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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리포진:
전라 우수영" 글에서 "5. 가리포진 명장 배출" 중 "4) 이순신과 함께한 이영남 첨사"만 퍼왔습니다.

이순신과 함께한 이영남 첨사 [李英男, 1563~1598] 

이영남은 정유재란에 이순신과 같은 시간에 전사한 이순신을 보좌 하였던 조방장이다. 자는 호(豪)이다, 충청도 진천 사람으로 중종조 예조정랑을 지낸 창수의 증손이며 판결사에 증직된 익충의 손자이다. 

 
1571년에 태어나 어려서 부터 문필과 무용이 뛰어나 가문의 자랑으로 삼았다 한다. 18세(1588)에 무과에 올랐고 20세(1590)에 율포만호, 다음해(1591)에 가덕 첨사로 옮겼다.

임진년(1592)에는 왜구가 침입한다. 마침 한양에 볼 일이 있어 체류하던 기간에 임금이 의주로 몽진하게 됨에 어가(御駕)를 호종하게 된다. 이영남은 선조 임금에 고 한다 “지금 남해가 위급하니 한 몸이라도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지키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허락하여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임금의 승낙을 받고 가덕도를 찾았으나 때는 이미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원균의 막하에서 병기 일을 하게 된다. 원균의 지휘 하에 있으면서 이영남은 못 볼 것을 본다. 원균은 적 함선을 보자 미리 겁을 먹고 백 여척의 우리군선과 만여 명의 병력을 해산시킨다. 일국의 장수가 어찌 이리 판단력이 없는가? 이영남이 안타까워 한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고 전선 백여 척 및 화포 병기를 바다에 침몰시키고 수하 비장 이영남, 이운룡 등를 거느리고 네 척의 배를 타고 곤양 해구에서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려고 하니 우리수군 만여 명이 뿔뿔이 흩어져 수습할 수 없었다.

이영남은 원균에게 이렇게 간한다.

공께서 왕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가 후일 조정에서 죄로 다스린다면 어떻게 해명하시겠습니까? 전라도에 병사를 요청하여 적과 한번 싸우는 것만 못하니 이기지 못한 뒤에 도망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재조번방지초)

이는 난중일기에 빠져 있는 부분으로 신경(申炅:1613 ~1653)이 지은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 에서 초록한 것이다.(난중일기 임진년 4월23일에서 30일의 기록은 없다. 이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어찌하여 싸움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백 여척의 군선과 장비를 수장시키며 만여 명의 군졸을 해산시키고, 장비도 없고 군졸도 없는데 어찌 장수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원균에 대한 질책이다.

그 장비와 군졸로 싸워나보고 도망하여도 늦지 않을 것을, 자신의 판단을 원균에게 전달하면서 전라도에 구원을 요청할 것을 원균에 간한다. 

당시 경상우수사에 배치되어 있던 군선과 장비는 전라좌수의 배가 넘었다. 전선 백 여척 및 화포를 바다에 수장시킨 것이다. 이순신은 5월 4일 전라좌수사 전군을 동원하여 출전하였던 군선의 규모가 40척과 원균의 군선 4척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대승을 거두고 6월4일 고성의 고둔포에서 전라우수 이억기가 이끄는 군선 25척과 합류한다. 따라서 전라도에서 지원하여 싸운 군선의 규모는 70여척 즉 원균이 수장한 군선의 규모보다 작다. 그 때 원균이 우리 군선을 수장시키지 않았다면 우리의 전력은 더 빨리 남해를 장악하였을 것이다. 이는 먼저 이영남이 가슴 아파 하였던 대목이다.

이영남은 바로 이순신 진영으로 구원요청을 떠난다.

이순신 진영에 들린 이영남은 경상우수군을 도와 전쟁을 수행하도록 강력히 요청한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도 없고 도가 다르기 때문에 전라좌수 단독으로는 출전할 수 없다하여 거절당한다. 이영남은 며칠을 성문밖에서 울며 호소하나 이순신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경상우수사로 돌아가고 다시 오기를 오 륙 차례 그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통곡하였다.

이영남은 단독으로 전라우수를 방문하여 “전라좌수는 이미 출전준비가 되어 있으니 전라우수에서 출전만 하면 연합전선을 구축 할 수 있다”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간청하였으나 우수사 이억기의 입장은 아직 “출전준비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이다.

이를 짠하게 여긴 전라좌수 녹도만호 정운은 5월 3일 이순신과 단독면담을 한다. “약속하였던 전라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잃는다면 뒤늦게 후해해도 소용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순신은 전라좌수병력 단독으로 출전할 것을 결정한다.

그날 저녁 중위장을 불려 내일 새벽에 출전할 것을 지시 한다.( 재조번방지초에서)

이순신이 이영남의 요청을 받고 늦게 출전한 것은 전라우수사가 같이 출전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오지 않고 있어 전라우수 병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영남의 간곡한 요청 때문에 우수사 병력이 합세하지 않았는데도 출전을 명령한다. 전라우수병력은 한 달 후 고성에서 합류한다. 

남해를 지키고 나라를 구한데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 이영남은 널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이 때 이순신과의 인연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 까지 이순신 다음가는 전쟁의 공훈자 이다. 

이때부터 이순신과 이영남은 부자의 정을 쌓아간다. 이순신과 이영남의 나이 차이는 26세, 이영남은 이순신을 아버지 같이 모시고 이순신은 영남을 아들같이 대한다.

이영남은 원균의 휘하에서 휴가를 받아 이순신 진영에서 장군과 같이 숙식을 하면서 4일 동안이나 쉬어가는 경우도 있었다.(남중일기 1596년 5월 7일-12일)

이영남과 좋아하는 여인이 이순신을 찾아와 하는 이야기이다.(1596년 정월 초7일)

“ 아침 일찍 이영남과 좋아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權淑)이 집적거리기 때문에 피해서 왔는데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하였다.”

이처럼 이영남의 여인까지 의탁하는 사이였다는 것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영남과 이순신은 가족처럼 살아가면서 전쟁에서도 부자의 정을 이어간다. 이순신은 그 때부터 영남을 가까이 두고 살았다.

이영남은 1597년 가리포첨사 제56대로 임명되어 삼도수군통제사 조방장 까지 겸임한다. 이는 이순신이 고금도로 진을 옮기면서 가리포진을 위주로 한 작전 전략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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