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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리포진:
전라 우수영" 글에서 "5. 가리포진 명장 배출" 중 "2) 전라우수사 이억기"만 퍼왔습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李億祺, 1561~1597]

이억기 장군(1561.7.24 ∼ 1597.7.16)은 1561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수(景受)이다. 아버지는 심주군(沁洲君) 연손(連孫)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하여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그 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가리포첨사를 거처 21세 때 경흥부사(慶興府使)를 역임하였는데 이는 당시에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북방의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 남하하자 전투가 벌어졌고 이들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26세 때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임명되었다. 1587년 여진족이 경흥 부근으로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자, 당시 경흥부사였던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이 체포되어 간다.

이억기는 이들을 변호하였으며 이때 이순신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이억기는 제47대 가리포 첨사를 역임하였던 사람이다. 가리포 첨사를 역임하고 경흥부사로 전출된다. 

가리포첨사 당시 나이가 19세 2년을 근무하고 경흥부사로 전출된다. 이억기는 왕손이다. 따라서 출세가 빠른 편이다. 너무 빠르다 하여 조정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는 나이와는 상관없다.

1591년(선조 24) 32세 때 순천부사를 거처 이듬해 임진전쟁이 발발하여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이억기 장군은 33세에 전라우수사가 된 셈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등과 합세하여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했다.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 좌·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가리포와 진도의 전투준비를 돕는다.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고 기동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한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자 조정대신들에게 그의 무죄를 극구 변론하기도 했다.

장군은 임란 초기를 제외하고는 임진왜란 주요 해전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연합함대의 주력으로서 큰 전공을 세웠다.

삼도의 모든 수군 장수들이 중도에 교체되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교체되지 않고 무려 6년 동안 전라우수사의 직무를 수행하여 큰 전공을 세운 명장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통제사 원균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명령을 받고 부산의 왜적을 공격하였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자, 패전한 장수로서 깨끗한 죽음을 택하기로 결정, 스스로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이때 나이가 36세이다.

이 해전에서 이억기의 휘하에 가리포첨사 이응표가 같이 출전하여 이억기 장군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억기장군이 포위되는 것을 보고 이응표는 전선을 빠져나와 살아남고 이억기는 전사하는 참변을 당한다,

이응표가 죽음을 각오한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면 전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 하여 후에 조정에서 논쟁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응표가 파직을 당하는 사건이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이억기 장군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여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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