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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쓰푸캉서사(四舖炕誓師)-첫 전투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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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자위단이 성립된 후 대오를 계속 확대하기 위하여 또 항일실력을 가강하기 위하여 양서봉(梁瑞奉)은 왕통쉬안(王彤軒)에게 류허시엔 쓰푸캉(柳河县 四铺炕/柳河縣 四舖炕/류하현 사포강)에 있는 ‘대도회(大刀會/大刀会)’ 두령 량시푸(梁希夫/량희부)를 방문하여 연합항일을 동원하게 하였다. 량시부(梁希夫)(원명 梁錫福/량석복)는 산동성 차오시엔(曹县/曹縣/조현)사람이었다. 註 023 일찍부터 민간단체 성공회(聖公會)(대도회/大刀會의 한개 파/派이다)에 가입하여 실패후 통화 린장(临江/臨江/임강)일대에 유랑하며 생애를 유지하였다. 1928년 통화지구(대도회/大刀會)에 반제(反帝)·반군벌(反軍閥) 폭동이 폭발되자 량시푸(梁希夫)는 참가하였고 법사(法師)(군사 두령)로 추천되었다. 실패후 류허쓰푸캉(柳河四舖炕/류하사포강)에 피거(避居)하였지만 역시 숨어서 농민들에게 무예를 전수(傳授)하였다. 1931년 12월, 양서봉(梁瑞奉)이 쓰푸캉(四舖炕/사포강)에 가서 량시푸(梁希夫)를 뵙고 그를 조선혁명군전사에게 무예를 전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량시푸(梁希夫)도 제자를 모집하여 항일을 준비하였기에 시간을 내지 못하여 요청대로 왕청문에 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로의 연합항일의 마음은 통하여 내일의 공동의 큰사업이 약속되었다. 그후 양서봉(梁瑞奉)·왕통쉬안(王彤軒) 등이 또 다시 쓰푸캉(四舖炕)에 왔기에 량시푸(梁希夫)는 매우 기뻐하였다. 당시의 량시푸(梁希夫)는 이미 무술대(武術隊) 500여명(餘名)을 취집(聚集)하여 비밀리 훈련(訓練)에 종사하였다. 이어서 3개의 항일역량이 연합하여 공동히 일본놈에 저항하는 것으로 상의되었다.
* 취집(聚集) : 모아들임
쓰푸캉(四舖炕)회의 이후 양서봉(梁瑞奉)·왕통쉬안(王彤軒)은 왕청문으로 돌아갔다. 왕통쉬안(王彤軒)은 또 조선혁명군 참모장 김(金)학규와 같이 항일지사를 연락하기 위하여 당시 동변보안사령부 제1단 제2영 영장(營長) 리춘룬(李春润/李春潤/이춘윤)을 만나려 신빈현(宾县县/新賓縣)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두쪽은 “서로 만나 의기 투합되더니, 마침내는 동지(同志)가 되었다.” 리춘룬(李春潤)은 “동변 각현군경(東邊 各縣軍警)은 서로 비밀리 연락하다가 일단 시기가 성숙하면 곧 의병을 일으켜 항일(抗日)하고 그때 당신들의 참가를 환영하겠다”라고 했다. 그는 또 왕통쉬안(王彤軒) 등에게 확실한 소식에 의하면 일본군과 위(僞)군이 가까운 몇일에 왕청문으로 진공하니 민중자위단 쪽에 일찍 준비하기 바란다고 알려주었다.
* 위(僞)군 : 괴뢰군
왕(王)·김(金) 두 사람은 왕청문에 돌아가 양하산(梁荷山), 양서봉(梁瑞奉)에게 보고한 후 즉시로 민중자위단은 속히 쓰푸캉(四舖炕)으로 이동하며 량시푸(梁希夫)의 ‘대도회(大刀會)’와 회합하여 일위(日僞)군의 움직임에 행동을 취하자고 상의하였다. 얼마 지나지 못해 일군은 과연 신빈·통화·환인·유화 4개현의 경찰대에게 왕청문을 “진초(進剿)”하라고 명령하였다. 형세는 이미 뚜렷이 알려졌었기에 민중자위단은 항일의 깃발을 내걸 수밖에 없었다. 3월 6일 민중자위단은 량시푸(梁希夫)의 ‛대도대(大刀隊)’와 2,200여 명이 쓰푸캉(四舖炕)에서 항일을 선서하고 ‘요녕민중자위단)遼寧民衆自衛團’으로 이름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왕통쉬안(王彤軒)을 사령, 양서봉(梁瑞奉)·량시푸(梁希夫)를 부사령으로 추천하고 통일지휘기구를 건립하고 원래의 농민자위단, 조선혁명군, 대도대(大刀隊)는 여전히 제 각각의 영도관계를 가지고 있게 하였다. 그리고 또 요녕 민중자위단은 신빈으로 다시 쳐들어 갈려고 선서하였다.
* 진초(進剿) : 진군하여 토벌하다
軍行所至 青天白日旗高張 居民莫不喜形於色 是以有志之士來歸者頗衆. 註 024
3월 11일 요녕민중자위단 주력이 도링(陡岭/陡嶺/두령)에서 신빈현의 위경찰부대와 마주쳤다. 연합군은 위경찰부대를 격퇴하고 승기를 돋궈 영링지에(永陵街/영릉가)로 전진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총 73자루를 획득하였다. 위신빈정부(僞新賓政府)는 펑텐셩(奉天省/봉천성)당국에 급히 전보하여 지원을 요구하였다. 당국은 위군(僞軍) 동궈화(董囯华/董國華/동국화)·샤오번량(邵本良/소본량) 등부(等部)의 3,000여 명을 구원하려고 보냈다. 3월 21일 이 구원 부대가 창투훠루오(昌图伙洛/昌圖伙洛/창도화락)에 도착했을 때 연합군의 복격(伏擊)에 맞았다. 상망(傷亡)이 매우 엄중하였다. 註 025 이번 전투에서 통계를 내니 일인(日人) 소원(小原) 1인(人), 위군련장(僞軍連長) 1명(名), 배장(排長) 1명(名), 사병(士兵) 20여명(餘名), 아군(我軍) 참모장(參謀長) 왕지아순(王家訓/왕가훈) 및 군사(軍士) 량푸전(梁福阵/梁福陣/량복진)이 사망하였다.註 026 요녕민중자위단은 첫 싸움에 큰 승리를 쟁취하고 왕통쉬안(王彤軒)은 즉시 환런(桓仁/환인)현에 요녕 민중자위군 성립대회에 참석하려 가고, 양서봉(梁瑞奉)·량시푸(梁希夫)는 부대를 왕청문에 끌고가 휴정(休整)하였다.
* 위경찰부대 : 괴뢰경찰부대?
* 위신빈정부(僞新賓政府) : 괴뢰신빈정부
* 복격(伏击/伏擊) : 매복공격하다
* 상망(傷亡) : 사상하다, 사상자
* 휴정(休整) : 휴식
註) 023 : 탄이(谭译/譚譯/담역) 주편(主編), 《동북항일의용군인물지(東北抗日義勇軍人物志)》 (요녕인민출판사, 1986)에서 인용.
註) 024 : 《왕자환부거의사략(王紫寰部擧義事略)》에서 인용.
註) 025 : 위와 같음.
註) 026 :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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