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kn_044_0050_0010_0030

* 글 처음부터 "1.民衆自衛團-동변도지구의 첫번째 中韓연합항일武裝"의 "1) 배경" 내용까지 가져왔습니다.


1. 민족자위군(民衆自衛團)-동변도지구의 첫번째 중한(中韓)연합항일무장(武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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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과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의 연합항일
 
동변도는 원 펑텐성(奉天省/봉천성) 註 017 동부의 행정구이다. 그 속에는 둥거우(东沟/東溝/동구)·펑청(鳳城/봉성)·슈엔(岫岩/수암)·콴뎬(宽甸/寬甸/관전)·좡허슈(庄河岫/莊河岫/장하수)·환런(桓仁/환인)·번시(本溪/본계)·푸순(抚順/撫順/무순)·신빈(新宾/新賓)·칭위안(淸原)(지금 요녕성에 속함)과 퉁화(通化/통화)·류허(柳河/류하)·하이롱(海龙/海龍/해룡)·안투(安图/安圖/안도)·후이난(辉南/輝南/휘남)·린장(临江/臨江/임강)·창바이(长白/長白/장백)·지안(辑安/輯安/집안)·푸송(抚松/撫松/무송)·둥펑(東丰/東豊/동풍)(지금 길림성에 속함)등 20여 개 시엔(县/縣/현)이 있었다. 도윤공서(道尹公署)는 안동(安东/安東)에 설치되어 행정을 책임졌고 또 동변진수사서(東邊鎭守使署)는 샨청전(山城镇/山城鎭/산성진)에 설치되어 지방군사를 책임졌다. 이 지구는 변경선이 포함되어 있고 동쪽은 조선과 강 하나(一江)의 거리이며 장백산과 그의 분맥이 남에서 북으로 흩어져 있다. 그곳은 산이 높고 수림이 깊으며 광산도 풍부하며 한족(漢族)·만족(滿族)·조선족 등 여러 민족이 살고 있다. 9·18 사변 이후 남만중한부대(南滿中韓部隊)의 연합항일은 바로 이 곳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 둥볜다오(东边道/東邊道/동변도)
 
1. 민족자위군(民衆自衛團)-동변도지구의 첫번째 중한(中韓)연합항일무장(武裝)
 
1) 배 경
 
9·18 사변 이후 민중자위단은 신빈(新賓/新宾)(싱징/兴京/興京/흥경)현(县/縣) 왕칭먼(旺淸门/旺淸門/왕청문)에서 성립되었다. 이 항일무장의 형성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 원인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첫째, 왕청문 일대는 한인교포가 집거하고 있었는데, 이 구역의 20여 개 자연촌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거주한 거민 총인수가 20,000인이었는데 그 속에 조선족이 10,000여 인 있었다. 약 절반을 차지했다.
 
둘째, 왕청문 일대는 한인교포 독립 운동단체 ‘국민부(國民府)’·‘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총부(總部) 기관의 소재지이며 남만(南滿)한인교포 독립운동 영도자의 소재지이며 또한 중요한 근거지였다. 1929년 5월 28일, 원래 있던 한인조직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가 ‘국민부(國民府)’로 연합되어, 현익철(玄益哲)이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직을 담임하였고, 동시에 성립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은 이효원(李孝源)이 주석(主席)을 담임하였고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사령부(司令部)가 성립되어 이웅(李雄)이 사령관을 담임하였다. 상술된 당(黨)·정(政)·군(軍) 세 총부는 모두 왕청문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후에 세 총부의 영도자가 비록 감옥에 붙잡혀 들어가는 등 원인에 변동이 있었지만 왕청문이 영도기관 소재지로서의 위치는 변동이 없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부에 속하는 7개 중대의 분포정황은 아래와 같다.
 
제1중대 : 신빈현 왕청문에 있는 한인(韓人) 이능작(李能作)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대장(隊長) 장도백(張都白) 외 전사가 20명 있었다. 세력범위는 왕청문 부근이었다.
 
제2중대 : 본계·무순 두 현 변경지구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김문(金文) 외 전사가 20명, 세력범위는 본계·무순 변경이었다.
 
제3중대 : 지안(辑安/輯安/집안)(지금의 길림성 集安)현의 우샤고우(五沙沟/五沙溝/오사구)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양건화(梁建化) 외 전사 20명, 집안현 경내를 활동범위로 하였다.
 
제4중대 : 퉁화현(通化县/通化縣/통화현) 콰이다마오즈(快大帽子/쾌다모자)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권태지(權太枝) 외 전사가 20명, 통화현 경내를 활동범위로 하였다.
 
제5중대 : 신빈현 영링지에(永陵街/영릉진)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양서봉(梁瑞奉) 외 전사가 20명, 신빈현 영릉가 부근을 세력범위로 하였다.
 
제6중대 : 환인현 난베이뎬즈(南北甸子/남북전자)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류광흘(劉光訖) 외 전사가 약 20명, 환인현을 세력범위로 하였다.
 
제7중대 : 신빈현 신빈바오난지에(新賓堡南街/신빈보남가) 영신샹회(永新商會)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황국청(黃局淸) 외 전사가 약 15명, 신빈바오(新賓堡/신빈보)를 세력범위로 하였다.
 
상술된 각 중대에 구비된 무기 정황은 모두 보총 60자루, 매자루에 총알이 약 50알, 권총이 백 자루, 매자루에 총알이 약 80알, 기타 작은권총이 150자루, 매자루에 총알이 10알 등이다. 그 밖에 변복대가 4개조 있었는데 작탄이 20개 이상 구비되었다. 상술된 7개의 중대에서 3개가 신빈현 경내에서 활동하였고 나머지 4개 중대도 신빈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상술된 정황에 의하여 요녕성교섭서(遼寧省交涉署)의 공문(公文)에는 “요녕성(遼寧省) 내의 선비(鮮匪)는 본래 신빈현 왕칭먼(新賓縣 旺淸門)에 근거(根據)를 두고 있다”라고 쓰여져 있었다.註 018
* 선비(鮮匪) : 한인 독립군 
 
셋째, 왕청문지구 애국 관신(官紳)의 한교(韓僑)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支持)를 들 수 있다.
* 관신(官绅/官紳) 관료와 토호, 지방유지
* 한교(韓僑) : 한국 교포
 
본세기 20년대 초기부터 동맹회회원, 신해혁명 지사(志士), 신빈현 왕청문구구장, 신빈현 참의부(參議員), 왕통쉬안(王彤轩/王彤軒)(號 紫宸/호 자신)이 당지의 한인교포 반일활동에 매우 큰 지지와 동정을 주었다. 그래서 봉천 장군벌(奉天 張軍閥)이 내린 〈취체한인판법강요(取締韓人辦法綱要)〉 등 법령·규정이 장기적으로 효과 좋게 관철되지 못하였고 한교 독립단체와 영도자들의 활동은 일정하게 보호를 받았다. 왕통쉬안(王彤軒)은 또 신빈현(新賓縣)현장, 경찰국장 등 지방 관신들에게 한교 독립운동과 중국과의 이해(利害)관계를 선전하였다. 그는 한인의 반일 활동은 근본적으로 놓고 말하면 중국의 이익과 일치되는 것이며 지방정권의 안전에 위험을 주지 않는다 라고 지적하였다. 그의 영향 아래 신빈현의 많은 관신(官紳)들은 한교 반일활동을 취체(取締)하는 일에 관하여 본척만척 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 밖에 한국독립 운동 영도자들과 친밀한 벗으로 된 사람이 오히려 많았다.
* 관신(官绅/官紳) 관료와 토호, 지방유지
* 취체(取締) : 통제




주 017 : 1929년 2월 5일. 남경국민정부 명령에 봉천성을 요녕성으로 고쳤음.
주 018 : 《요녕성교섭서공문 제88호》(민국 19년 5월 3일) 요녕성 문서관 소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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