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41178


[단독] "5·18 때..." 미국 봉사단 막은 전두환 정권 막전막후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⑥-2] '안기부 입김' 평화봉사단 재협정 문건 입수

20.05.18 07:17 l 최종 업데이트 20.05.18 10:51 l 소중한(extremes88)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2020년, <오마이뉴스>는 '평화봉사단'에 주목했다. 항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증인'들의 이야기를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말]


▲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외무부(현 외교부)의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 문건 중 일부로 1983년 1월 4일 외무부가 당시 대통령 전두환에게 보고한 "미 평화봉사단 아국 내 활동재개 요청" 보고서이다. ⓒ 외교사료관

 

농촌의 어느 집 대문에 적힌 '개조심'을 집주인 문패로 착각해 "개 선생님 계십니까"를 외쳤다는 한 미국 청년. 밥상의 반찬을 다 먹어야 하는 줄 알고 간장까지 해치워버렸다는 다른 미국 청년. 소소한 웃음을 자아내는 이 일화는 1981년 6월 26일 <중앙일보> 기사 '미 평화봉사단이 떠난다'에 실린 내용이다.


평화봉사단은 미국 정부가 1961년 만든 청년 봉사단체로 한국에는 1966~1981년 1700여 명이 파견돼 활동했다. 기사 중엔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봉사단 아가씨들이 한국 청년들과 '로맨스'를 꽃피워 국제결혼 한 사람만도 20여 명에 이른다"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메이어(Mayer) 당시 평화봉사단장은 "한국인들의 영어 실력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평화봉사단의 영어교육 임무를 끝맺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열흘 후인 7월 6일, 외무부는 '한미 평화봉사단 협정 종료'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1966년 9월 14일 한미 정부 간 체결된 평화봉사단 협정을 "모든 사업 활동이 완료됨에 따라" 종료한다는 내용이었다. 보도자료 하단엔 "주로 후진국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평화봉사단은 미 의회 내 예산 삭감과 아국(우리나라)의 경제적·교육적 수준 향상을 이유로 사업의 종료를 요망했고, 아국도 이를 수락하게 된 것"이란 내용도 담겨 있다.


실제로 이렇게 화기애애하기만 했을까.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외무부(현 외교부) 문건에는 일촉즉발의 장면들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의 진실' 때문이었다.

 

▲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외무부(현 외교부)의 "한.미국 간의 평화봉사단 협정 종료에 관한 각서교환" 문건 중 일부. 1980년 6월 26일자 <중앙일보> 기사 "미 평화봉사단이 떠난다"가 실려 있다. ⓒ 외교사료관

 

눈엣가시


이로부터 약 1년 전인 1980년 7월 15일, 외무부가 발칵 뒤집혔다. AFP통신에서 광주시민의 관점이 비교적 강하게 담긴 스웨덴 스톡홀름발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기사에 적힌 취재원은 스티븐 클라크(Steven Clark)와 캐롤린 페리(Carolyn Perry)였다. 이들은 실제로 1980년 6월 25일까지 평화봉사단으로 대구에서 근무했던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Steven Clark Hunziker)와 캐롤린 투르비필(Carolyn Turbyfill)이었다.


이들의 증언은 7월 20일 AP통신에 '코리안 페이퍼스(Korean Papers)'라는 제목으로 다시 기사화됐다. 세 편 연속보도였다. 이 기사는 두 사람이 참고한 자료·인물로 학생들이 작성한 성명서, 한국인 천주교 성직자, 팀 원버그(Tim Warnberg),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를 거론하고 있다.


원버그와 돌린저 역시 평화봉사단원으로 이들은 5·18 당시 광주 현장에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헌지커와 투르비필에게 광주 소식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찍은 사진 필름을 넘겨 1980년 12월 미국의 잡지 <커버트 액션(Covert Action)>에 5·18 참상을 담은 사진이 실리도록 했다.

 

▲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으로 5.18 직후 미국 잡지 <커버트 액션>에 실리기도 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당시 외무부는 미국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고 미국 정부도 평화봉사단의 행동을 "무책임하다"고 표현하며 동조했다. 외무부는 협정 부처인 과학기술처(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통해 '7월 31일 입국 예정인 평화봉사단원들의 입국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미국 정부에 전했다.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우여곡절 끝에 53명이 들어오긴 했으나 이들은 통상 일정인 2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애초 1982년 7월 종료 예정이던 협정이 1981년 9월로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평화봉사단원들의 5·18 제보 및 외무부의 대응과 관련된 내용은 108쪽 분량의 '미국 평화봉사단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에 자세히 담겨 있다(관련기사 : [단독] 5·18 필름 들고 스웨덴행, 전두환이 쫓던 '그들' 찾았다).


물론 5·18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 정부의 예산 삭감도 평화봉사단 협정 종료가 1년여 당겨진 이유 중 하나였다. 외무부 '한·미국 간의 평화봉사단 협정 종료에 관한 각서교환' 문건에 담긴 1981년 4월 3일자 대외비 문서에는 "주한미대사관 블랙모어 참사관은 1982년 7월에 만료될 예정인 평화봉사단의 한국 내 활동이 미 행정부의 예산삭감 조치로 인해 1981년 9월로 앞당겨 만료될 것이라고 비공식 사전 통보해 왔다"라고 적혀 있다.


이 내용은 같은 날 당시 대통령 전두환에게도 보고됐다. '대통령 각하'를 수신인으로 '주한 평화봉사단 활동계획 조기 만료'라고 적힌 문서에도 위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 정부 입장에선, 5·18 관련 일 때문에 눈엣가시였던 평화봉사단을 내보낼 명분이 생긴 셈이었다. 앞서 소개한 보도자료엔 그 명분을 '주로 후진국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평화봉사단이기 때문에 경제적·교육적으로 성장한 우리가 사업의 종료를 요망했다'는 취지로 적은 것이다. 보도자료 어디에도 5·18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안기부의 등장

 

▲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외무부(현 외교부)의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 문건 중 일부. 사진은 1982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문건으로 "과거 일부 평화봉사단원들이 아국의 국내 문제와 관련하여 해외에서 물의를 야기한 사례가 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국내 문제"는 5.18민주화운동을 의미한다. ⓒ 외교사료관

 

이와 관련한 문건이 하나 더 있다. 외무부의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이란 제목의 문건에는 한국 정부가 평화봉사단을 눈엣가시로 여겼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내용이 담겨 있다.


<오마이뉴스>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입수한 총 375쪽의 이 문건은 미국 측의 평화봉사단 재협정 요청으로 시작한다. 1982년 6월 16일 문건에는 "폴 클리블랜드(Paul Cleveland) 주한미대사대리는 미 평화봉사단의 아국 내 영어교육사업 계획에 대한 아측의 원칙합의를 희망하여 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외무부는 미국 측의 제안을 거절했다. 6월 17일 김석규 외무부 미주국장과 리처드슨(Richardson) 주한미대사관 1등서기관, 제임스 메이어(James Mayer) 주필리핀 평화봉사단장(직전까지 한국 평화봉사단장)이 면담을 진행했으나, 외무부는 7월 13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확정한다. 이 과정에서 문교부(현 교육부)는 재정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고, 국내 거주 미국인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외무부에 제시했다. 이때까지 5·18 관련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5·18이 거론되기 시작한 건 이후부터다. 재협정 요청이 한 차례 무산된 이후, 미국은 영어교육 대신 다른 분야의 평화봉사단 파견을 요구했다. 1982년 10월 12일 데이비드 블랙모어(David Blackmore) 주한미대사관 참사관은 김석규 외무부 미주국장에게 "나병치료, 농업 및 임업 분야, 그 외 한국이 요청하는 분야에 평화봉사단을 파견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다.


이에 외무부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 문교부,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농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 과학기술처에 의견을 묻는 공문을 보냈다. 안기부는 11월 16일 답변을 통해 "과거 일부 평화봉사단원들이 아국의 국내 문제와 관련하여 해외에서 물의를 야기한 사례가 있음을 감안, 합의서에 평화봉사단원의 목적 외 활동금지 조항을 명시하고 위반 시에는 미 정부가 이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보완조치가 강구돼야 할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밝혔다.


이는 1980년 7월 사건이 벌어진 후, 처음으로 평화봉사단의 5·18 관련 활동이 거론된 것이었다. 안기부와 다른 부처의 의견을 종합한 외무부의 보고서엔 "1980년 7월 평화봉사단원의 광주사태 관련 허위사실 유포로 인하여 한미 양국 간 외교 문제화되었음"이란 내용이 담겼다. 한편 보건사회부는 22명, 농수산부는 9명의 평화봉사단원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문교부는 "초청 필요성 없음"이라고, 과기처는 "별다른 의견 없음"이라고 답변했다.


외무부는 12월 17일 안기부 및 각 부처에 보낸 3급기밀 문건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거론한다. 외무부는 평화봉사단 활동이 재개되면 예상되는 단점으로 "정치적 활동 등 목적 외 활동 가능, 미국 정보기관의 평화봉사단원 이용 가능성 우려, 한국 근무 후 반한 인사 전향 가능성 불무(없지 않음)"을 적었다.

▲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외무부(현 외교부)의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 문건 중 일부. 사진은 외무부가 안기부와 여러 부처의 의견을 종합해 외무부가 1982년 12월 17일 작성한 문서로, 미국으로부터 평화봉사단을 다시 파견받을 경우 "정치적 활동 등 목적 외 활동 가능", "반한 인사 전향 가능성 불무(없지 않음)" 등이 단점으로 작용한다고 적혀 있다. ⓒ 외교사료관

  

순항


그런데 12월 28일 안기부의 의견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이날 외무부 소회의실엔 외무부 김석규 미주국장, 송영식 북미과장, 정석환 농촌진흥청 국제협력담당관, 정석구 문교부 교육협력과 사무관, 엄영진 보건사회부 지역의료과 사무관, 황순종 과학기술처 총괄과 사무관, 김윤수 수산청 국제협력담당관실 사무관과 함께 배동현 안기부 북미과 1계장이 모였다.


3급기밀로 분류된 이 날 회의 기록에서 안기부 측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5~6명을 제외하고 평화봉사단원의 반한 활동은 특히 없었다. 한국을 다녀간 평화봉사단원이 약 1800명임을 감안하면 일부 극소수 인사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라며 "다만 평화봉사단의 파견이 주로 저개발국에 한하고 있는바,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아국 입장을 고려해본다면 약간의 수치스러운 느낌이 있다"라고 밝혔다.


이전의 논리가 '국내 문제에 개입해 문제를 일으켰지만 보완조치를 강구해 각 부처에서 합의 해 결정하라'였다면, 이 회의에서 '반한 활동은 별 문제 없지만 우린 선진국이니 굳이 평화봉사단을 받을 이유가 있겠는가'로 입장이 바뀐 것이다. 1981년 7월 6일 평화봉사단 협정 종료를 알리는 외무부 보도자료와 같은 논리였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전두환과 김상협 국무총리에게도 보고됐다. 1983년 1월 3일 '대통령 각하'가 수신인으로 된 외무부 보고서에는 각 부처의 "검토해보겠다"는 의견과 함께 안기부의 "평화봉사단의 파견국이 주로 저개발국인 바, 아국이 그 대열에 끼는 것이 문제"라는 의견이 담겼다.


▲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외무부(현 외교부)의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 문건 중 일부. 국가안전기획부는 1982년 12월 28일 외무부 등 여러 부처와 진행된 회의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아국 입장을 고려해본다면 (평화봉사단을 다시 받아들이는 게) 약간은 수치스러운 느낌"이라고 밝혔다. ⓒ 외교사료관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보건사회부와 농수산부는 처음 의견과 같이 평화봉사단 파견을 희망했다. 처음엔 파견이 필요하지 않다던 문교부도 1월 12일 외무부에 보낸 문건에선 "100면 내외의 초청 활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후 한미 관계자는 여러 차례 면담과 통화를 나눴고, 평화봉사단 재협정으로 방향이 정해지는 듯했다. 


1월 25일 면담 : 외무부 박건우 미주국장, 송영식 북미과장, 론 랜들(Lon Randall) 평화봉사단 국제운영담당 부국장, 윌리엄 이튼(William Eaton) 주한미대사관 1등서기관 참석


박건우 "현재 관계부처의 의견을 종합했고, 필요한 절차를 거친 후 2월 6~8일 방한하는 슐츠 미국무장관과 우리 외무장관과의 면담 시 그 내용이 정식으로 전달될 것임."


1월 26일 통화 : 윌리엄 이튼 1등서기관, 송영식 북미과장


윌리엄 이튼 "(한국이 당초 거절했던 영어교육 분야도 필요하다고 해서) 한국 정부의 예상 부담 경비, 그리고 민간 분야의 기여를 포함한 한국 측의 부담 경비 염출 방안 등의 문제에 관해 재검토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게 되었음."


4월 12일 면담(3급비밀) : 외무부 박건우 미주국장, 장재룡 북미과장, 문하영 사무관, 윌리엄 이튼 1등서기관, 제임스 메이어 주필리핀 평화봉사단장 참석


제임스 메이어 "다행히 평화봉사단의 예산 확보로 접수국(한국)의 재정 부담이 크게 요구되지 않게 되었으며, 한국 측 부담은 과거 평화봉사단에 대한 것과 동일한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됨."


박건우 "평화봉사단 활동 재개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사항은 목적 이외의 활동에 대한 문제임. 과거 평화봉사단원이 한국 내에서 물의를 일으킨 사실이 있음에 비추어 이 문제에 대하여 미국정부의 확고한 보장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임."


제임스 메이어 "과거 광주사태와 관련 평화봉사단원에 의한 불미스러운 경우가 있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함. 당시 평화봉사단원 1명에 대해 추방조치를 취한 바 있음(데이비드 돌린저 사례 - 기자 주). (중략) 평화봉사단 본부의 인지 하에서는 어떤 불순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


4월 28일 통화(3급비밀) : 윌리엄 이튼 1등서기관, 문하영 사무관


윌리엄 이튼 "과거 1966년 한미 양국 간 체결된 바 있는 평화봉사단 협정은 이미 종료됐으므로 금번 평화봉사단의 한국 내 활동재개가 이뤄지는 경우 새로운 협정의 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됨."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안기부도 특별히 재협정 논의를 제지하지 않았다. 안기부는 5월 31일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문서를 통해 "앞서 통보한 의견 외에 추가할 의견이 없으니 평화봉사단원을 활용할 관계부처와 협조해 적의(알맞게) 처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반전

▲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외무부(현 외교부)의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 문건 중 일부. 1983년 6월 3일 김석규 외무부 미주국장과 블랙모어 주한미대사관 참사관의 면담 내용을 담은 문서로, 이 자리에서 김 국장은 "비공식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인 느낌은 (평화봉사단 재협정과 관련해) 많은 반대 의견들로 인해 동의하기 매우 어려운 사항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외교사료관

  

하지만 사흘 만에 분위기가 뒤바뀐다. 6월 3일 김석규 미주국장은 블랙모어 주미대사관 참사관을 만나 "비공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본건 처리 전망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은 많은 반대 의견들로 인해 동의하기 매우 어려운 사항이 되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기부가 "적의 처리"하라고 밝힌 5월 31일부터 김석규 미주국장이 "동의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한 6월 3일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김 국장이 "많은 반대의견"을 이야기했지만 그 반대 의견이 무엇인지 현재로선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이후 안기부와 노재원 외무부 차관의 지시사항이 담긴 문서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안기부가 6월 17일 외무부장관에 보낸 문서(국미 400-1608)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외무부(현 외교부)의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 문건 중 일부. 1983년 6월 17일 국가안전기획부가 외무부장관에 보낸 문서로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의 관리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됨",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평화봉사단", "적당한 이유를 내세워 불허함이 좋을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 외교사료관

 

(1) 평화봉사단의 활동 지역이 주로 저개발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2) 미국이 제기하고 있는 분야가 특수 전문분야도 아니고


(3) 특히 미국이 봉사단의 파견을 요청하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관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되는 현 시점에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미 평화봉사단의 아국 내 활동 재개 문제는 아국의 입장에서 뚜렷한 외교적 명분이 없는 한 적당한 이유를 내세워 불허함이 좋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어 7월 1일 안기부의 이 문건을 확인한 노재원 외무부 차관의 지시사항이 담긴 문서에는 이 같은 내용이 실렸다. 사실상 안기부의 지시를 철저히 이행하라는 내용이다.

 

○ 7월 1일 안기부 공문(국미 400-1608) 차관님께 공람


○ 차관님 지시사항

- 평화봉사단 활동 재개는 현 시점에서 그 필요성이 인정되기 어려운 것으로 봄

- 다만 미국에 대해서는 거부 입장을 명시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관계부처 협의 중이라는 등 적당한 이유를 내세워 회답을 지연시킴으로써 미국이 스스로 아국의 부정적 입장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함이 좋을 것임. (미국에 계속 우리 입장이 부정적 방향임을 비치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 미국의 회답 독촉은 부정적 태도를 분명히 하게 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함)

 

1년 후인 1984년 10월 15일 미대사관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비해 영어교육을 위한 평화봉사단을 파견하고 싶다고 재차 요구하지만, 한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엔 이와 관련된 논의가 더 진행되지 않았다.

▲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외무부(현 외교부)의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 문건 중 일부. 1983년 7월 1일 노재원 외무부 차관의 지시사항이 담긴 문서로, 국가안전기획부의 공문을 확인한 노 차관이 "적당한 이유를 내세워 확답을 지연시킴으로써 미국이 스스로 우리의 (평화봉사단 활동 재개의) 부정적 입장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지시한 내용이 담겨 있다. ⓒ 외교사료관

 

"별로 놀랍지도 않아"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해당 평화봉사단원들은 이와 관련된 사실을 "지금껏 알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는 캐롤린 투르비필, 데이비드 돌린저와 연락이 닿아 이메일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 팀 원버그와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는 1993년과 2014년에 세상을 떠났다.


돌린저는 "이 사실을 몰랐고, 그들이 평화봉사단에 초점을 맞춘 것에 흥미를 느낀다"라며 "우리는 5·18 당시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다, 한국 정부의 언론 통제력을 우리가 빼앗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후 평화봉사단 협정이 재개되지 못한 것에) 안기부의 역할이 있었다는 점에 슬픔을 느낀다"라며 "정부기관이 진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시민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지적했다.


투르비필도 "나는 이 사안에 대해 알지 못했다"라며 "그들(당시 한국 정부)이 불행할수록 우리가 이룬 것에 대해 더욱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  미국 평화봉사단 앨범에 실린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Steven Clark Hunziker)와 캐롤린 트루비필(Carolyn Turbyfill)의 모습.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문건에 등장하진 않지만 당시 5·18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평화봉사단원들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별로 놀랍지도 않다, 공식적인 변명은 한국이 더 이상 평화봉사단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이었다"라며 "하지만 우린 한국의 평화봉사단 프로그램이 일부 단원들이 한 일에 대한 정부의 반감 때문에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평화봉사단원의 행동에 대해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내가 1980년 5월 27일 5·18이 진압된 직후를 목격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을 때, 미대사관의 정치 담당자는 이미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라며 "하지만 그는 그 도시를 멀리하라고 경고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풀브라이트(한미교육위원단) 학자인 내가 한국 군대와 대치하면 한미 관계에 타격을 줄 거라고 말했다"라고 떠올렸다.


빌 에이머스(Bill Amos)도 "이 사안에 대해 직접적인 지식은 없지만 한국 정부가 항상 평화봉사단을 간첩으로 의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라며 "우리 중 많은 수가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평화봉사단에 합류하기 전엔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었다"라고 말했다.

 

▲  평화봉사단 자료집에 담겨 있는 팀 원버그. 광주에서 근무하던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생생히 목격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①-1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http://omn.kr/1nj3g

①-2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http://omn.kr/1nj2u

② 광주 할머니와 약속 지킨 청년 http://omn.kr/1nk4l 

③ "전두환 부끄러워해야" http://omn.kr/1njqo

④ 미국인이 찍은 80년 5월 http://omn.kr/1nkf9

⑤ 택시운전사 류준열, 사실... http://omn.kr/1njxh

⑥-1 [단독] 5·18 필름 들고 스웨덴행 http://omn.kr/1nlj3


■ 이메일 인터뷰 번역

: 송재걸 (카디프대학 석사학위 논문 <The Gwangju Democratisation Movement and the Role of International News Flows> 저자)


덧붙이는 글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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