두정, 탄알 수천발을 노획하였다. 이날 밤, 자위군 각 부는 명령에 의해 지우롱옌(九龙眼/九龍眼/구룡안)으로 철수하였다.
② 양지타이(羊祭台/양제대) 저격 전투
5월 3일, 왕전빈·전덕승은 병력을 나누어 영링지에(永陵街/영릉가)를 증원하였다. 왕전빈부의 기병단이 구용안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자위군의 매복 습격을 받았다. 적들은 놀라 갈팡질팡하면서 저항하는 듯 하다가 뿔뿔이 후퇴하고 말았다. 자위군은 추격하지 않고 명령에 의해 신빈라오청(新賓老城/신빈노성)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전덕승부가 양제대에 이르렀을 때 양세봉이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조선혁명군 1부와 자위군 6로 사령부 위대영(衛隊營)의 두개 연(連)이 갑자기 적군에 불벼락을 안겼다. 급해맞은 적군은 급기야 무치춘(木奇村/목기촌)으로 철퇴하고 양세봉은 부대를 인솔하여 신빈노성으로 철수하였다.
③ 영릉(永陵) 전투
5월 3일, 다른 한 갈래의 괴뢰군 샤오번량(邵本良/소본량)부(部)는 영릉을 진공하였다. 교활하고 완고한 소본량은 일본군이 뒷받침해 주는 것을 턱대고 이악스레 공격하였다. 영릉가를 지키고 있던 자위군 6로 위대영 소속 두개 연과, 방금 편성된 두개 영의 약 3,000여 명 병사들은 6로 사령 이춘윤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침착하게 적과 맞서 싸웠다. 일주야의 격전을 거친 쌍방은 모두 사상자가 있었다. 4일 저녁, 이춘윤은 부대를 인솔하여 신빈노성으로 철수하여 먼저 도착한 양세봉부와 만났다.
* 턱대고 = 무턱대고?
* 이악스레 : 이익을 위하여 지나치게 아득바득하는 태도가 있는 듯하게.
이상의 전투를 통해 적들의 예기를 꺾고 여유작작하게 병력을 수축(收縮)하는 목적에 도달하였다.
④ 로성격전(老城激戰)
신빈노성은 영룡과 신빈현성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세가 험하다. 이곳은 괴뢰군이 이번에 신빈현성을 진공하는데서 반드시 쟁취해야 할 곳이다. 자위군 각 부는 신빈에 집결한 후 인차 이춘윤의 지휘하에 적과 맞서 싸울 준비를 다그쳤다. 이춘윤은 우선 명령을 내려 조화선이 인솔하는 조선특무대로 하여금 황스전(皇寺镇/皇寺鎭/황사진) 부근에 매복하였다가 노성전투가 시작되면 적의 뒤로 에돌아가 진공을 들이대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이춘윤, 양세봉은 각각 주력을 이끌고 영통에서 노성으로 뻗은 도로 양측의 고지에 공사를 구축하여 침범하는 적들을 저격할 준비를 하였다. 5월 6일, 위지샨/우지산은 괴뢰군 3단을 지휘하여 노성을 향하여 떠났다. 적들이 황사진 부근에 이르자 조화선부는 적의 뒷면으로부터 맹열한 공격을 들이댔고 이·양 양부는 정면에서 적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일대 혼란에 빠진 적들은 부득불 철퇴하였다. 그러나 자위군의 병력이나 무기는 열세에 처해 있었으므로 적들은 잠깐 정돈을 거친후 또 다시 진공을 개시하였다. 자위군은 진지를 고수하고 전력을 다해 저항하였다. 노성의 민중들은 음식과 음력들을 마련하여 전선에 가 중조항일장병들을 위로하는 한편 부상병들을 제때에 후방에 모셔다 치료받게 하였다. 그 정경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군민은 온종일 악전고투하다가 탄약이 떨어지게 되어 부득불 전투를 그만 두고 환런/환인현 얼후라이춘(二戶來村/이호래촌)으로 철수하였다. 노성, 신빈은 잠시 적들에 빼앗겼다. 이번 전역에서 적 소좌참모 류즈판(劉芷藩/류지번), 상위련장(上尉連長) 한 사람, 중·소위 각각 한 사람을 격사하였고 적군 사상자가 근 백명이었다.註 032 자위군 역시 사상이 중하였다. 이 달 7일, 우지산이 인솔하는 괴뢰군은 신빈에 뛰어들어 상민들에 폭행을 가하고 마구 약탈하니 상민들의 고통은 이를 수가 없었다.
* 인차 : 곧
註) 032 : 大連圖書館藏, 《滿洲建國殉職公務人員紀念錄》.
* 인차 : 곧
註) 032 : 大連圖書館藏, 《滿洲建國殉職公務人員紀念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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