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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영웅 정걸 장군
조선 최고의 전술가 정걸, 팔순에 전쟁터를 휩쓸고 다니다.
2012.04.24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은 전투 중에 순사한 이순신이었다. 그의 충직한 참모는 좌(左) 정운, 우(右) 송희립 등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해군 최고의 장수들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 이들 말고도 임진란의 공적을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용맹한 장수가 있다.
 
정걸(丁傑 1514-1597) 장군. 그는 팔순에 가까운 나이로 해상에선 이순신을 도왔고 육지에선 권율을 도와 왜군을 물리친 최고의 전술전략가이면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꼭 필요한 전투에선 반드시 앞장서서 승전을 거둬내면서도 명예나 이익을 탐내지 않았다. 그림자 장군으로 불리는 정걸, 그만의 숨은 전쟁을 오늘 되살려 보자.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최고의 전사
 
명종 11년(1556년) 2월 27일 사간원에서 전라 우수사의 만행을 간하는 보고가 올라왔다.
 
“전라우도 수사 최호(崔豪)는 왜적이 몰래 초도(草島)에 정박하였을 때 적의 선봉을 보고는 지레 겁을 먹고 후퇴하여 피하고 진격하지 않았고, 남도포 만호(南桃浦萬戶) 정걸이 홀로 진격하여 힘껏 싸워서 전선(全船)의 왜적을 전부 잡았습니다. 그런데 최호가 공을 자기에게 돌려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므로 남방 사람들이 지금도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정걸이 왕조실록에 실질적으로 등장하여 조정의 주목을 받은 첫 순간이다. 정걸은 이 때 죽음을 겁내지 않고 적진에 홀로 뛰어들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는 1544년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 선전관, 서북면 병마만호를 지낸 뒤 을묘왜변 때 달량성(達梁城)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남도포(南桃浦) 만호가 되었으니 오로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그는 이순신을 만나기 전에는 부안현감을 거쳐,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여진 정벌과 국경 수비에 공을 세웠고 경상우도와 전라좌우도 수군절도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의 요직을 거침으로써 전술 전략의 최고 전문가로 자리매김 했다. 그리고 1591년 이미 그의 나이가 일흔일곱에 이르자 현직을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에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 받았다.
 
일흔이면 중앙정부에선 임금이 칠순이 된 조정 대신에게 궤장(지팡이와 의자)를 내리는 전통이 있었는데 정걸은 아무런 대접도 없이 백전노장으로 전장에서 적과 맞부딪쳐야 한 것이다.
 
이순신의 참모이자 스승이 되다.
 
그가 어떤 장수보다 돋보이는 장면은 조선 수군의 핵심 판옥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실어 실전에 활용할 수 있도록 연습시킨 점이다. 정걸은 당시 판옥선 11척과 정병 1,000명 이상의 실전 가능한 병력을 키워내 이순신을 도와주었다. 그가 있었기에 전라좌수영은 실전에 투입돼 승전을 거둘 수 있었고 이순신도 이름을 빛낼 수 있었다.
 
임진란이 일어나고 충청도, 전라도의 수비가 긴박해지면서 이순신은 여러 참모와 부장들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때였다. 이미 팔순에 가까운 노장 정걸은 사실 이순신 보다. 20년 앞서 수군절도사를 여러 번 했으며 육전과 수전에 달통한 최고의 전술가였다. 그러나 명분을 중시하던 당시로서는 자신보다 후배의 지휘를 받으려 들지 않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럼에도 정걸 장군은 이순신의 전술적 스승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나라를 지켜냈다. 물론 자신 보다 무려 31세나 연배인 정걸을 불러내 함께 첨전토록 한 이순신의 용병술도 대단한 것이었다. 백전노장과 해전경험 전무한 이순신의 만남. 그 실험적인 결과는 놀라운 대승으로 나타났다.
 
그는 1592년 5월 7일,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웠고 7월의 한산도 대첩에 이어, 9월 1일의 부산포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그와 함께 전투를 치룬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정걸은 80세의 나이에도 나라 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도 한산도의 진중에 머물렀다.”면서 “그에게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필시 감동 할 것이다.”라고 치하했다. 당시 왜군들은 정걸 장군이 전선의 갑판을 궁(弓)자형으로 만들고 철로 만든 불화살과 큰 대포 등을 만들어 공격하자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놀라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권율을 도와 행주대첩 승리에 기여하다.
 
정걸은 이후 조정의 공훈을 탐하지 않고 또다시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1593년 2월 행주전투에 뛰어든다. 그는 평양에서 퇴각한 왜군 3만여 명의 병력과 권율 장군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병력이 서로 밀고 밀리면서 혈전 속에 들어가 있었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록은 이렇게 그 당시를 기록했다.
 
“그 날 묘시부터 신시에 이르기 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함을 구해주었다.”
 
그가 배를 몰고 달려가 화살을 공급해 주지 않았다면 권율은 패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걸 장군은 1595년에 모든 관직에서 퇴임하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다음 해 2월 이순신도 노량해전에서 순국하니 조선은 명장 두 사람이 나란히 세상을 등지는 큰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걸의 아들 정연과 손자 정흥록도 정유재란 때 목숨을 잃어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3대가 순절하는 투혼으로 조정과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이름은 지금까지 길이 전해오나 그를 도운 정걸의 이름은 거의 잊혔고 그를 기리는 이들도 없으니 애석한 일이 아닌가.
 
역사는 재해석 되어야 한다. 정걸 장군의 이름도 재평가 되어야 한다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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