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40881


[단독] 5·18 필름 들고 스웨덴행, 전두환이 쫓던 '그들' 찾았다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⑥-1] 외무부 비밀문서에 담긴 평화봉사단 두 사람

20.05.18 07:16 l 최종 업데이트 20.05.18 09:08 l 소중한(extremes88)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2020년, <오마이뉴스>는 '평화봉사단'에 주목했다. 항쟁의 복판에 있었던 '증인'들의 이야기를 연속 보도한다.[편집자말]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사진은 1980년 7월 22일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김용식 주미대사에게 보낸 "Peace Corps(평화봉사단) 단원의 광주사태 관련 발언" 대외비 문서다. ⓒ 외교사료관


발단은 1980년 7월 15일자 스톡홀름발 AFP통신 기사였다. 이후 7월 20일에도 "코리안 페이퍼스(Korean Papers)"라는 제목의 스톡홀름발 AP통신 기사 3건이 나왔다. 모두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잔혹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 기사들에는 두 명의 인물이 제보자로 등장한다. 스티븐 클라크(Steven Clark)와 캐롤린 페리(Carolyn Perry)가 그 주인공이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두 사람을 <오마이뉴스>가 찾아냈다.


이들은 한국 외교 당국에서도 쫓던 인물이다. 당시 생산된 외무부(현 외교부) 비밀문서에 두 사람의 이름이 선명히 박혀 있다. 그들의 활동은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보고된 것으로 보인다.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국보위 보고사항"이라고 적힌 문건에 "스티븐 클라크(Steven Clark)"와 "캐롤린 페리(Carolyn Perry)"의 이름이 담겨 있다. ⓒ 외교사료관

 

5·18 두 달 후


5·18 이후 두 달 지난 시점에서 나온 스톡홀름발 이 기사들에는 광주시민의 관점이 비교적 강하게 담겼다. 사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5·18 직후 외신 보도는 가치와 한계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미국 5대 언론매체(<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 AP > <뉴스위크> <타임>)에서 1980년 5월 18일~6월 18일 생산한 기사 190건을 분석한 5·18기념재단 보고서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미국 주류언론에 투영된 광주항쟁: 비판적 검토>).


2017년 이 보고서를 쓴 최용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조사1과장은 "국가폭력에 대항해 민주주의·인권신장의 '보편적' 가치를 쟁취하려는 시민저항으로서의 본질은 외면되고, 지역 차별에 분노한 주변부 시민의 국지적 폭동이란 측면이 (미국 매체에서) 더 강조됐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최 과장은 "미국 매체들은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이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간과하지는 않았다"라며 "미국 매체들은 최소한 사실을 왜곡하거나 사건의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뒤틀지는 않았다, (왜곡·날조를 반박할 수 있는) 실증적 가치가 크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매체들은 원칙적으로 미국의 관점,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국 정부의 관점에서 광주항쟁을 해석하고 뉴스원을 고르고 기사를 생산했다"라며 "한국 신군부와 유착을 강화하려고 했던 카터 행정부의 외교적 전략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한, 당시 미국 언론의 경로의존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스톡홀름발 기사는 시위의 성격을 "민주적 권리와 계엄령 종료를 위한 비교적 평화로운 시위"라고 설명했다. 시위가 시작된 시점을 "김대중이 검거된 날"로 표현해 지역성을 내비치긴 했지만, 제보자 2인의 취재원을 "학생들이 작성한 성명서와 미국 평화봉사단 및 한국인 천주교 성직자들의 증언"이라고 소개하며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강조한 광주의 관점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또 "미국과 한국 정부 관계자들에 의해 진실이 억압되었다"라는 제보자의 주장도 기사에 실렸다.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1980년 7월 20일자 스톡홀롬발 AP 기사는 5.18민주화운동을 "민주적 권리와 계엄령 종료를 위한 비교적 평화로운 시위"라고 설명했다. ⓒ 외교사료관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기사들을 보면 사실과 다른 내용도 있다. 하지만 사망자 수나 일부 과장된 표현을 제외하면, 사실에 가까운 내용이 상당하다. 계엄군의 잔혹함과 관련해 "(사망자가) 3세에서 80세에 이른다", "버스 한 대를 채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기관총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많은 여학생들이 죽임을 당했고 일부는 강간당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묶이고 구타당했다" 등의 증언이 기사에 담겼다.


실제로 1980년 6월 7일 오전 11시 광주지방검찰청의 검시조서를 보면 5월 27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효덕동 뒷산에서 '좌우경부 맹관총상'을 입은 상태로 발견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는 74세 여성의 '복부관통상 사망' 기록도 남아 있다.


5월 23일엔 주남마을 인근 버스 집중사격으로 탑승자 18명 중 15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나머지 3명 중 2명은 야산으로 끌려가 사살·암매장됐다. 최근에는 5·18 당시 계엄군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자가 직접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  1980년 6월 7일 조선대병원에서 작성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검시조서(광주지검). 본적 : 불상, 주소 : 불상, 성명 : 불상, 연령 : 4세 가량. "91번"이라고 적힌 이 검시조서는 "알 수 없는(불상)" 내용으로 가득하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두환의 '고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재판의 쟁점인 '헬기 사격' 관련 증언도 나온다. 기사에는 "무장 헬기가 민간인 군중을 향해 덤덤탄(보통탄보다 상처가 크게 나도록 만들어진 특수 소총탄으로 현재는 참혹성 때문에 사용이 금지되었다 - 편집자 주)을 무분별하게 발사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는 내용이 있다. 특수 살상 무기인 '덤덤탄'이 사용됐을 가능성은 없지만, 5·18 두 달 후 나온 기사에 헬기 사격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사망자가 2000명에 이른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은 수치다. 물론 당시 정부가 "철저한 조사 끝에 밝혀냈다"는 174명 역시 신뢰할 수 없는 수치다.


현재까지 5·18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다. ▲ <5·18 관련 사망자 검시내용>(광주지검) ▲ <광주민중항쟁비망록>(5·18광주민중항쟁 유족회 편) ▲ <피해자신고서> 사망자·부상자 편(평민당) ▲ <광주사태, 사망자 명단>(계엄사) ▲ <5·18 관련자 치료비 지원금 내역>(1988년 국정감사 제출) ▲ <1980년대 민주화운동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편)를 종합해보면 총 235명의 사망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기록에 남지 않은 사망자, 무명열사, 행방불명자 등을 고려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 현재 집단 암매장과 관련된 조사도 이뤄지고 있다.


5·18 해외 기록물을 발굴·분석해온 최용주 과장은 "당시 정부의 통계를 믿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일부 과장된) 이야기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있었다"라며 "그만큼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당시 상황의 끔찍함을 전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로 보면 된다"라고 추정했다.


항의


당시 외무부는 곧장 반응했다. <오마이뉴스>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에는 위 AFP, AP 기사가 나온 이후 외무부의 대응이 상세히 담겨 있다. 총 108쪽 분량 중엔 당시 비밀문서로 분류된 문건도 포함돼 있다.


우선 AFP 기사가 나온 직후인 7월 16일, 외무부는 "광주사태 관련 미 평화봉사단원의 발언"이란 주요 내용이 담긴 '한국 관련 주요 외신보도' 문건을 작성했다. 해당 문건엔 수기로 두 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스티븐 클라크와 캐롤린 페리였다.


앞서 소개했듯 두 사람의 이름은 AFP 기사의 제보자로 등장한다. 이 문건이 작성된 이후에 나온 AP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기사에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으로 소개돼 있다. 평화봉사단은 1961년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로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교육, 의료, 농수산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한국엔 1966~1981년 평화봉사단이 들어와 있었다.


1980년 7월 18일 오후 3시 한·미 당국자가 외무부 미주국장실에서 만나 두 사람을 거론한다. 외무부 이계철 미주국장, 소병용 북미담당관과 주한미대사관 블랙모어(Blackmore) 정무참사관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무등빌딩 인근의 모습.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미주국장 : 기사에서 주한 미 평화봉사단원이라고 자칭한 스티븐 클라크 및 캐롤린 페리 등 미국인 2명이 밝힌 내용은 전혀 근거 없는 날조이며 이는 북괴의 광주사태 관련 선전을 의도적으로 부추기려는 것으로 판단되는 바, 상기 2명이 정말 미 평화봉사단 요원인지 및 당시 광주에 있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여 외신에 공개해명을 해주기 바라는 바임.


블랙모어 참사관 : 현재 알기로는 이들은 평화봉사단 명단에는 없으나, 다시 확인하여 결과를 알려주겠음. 이들이 거짓 이름을 사용했을 경우도 상상할 수 있겠는 바, 이러한 경우 미(국) 측 입장이 매우 어려워질 것으로 봄.


블랙모어 참사관은 잠시 후인 동일 16:15에 미주국장에게 전화로 다음과 같이 통보해 옴.


블랙모어 참사관 : 조사 확인 결과 이들이 평화봉사단원이 아님이 판명되었음.


미주국장 : 그렇다면 공개적으로 동 사실을 해명해주기 바람.


블랙모어 참사관 : 해명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힘든 바, 만일 기자가 질문을 해오면 이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해명하는 것이 좋겠음.


미주국장 : 그런 정도로는 이번 사건으로 이미 초래된 피해를 복구하기에 미흡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음. 공개 해명을 해주기 바람.


블랙모어 참사관은 동일 19:00 또다시 미주국장에게 전화로 다음과 같이 통보하여 왔음.


블랙모어 참사관 : 재차 확인 결과, 상기 2인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미 평화봉사단원 명단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들 유사 성명의 소유자들은 1980년 6월 25일 한국에서 출국한 것으로 되어 있음.


미주국장 : 귀하 말대로 문제의 미국인들이 평화봉사단원이라면 이는 중대한 문제라고 보며 미국 측에서 이에 대한 시정조치가 있어야 될 것으로 생각함. (중략)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시정조치가 취해질 때까지 계속 추궁할 것임.


실명

▲  미국 평화봉사단 앨범에 실린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Steven Clark Hunziker)와 캐롤린 트루비필(Carolyn Turbyfill)의 모습.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블랙모어 정무참사관이 스티븐 클라크와 캐롤린 페리에 대해 혼선을 빚은 이유는 기사에 익명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두 사람은 당시 대구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Steven Clark Hunziker)와 캐롤린 트루비필(Carolyn Turbyfill)이었다. 두 사람이 썼던 익명과 실제 이름을 비교해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수소문 끝에 두 사람 중 트루비필과 연락이 닿았다. 안타깝게도 헌지커는 2014년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머물던 당시 트루비필은 '부경희', 헌지커는 '문성배'란 이름을 사용했다. 트루비필은 <오마이뉴스>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언론과 인터뷰하며) 순간적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지만 거의 익명이 아니었다"라며 "(AFP보다 먼저 스웨덴의 일간지에 기사가 실렸는데) 우리의 사진도 함께 게재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한국인으로부터 (5·18)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반체제 인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라며 "(5·18의) 은폐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우리는 한국의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억압과 잔인함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 나경택 제공

 

헌지커와 트루비필에게 광주의 소식을 전한 이는 또 있었다. 광주와 영암에서 평화봉사단으로 있다가 5.18을 직접 목격한 팀 원버그(Tim Warnberg)와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였다(관련기사 :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그가 광주를 위해 남긴 선물). 원버그와 돌린저의 이름은 7월 20일 보도된 스톡홀름발 AP 기사에도 실려 있다.


원버그와 돌린저는 5월 18~27일 동안 광주에서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또한 광주시민을 보호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그들은 계엄군의 구타를 말리고, 환자를 후송했으며, 외신기자의 통역(대표적으로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을 맡았다. 1987년 하와이대학 한국학 잡지 < Korean Studies >에 논문 <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 >를 게재한 원버그는 안타깝게도 1993년 세상을 떠났다. 돌린저는 현재 영국에 거주 중이다.


돌린저는 <오마이뉴스>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헌지커와 트루비필은 팀과 내가 광주에서 목격한 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라며 "1980년 6월 초 그들과 광주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은 2년 동안의 프로그램을 마치고 6월 후반에 한국을 떠났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돌린저는 자신이 광주에서 찍었던 사진의 필름과 광주시민들이 만들었던 성명서 등을 두 사람에게 넘겼다. 이 필름의 사진들은 1980년 12월 미국의 잡지 <커버트 액션(Covert Action)>에 실렸다.

 

▲  1980년 12월 미국 잡지 <커버트 액션> 표지. 5.18민주화운동 소식으로 채워져 있다.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한국에 있었던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와 캐롤린 트루비필은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팀 원버그와 데이비드 돌린저로부터 자료를 받아 이 잡지에 사진과 글을 실었다. ⓒ 최용주 제공


트루비필은 "돌린저가 한국군 병사들의 말할 수 없는 만행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화가 나고 소름 끼쳤다"라며 "우리는 그로부터 필름을 받을 수 있어 기뻤다, 이 필름을 빼앗길까봐 한국에선 감히 사진을 뿌릴 수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5·18을 기록한) 서류와 필름을 받았을 때 우리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미국이나 한국의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라며 "그 결과 한국을 떠날 때 수색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헌지커는 당시 <커버트 액션>에 사진과 함께 실은 기고를 통해 "전두환은 군대와 경찰로 나라를 뒤엎었고 수천 명의 한국인을 감옥에 가뒀다"라며 "5월 18일 광주의 일부 용감한 시민과 학생은 탄압에 맞서 시위를 벌였다. 전두환은 공수부대를 광주로 보내 시민들을 죽였고, 더 많은 시민이 거리로 모여 군대에 맞서 저항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상하게도 카터 행정부는 (사회적 안정을 도모했다는) 전두환의 진술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미국의 전략적 관심사는 일본을 (공산권의) 완충지대로 삼는 것이었고, 때문에 (한국의 안정화를 통해) 일본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라며 미국의 책임도 거론했다.


트루비필은 같은 잡지에 중앙정보부를 분석하는 글을 썼는데, 이를 통해 "중앙정보부뿐만 아니라 경찰과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는 고문, 테러, 혼란과 불신 조장의 전술을 사용했다"라며 "칠레의 디나(DINA, 정보기관 겸 비밀경찰),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Gestapo, 비밀경찰)와 마찬가지로 교활하고 잔인한 조직"이라고 말했다. 이 잡지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같은 주로 정보기관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왔다.


그들은 왜 스웨덴으로?

 

▲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스톡홀름 언론을 통해 알린 캐롤린 트루비필. 팀 원버그와 데이비드 돌린저로부터 5.18 소식을 접한 그는 스티븐 클라크 헌지커와 함께 스웨덴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모두 평화봉사단 단원이다. ⓒ 캐롤린 트루비필 제공

 

두 사람은 왜 한참 떨어진 스웨덴의 스톡홀름까지 가게 됐을까? 사실 두 사람이 가장 먼저 간 곳은 일본이었다. 트루비필은 "우리는 편향되지 않은 신문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일본에서도 그런 신문은 찾을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라며 "우리는 또한 한·미 정부의 보복과 일본에서 우리를 억압하려는 시도를 두려워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강영규 주스웨덴대사가 박동진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대외비 문건에는 그들이 스웨덴에 도착해 여러 언론사를 다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AFP > 기사 대응조치'란 제목의 이 문건에는 "두 사람은 7월 15일 < UPI >, 7월 16일 <로이터>를 방문했으나 기사화하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다.


"우리는 스톡홀름으로 갔다. 스웨덴은 인권을 중시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곳이 안전할 거라고 느꼈다. 우리가 접촉한 스웨덴의 첫 인권운동가로부터 일간지 <다겐스 니히터(Dagens Nyeter)>를 소개받았다. 우리는 인터뷰보다 (언론사의) 취재를 원했지만 결국 인터뷰하기로 동의했고 7월 15일 보도됐다. 이후 <다겐스 니히터>를 손에 들고 우리는 스웨덴의 AP 지사로 갔다. 그들은 7월 20일에야 이 내용을 보도했는데, 그 이유는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전날 (지사로 와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기 때문이다."


특히 트루비필은 보도를 전후로 한·미 정부 관계자로부터 압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 정부의 억압적인 활동 때문에 (광주의) 이야기를 보도하도록 도왔다"라며 "(한국 정부는) 스웨덴 신문기자들을 한국에서 추방했고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전역으로 우리를 쫓아다녔다"라고 주장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의 헬기가 전일빌딩 앞에서 선회하는 모습. 현재 전일빌딩에는 당시 헬기 사격의 탄흔으로 조사(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된 자국들이 남아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특히 덴마크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외무부 대외비 문건에도 기록돼 있다. 다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현재로선 알기 어렵다. 7월 24일 임명진 주덴마크대사가 박동진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평화봉사단 회견'이란 제목의 문건에는 "단원 2명이 당지(덴마크)에 입국함으로써 (반한 교포 김○○에 의해) 회견이 주선된 것으로 판단. 김○○가 계속하여 독일, 프랑스 등 남부 유럽으로 안내해 동종의 회견을 주선할 것으로 예측되는 바 해당공관에 통보, 대처할 것을 건의함"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문건에서 거론한 회견은 헌지커와 트루비필이 진행한 것으로 이 내용이 7월 23일 덴마크 조간지 <악튜엘트(Aktuelt)>에 실렸다.


같은 날 역시 임 대사가 박 장관에게 보낸 '반한교포, 아국대표단 유인 시도'라는 제목의 3급비밀 문건에는 "반한 교포 김○○으로 추측되는 자가 7월 23일 12:00경 당시 유엔 여성회의 본회의장에 나타나 아국 대표를 유인 시도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이 발생함"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면서 임 대사는 "당관(주덴마크대사관)에서는 현재 김○○의 행방을 추적 중이며 파악되는대로 추보 위계(추가로 보고할 예정)임"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트루비필의 기억은 이와 다르다. 그는 "<다겐스 니히터> 편집장은 우리에게 한국의 인권운동가 김○○을 소개했고 그는 우리를 도왔다"라며 "그와 함께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의 다른 곳을 다니며 언론과 대화하고 인권운동가를 만났다. 동시에 우리를 쫓는 사람들을 피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는 우리를 덴마크 코펜하겐 국제여성회의에 데리고 가서 더 많은 인권운동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라며 "우리가 회의를 떠나려는데 우리 차에 한국 여자가 와서 김○○와 이야기를 나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린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스웨덴에 왔을 때 한 우익 신문이 '김○○가 회의장에서 그 여자를 납치하려고 했다'는 기사를 실었다"라며 "우리는 코펜하겐에서 내내 김○○와 함께 있었고 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이후 김○○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라고 떠올렸다.


또 "우리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우리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리지 않았다"라며 "그런데 미연방수사국(FBI)이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이 미국에 있는 부모님 집에 찾아와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몰랐고 매우 무서워했다"라고 덧붙였다.


국보위 보고사항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1980년 7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외무부 관계자의 수기 메모에 "국보위 보고사항"이란 문구가 담겨 있다. ⓒ 외교사료관

 

이들의 활동은 당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에게도 보고된 것으로 보인다. AFP 보도(7월 15일)와 AP 보도(7월 20일) 사이, 외무부 고위 관계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수기 메모에는 '국보위 보고사항'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제목은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광주사태 허위사실 유포'였다. 국보위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줄임말로, 전두환 등 신군부 강경파로 구성돼 이후 5공화국 독재의 발판이 됐다. 7월 25일에도 3급기밀 문서를 통해 최규하 대통령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다.


외무부는 7월 22일 해외공보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발표하며 스톡홀름발 기사를 강하게 비난했다. 당시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김용식 주미대사에게 보낸 '평화봉사단원의 광주사태 관련 발언'이란 제목의 대외비 문건에는 해당 성명이 영어로 첨부돼 있다.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폭동과 모든 사상자들에 대한 사실 판단을 위해 즉각적인 조치가 내려졌다. 철저한 조사 끝에 사망자 수는 174명으로 밝혀졌다"라며 "사태를 목격했다는 이들이 거짓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서울발 AP를 통해 기사화되기도 했다. 또 주미, 주일, 주캐나다, 주호주, 주뉴질랜드 대사관에 "(헌지커, 트루비필의 발언은) 광주사태 진상을 왜곡·과장한 것으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임을 표명토록" 지시하기도 했다.


같은 날 외무부는 '미 평화봉사단 관계관 회의'를 열었다. 이때부터 평화봉사단 입국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논의가 진행됐다. 참석자 명단엔 외무부 미주국장·북미담당관·조약1과장, 청와대 이수영 과장, 문교부 사회국제교육국 국제교육과장, 보사부 의정국 의정 1과장, 과기처 기술협력국 총괄과장, 문교부 외신과장이 적혀 있다.


이 자리에서 미주국장은 "평화봉사단의 현 운영실태를 점검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고 밝혔다. 이에 문교부 참석자가 "긍정적인 면이 컸던 것은 사실이나 필수적이며 크게 유익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고 본다"고 말하자, 보사부 참석자도 "정확한 평가는 어려우나 문교부 측 코멘트에 동감한다"라고 호응했다.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강박광 과학기술처 기술협력국장과 메이어(Mayer) 평화봉사단장이 1980년 7월 24일 면담한 것을 기록한 3급비밀 문서다. ⓒ 외교사료관

 

7월 24일 외무부 북미담당관이 과기처 기술협력국장에게 보낸 '전언통신문'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가 나와 있다. 북미담당관은 "그동안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의 봉사를 통해 성과를 거둔 것으로 사료하는 바, 이제 추가로 파견될 계획으로 있는 53명의 파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로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함"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강박광 과학기술처 기술협력국장은 메이어(Mayer) 평화봉사단장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면담했다. 이 내용이 담긴 3급기밀 문건에서 강 국장은 "우리의 의견은 최종 파견 분 (53명에) 대해 초청을 취소하는 편이 타당하다는 것인데 당신의 입장은 어떠한가"라고 말했다.


7월 25일 외무부장관실에선 박동진 외무부장관과 몬조(Monjo) 주한미대사관 대사대리가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박 장관은 "그들의 소행이 끼친 피해는 매우 크다고 생각되며 북괴의 허위선전에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 되고 있다"라고 불만을 강하게 표현했다. 이처럼 외무부는 7월 22~25일 차츰 직급을 높여가며 미국 측에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의 태도

 

▲  외교부 외교사료관으로부터 받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1980. 5. 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발언문제, 1980" 문건 중 일부. 사진은 대외비로 분류된 박동진 외무부장관과 몬조(Monjo) 주한미대관 대사대리의 면담요록 중 일부다. 박 장관이 "북괴의 허위선전에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라고 5.18의 진상을 외신에 제보한 평화봉사단 단원들을 비난하자, 몬조 대사대리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동조하고 있다. ⓒ 외교사료관

  

이 자리에서 몬조 대사대리 역시 박 장관과 비슷한 관점을 내보인다. 그는 "본인도 평화봉사단원 행동이 매우 무책임한 것으로 생각하며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라며 "(이는) 미국에 대해서도 크게 독을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관님의 도움으로 53명 평화봉사단원이 예정대로 한국에 도착한다면 메이어 단장이 재차 강경한 경고를 할 것임을 거듭 약속드린다"라며 "봉사대상국을 비방한 행위에 대해 매우 통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5·18 직후 미국 대사관을 찾아간 다른 평화봉사단의 증언을 들어보면, 몬조 대사대리의 이러한 태도는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돌린저는 "원버그와 함께 5월 30일 대사관을 찾아갔는데 (대사와의 만남을) 거절당했다"라며 "대사관 관계자는 '광주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있고 당신들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라고 말했다. 대사관 측은 두 사람이 광주에서 목격한 것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도 받지 않았다.


역시 광주에서 5·18을 목격한 평화봉사단원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도 대사관을 찾았다가 문전박대당한 경험이 있다. 그의 회고록 <푸른 눈의 증인>의 마지막 부분이다.


"우리는 건물 안으로 안내를 받아 대사대리 사무실로 향했다. (함께 간) 짐이 이미 약속을 해놓은 터였다.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확신했다. (중략) 우리는 대사대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추가 평화봉사단원 53명의 입국은 취소되지 않았다. 다만 평화봉사단 협정 종료가 1982년에서 1981년으로 앞당겨졌다. 또한 한국은 1982년부터 여러 차례 있었던 미국의 재협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외무부의 또 다른 문건에 담겨 있다. 'Peace Corps(미국 평화봉사단)의 활동재개 문제, 1981~1987'이라는 제목의 이 문건엔 비밀문서도 포함돼 있다. 문건에선 전두환 정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국가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의 후신)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 문건의 내용은 다음 기사에 이어진다. (관련기사 : [단독] "광주사태 때..." 미국 봉사단 막은 전두환 정권 막전막후 http://omn.kr/1nlyh)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①-1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http://omn.kr/1nj3g

①-2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http://omn.kr/1nj2u

② 광주 할머니와 약속 지킨 청년 http://omn.kr/1nk4l 

③ "전두환 부끄러워해야" http://omn.kr/1njqo

④ 미국인이 찍은 80년 5월 http://omn.kr/1nkf9

⑤ 택시운전사 류준열, 사실... http://omn.kr/1njxh


■ 이메일 인터뷰 번역

: 송재걸 (카디프대학 석사학위 논문 <The Gwangju Democratisation Movement and the Role of International News Flows> 저자)


덧붙이는 글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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