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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臺子山城
李曉鍾
Ⅰ. 머리말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은 심양시에서 동북쪽으로 약 35㎞ 떨어진 휘산 풍치지구(輝山風景區) 안에 있는 기반산(棋盤山) 저수지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장백산의 여맥(餘 )인 합달산(哈達山)산맥 휘산(輝山)의 구릉에 속한다. 이 산성은 1987년 문화재 재조사 때 발견되었고, 산성의 모양새, 구조, 역사시대와 문화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1990년이래 심양시 문물고고공작대(文物考古工作隊)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 시굴, 과학적 발굴을 하였다.
1990년 가을과 1991년 초여름 이 산성을 시굴하였는데 시굴면적은 160㎥였다. 집터(房址) 한 채, 돌로 쌓은 부엌터(石 址) 1곳, 잿구덩이(灰坑) 20개를 발견 정리하였는데 약간의 춘추전국시대 유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구려 시기의 역사문화 특징을 가진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었다. 동시에 산성의 형태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조사를 하였다. 이 시굴을 통해 석대자산성의 기본 형태, 문화적 성격에 대한 기본 인식을 갖게 되었고, 고구려 시기의 산성에 대한 기본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고구려 역사와 고고학 연구를 위해 새로운 산성과 고고 자료를 추가하게 되었다.
1997년 5월부터 11월까지 이 산성에 대한 첫 발굴을 하여 산성의 건축형태, 구조, 축성방식을 확인하고, 문터, 치의 형식을 알아냈다. 이 발굴에서는 처음 시굴했던 지점 북쪽에 모두 10×10㎡ 짜리 피트 15개를 팠다. 이와 함께 성벽을 따라 바깥쪽을 2m 너비로 전면적인 발굴을 하였다. 또 중요한 지점을 찾아 2×4m짜리 트렌치 2개, 2×8m짜리 트렌치 3개, 2×16m짜리 트렌치 1개를 팠다. 이렇게 하여 산성이 산세를 따라 쌓았고 평면은 불규칙적인 세모꼴이며 둘레는 1384.1m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성벽은 모두 돌로 쌓았고 석재의 규격과 구조도 매우 규칙적이다. 동, 서, 남, 북에 4개의 문이 있고, 성벽 바깥쪽에 특이하게 생긴 치가 설치되어 있는데 크고 작은 것 합쳐 모두 10개이다. 성안에서 성밖으로 통하는 배수로(涵洞)를 세 곳 발견하였다. 북문터 안쪽에서 나온 문, 문지도리(門樞), 계단식으로 붙어있는 주춧돌 같은 것은 모두 고구려 발굴사에서는 아주 드문 것이다. 이 발굴에서 우리는 석대자산성의 건축형태와 구조를 완전히 알게 되었고, 이 산성이 군사방어기능을 완벽하게 갖추었으며, 성안 지세가 꽤 평탄해 일정한 수의 군사와 주민이 살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많은 양의 생활유물, 방터, 잿구덩이 같은 유적, 질그릇 철기 같은 것들이 이 점을 충분하게 증명해 준다. 동시에 고구려 산성의 축성방식과 방법 같은 문제도 알게 되었다.
1998년 4월부터 10월까지 산성 문터의 형식, 수구와 배수시설, 저수지 같은 산성 시설에 관한 상황을 확인하였다. 1차 발굴을 바탕으로 산성에 대한 2차 발굴을 실시하여 남문, 동문, 북문터의 문길 안팎을 발굴하여 문길 아래를 통해 문 밖으로 이어지는 배수시설이 뺄도랑(排水溝), 깊은 우물( 井), 겉도랑(明渠) 같을 것으로 구성된 완전한 배수계통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문길 윗부분에서는 산성 성문이 타서 무너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산성 공격전의 상황이 재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산성의 성문 구조를 과학적으로 복원하는데 진귀한 고고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동시에 북문터에서 이 문이 두 번 쌓았고 두 번 화공을 당한 유적이 겹쳐있는 현상을 발견했고, 산성 안 저수지의 구체적인 위치도 알아냈다. 이 발굴에서 석대자산성을 쌓기 시작할 때 이미 완전한 설계와 계획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출토된 유물과 유적의 현상을 바탕으로 같은 해 7월과 8월, 산성 남문과 부근에 남문, 8호와 9호 치, 성벽 일부를 복원하여 고구려 때 석대자산성의 원래 모습을 재현하였다.
2000년 4월에서 10월 말까지 실시한 3차 발굴에서는 북문터의 겹쳐진 상태, 저수지의 형식·구조·용량을 확인하고 성안의 주요 거주지와 관청터로 보이는 집터의 위치를 해결하기 위해 800㎡ 남짓 발굴하였다. 이 발굴에서는 서북문터에서 조기와 만기, 두 시기에 쌓은 문터의 상황이 확인되었는데, 조기의 문길(門道)이 만기 문길보다 더 깊고 좁으며 간단하다. 만기에 쌓은 문길은 조기에 쌓은 문길 위에 겹쳐 있는데 조기 문길의 바닥은 돌로 포장이 되어 있고, 1차 화공을 당했을 때 이미 불에 타 없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불탈 때의 온도가 나중에 탈 때보다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길바닥을 깐 돌 겉이 불을 맞아 붉은 가루가 드러나 있다. 이미 조사 발견한 주거지, 잿구덩이의 형식과 구조, 상호간의 관계, 유물의 형식분석연구 결과 같은 진일보한 과학적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산성의 발굴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많은 의문이 남아있어 더 깊이 있는 탐구와 연구를 기대하고 있다.
여기서는 산성의 형태, 축성법, 배수시설, 문터의 구조, 군사방어의 성능, 기본적 문화특징 같은 문제들을 보기로 한다.
Ⅱ. 산성의 형태
석대자산성은 산의 자연적인 형세를 충분히 이용하여 쌓았다. 산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산성 동쪽과 남쪽은 포하(蒲河) 계곡에 닿아 있다. 산성 바깥쪽 서·북쪽은 모두 계곡이며 서북 봉우리와 북쪽의 대양십산(大洋什山)은 산등성이로 서로 이어져 있다. 대양십산은 병풍을 두른 듯 산성 서북쪽에 우뚝 서 있다. 서쪽 계곡은 제법 넓고 깊어 현지에서는 구도구(九道溝)라고 부르고, 북쪽 계곡은 좁고 얕은 편인데 십도구(十道溝)라고 부른다. 산성은 구도구와 십도구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온 산이 자연스럽게 감싸고 있고 그 안에 산성은 홀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산성 안 서남쪽과 서북쪽에 있는 두 산이 마주 보고 있는 형세인데 해발 163∼166m이다. 서북 봉우리가 약간 높고, 두 봉우리 사이 서쪽을 따라 '산등'으로 서로 이어져 있고 이 산등에다 성을 쌓았는데 남북이 직선을 이룬다. 가장 낮은 오목한 곳에 문이 하나 있는데 서문 또는 서남문이라고 부른다. 이 문에서 동쪽으로 낮은 골짜기가 있는데 골짜기가 약간 동남쪽으로 기울어 있다. 두 봉우리 사이 골짜기에 차단벽( )를 쌓고 골짜기 입구 안쪽에 동문을 쌓았다. 산성 동남쪽에 툭 튀어나온 절벽을 보통 '바위절벽(石砬子)'라고 일컫는데 상대고도 27m이다. 바위절벽 서쪽은 포하로 이어지는데 남문을 설치하였다. 동북쪽은 산세가 급하다. 경사가 75°인 동쪽에는 인공으로 성벽을 쌓고 북쪽 낮은 오목한 곳에 북문(혹은 서북문)을 설치하였다. 서쪽 골짜기는 꽤 완만해 수레와 말이 다니는 길이 될 수 있다. 현재 차도가 있어 바로 서문에 다다를 수 있다. 나머지 3개의 성문 지세는 험준하여 사람은 간신히 드나들 수 있지만 차는 갈 수가 없다. 서문은 산성의 중요한 성문이다.
산성은 이러한 모든 자연지세를 잘 활용하여 산등 바깥쪽을 따라 성벽을 쌓았으며 골짜기 입구나 낮고 오목한 곳에는 문과 배수시설을 설치하였다. 산세가 좀 완만하고 요긴한 목에는 치를 쌓고, 성안의 평평하고 완만한 남북 대지에는 주거지와 창고를 세웠으며, 성안 남쪽 봉우리 가장 높은 곳에는 망대를 쌓는 등 완벽한 주거와 방위를 구성하였으니 수많은 고구려 산성 가운데 또 하나의 산성건축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그림 1).
Ⅲ. 산성의 구조
산성의 성벽은 전부 석재로 되어 있으며 벽체 바닥의 너비는 6∼7m이고 단면은 사다리꼴이며 현재 가장 높이 남아있는 성벽은 4.2m이다. 성벽 안팎을 들여쌓기를 했는데 일반적으로 1m에 0.05∼0.08m씩 들여쌓았다. 성벽 안에 설치한 보호벽 유적과 성벽 안팎 높이의 차를 분석해 보면 몸체 외벽의 본디 높이는 일반적으로 6∼7m이고 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은 동문 북쪽 에 있는 한 단으로 약 11m 안팎이 된다. 성벽 둘레는 치 부분을 합쳐 1384.1m이다.
축성용 석재는 원래 현지의 석회암과 사암을 캐서 썼지만 포하 상류에서 현무암도 캐다 썼다. 현무암 광맥은 주위 100리(50㎞) 안에 있으며, 석대자산성에서 35㎞밖에 안 되는 철령시 횡도하자향 무가구촌(鐵嶺市 橫道河子鄕 武家溝村) 북쪽 산꼭대기에 이러한 석재가 있는데 현지에 가서 직접 조사해 본 결과 이곳에서 발견된 현무암 석재와 석대자산성에서 사용한 현무암 석재가 똑 같은 것으로 보아 석대자산성에서 사용한 현무암 계통 석재는 여기서 캤을 것이다. 겨울에 포하 수면이 얼었을 때 산성 있는 곳까지 옮기면 물길을 따라 내려왔을 것이니 아주 편리했을 것이다.
산성을 쌓는데 사용한 석제의 모양새는 돌을 쪼개고, 두드리고, 갈고 쪼아 기본 모양을 가공하는데 쐐기꼴돌(楔形石), 북꼴돌( 形石), 긴네모꼴돌(長方形條石), 네모꼴돌(方整石), ㄱ자꼴돌(曲尺形石), 양쪽에 홈이 파인돌(雙槽形石)이 있고, 약간만 가공한 큰 석판, 끼움돌(支塾石) 같은 것들이 있다.
쐐기꼴돌(楔形石) : 성벽 안팎의 겉쌓기에 많이 사용하였다. 정면은 대부분 긴네모꼴이고 표면을 약간 볼록하게 하였으며, 뒷부분은 길고 뾰족하다. 사용한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대, 중, 소 규격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큰 것은 기초부분에 썼다. 치의 기초부분에 쓴 것이 특별히 큰데 전면은 대부분 60×80㎝이고 길이 60㎝ 이상이다. 중형은 겉쌓기에 많이 썼는데 대부분 정면의 너비 30∼50㎝, 두께 20∼35㎝, 길이 45∼50㎝이다. 소형은 대부분 문길 양옆 담이나 중형석재 사이 이음새에 끼워 넣었는데 정면 20×30㎝, 길이 40∼50㎝짜리가 많다. 형식에 따라 비례를 보면 대형과 소형의 성돌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너비 3, 두께 2, 길이 4이다.
북꼴돌( 形石) : 담벼락(墻體) 속돌로 쓰이는데 '랍결석(拉結石)이라고도 부른다. 생김새는 겉쌓기에 사용한 쐐기꼴돌의 규격에 따라 정해진다. 겉에 쌓은 두 개의 쐐기꼴돌 틈새에 끼워 쌓는데 일반적으로 길이 50∼60㎝이고, 너비, 두께, 끝은 겉쌓기한 성돌과 맞추는데 가공할 때는 비교적 규격을 맞추어 만든다. 담벼락 가운데나 뒤쪽에 쓰는 것은 약간만 가공하는데 보통 50㎝ 안팎이다.
긴네모꼴돌(長方形條石) : 규격이 꽤 크고 기초부분과 배수구 내벽에 많이 썼다. 길이 1m, 너비 0.5m, 두께 0.3m짜리가 많고 그 보다 크거나 작은 것도 있다.
네모꼴돌(方整石) : 모두 현무암으로 만들었는데 표면을 쪼아 평평하게 만든 것도 있다. 문길 안이나 담벼락 모서리, 치의 모서리와 같이 모서리 진 곳에 썼다. 보통 규격은 50×40×20인데 아래쪽은 더 큰 것을 쓰고 위쪽은 더 작은 것을 썼다.
ㄱ자꼴돌(曲尺形石) : 특정한 조건에서만 사용한 석재로 안으로 모서리가 진 곳에 썼다. 평면을 사용하여 ㄱ자꼴돌 두 개의 안각(內角)을 서로 마주보게 하고 담벼락 안쪽에 있는 석재의 양쪽 장부와 서로 물리도록 맞춘다. 이렇게 해서 평행을 이루면 쌓은 부분이 단단해지고 바깥쪽 튀어나온 쪽과 이어지는 벽이 견고해진다. 벽면 줄을 바꿀 때 ㄱ자꼴돌을 세워서 놓으면 성돌 한 줄의 맨 끝이 이 구부러진 돌을 따라 두 줄의 돌담으로 바뀐다. 벽면을 쌓은 성돌이 평행을 이루게 되면 산세가 오르내려 생긴 파동성이 줄어들고 담벽락의 입체와 평면의 안정성이 늘어난다.
양쪽에 홈이 파인돌(雙槽形石) : 모두 현무암을 쪼아 만들었는데 평면은 긴네모꼴인데 허리부분이 잘록한 긴네모꼴이다. 단면은 반활꼴, 사다리꼴, 긴네모꼴인데 양쪽 끝은 모두 평평하고 납작하다. 양쪽 윗면을 파내 오목한 홈을 만들었는데 너비 4∼6㎝, 깊이 4㎝, 길이 9∼13㎝이다. 이렇게 생긴 석재는 지금까지 발견된 수많은 고구려 산성과 관계된 자료 가운데 아직 그 예를 찾아보지 못했다. 이 돌은 석축 건축물의 가장 윗면에 올려놓아 양쪽의 오목한 홈이 서로 맞부딪치도록 했을 것이다. 그 모양새를 보면 바닥은 평평하고 표면에 오목한 홈이 있는데 형식상 여러 가지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담벼락 꼭대기에서 외에는 사용할 곳이 없다. 우리는 성가퀴(女墻)의 위쪽, 즉 '봉정석(封頂石)'일 것으로 본다. 양쪽에 홈이 파인 돌 두 개가 맞부딪치는 곳을 나무 같은 것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돌로 만든 장부구멍에 나무로 만든 장부를 끼워 양쪽을 하나로 만들어 성가퀴에 쌓은 돌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고 성벽을 튼튼하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있다.
끼움돌(支塾石) : 성벽을 쌓는 데 쓰는 또 하나의 기본 재료이며, 또한 중요한 재료이다. 성벽을 쌓을 때 쓰는 석재는 모두 거친 땅에 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돌조각을 끼워 조정하게 된다. 성벽의 벽면을 기우러지게 들여쌓기를 할 때 끼움돌을 가지고 조정하여 각도와 끼울 위치를 해결하는 것이다. (속쌓기 하는) 랍결석(拉結石)과 껕쌓기돌 간의 상호 안정과 연결각도는 모두 끼움돌을 가지고 결정하기 때문에 겉쌓기하는 성돌 마다 밑에는 끼움돌이 하나씩 있게 된다. 성벽 전체의 견고성을 유지하는데 끼움돌이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한다. 이 돌은 껕쌓기 돌과 속을 쌓는 북꼴돌을 만들 때 떨어져 나오는 좀 큰 돌들을 가지고 만든다.
성벽의 구조와 축성법을 이해하기 위해 성벽을 가로지르는 4개의 트렌치를 넣어 산세와 지질조건에 따라 축성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냈다. 기초를 만드는 데는 구덩이식 기초와 착암식 기초를 채용하였다.
구덩이식기초(槽式基礎) : 산 표면에 쌓인 흙을 바닥의 바위가 나올 때까지 파내는 것인데 구덩이 깊이 0.4m, 담벼락 너비 0.2m이다.
착암기초법(鑿巖基礎法) : 암석 표면을 직접 뚫어 평면을 만들고 그 위에 기초 석재를 쌓는 방법인데 주로 산세가 험준한 땅에 많이 썼다. 바깥 성벽 기초 바닥은 모두 안벽 기초의 수평선보다 낮아 비스듬한 비탈이 생겨 높이에서 차이가 나게 된다. 성벽을 쌓는 위치가 다르고 높이 차이도 꽤 크다. 예를 들면 북벽의 북문 근처의 한 단은 성벽 안팎의 바닥 높이 차가 0.6m나 되고, 동남쪽 절벽 부분은 차가 3.5m나 되었다. 모두 돌에돌쌓기(依石 石), 절벽쌓기(包 崖石) 방법을 채용하여 절벽 위에 완전한 석축 성벽이 이어지도록 하였다.
벽체 쌓는 방법 : 벽체 겉을 병봉법( 縫法) 착봉법(錯縫法)으로 쌓았다. 벽체 속은 북꼴돌( 形石, 拉結石)을 가지고 틈을 메우고, 잔돌(碎石)을 채워 성벽을 튼튼하게 하였다. 한 층을 쌓을 때마다 구조를 가로줄 '돌그물(石網)'과 상하층간의 세로줄 돌그물이 서로 엇갈리게 포개져 누르기 때문에 압력이 균형을 이루어 아주 견고하다. 소위 '간삽석(干揷石)'벽이란 겉쌓기 돌이 떨어져 나가도 속쌓기한 돌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 것인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며 축석역학적(築石力學的)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겉쌓기한 돌 4개가 모두 서로 물리는 것을 우리는 '병봉법'이라고 일컫는다. 겉쌓기를 병봉법으로 쌓는 공법은 이 산성 축성법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높은 수준의 석재건축공법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높은 공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쌓기 전 필요한 벽면의 돌을 계산해 낼 수 있는 통일된 촌척(寸尺) 규격이 있어야 한다. 가공이 안된 재료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벽체 표면의 석재에 알맞은 기본형태로 다듬고, 겉쌓기돌 정면의 4변 둘레는 손질하지 않은 채 건축현장으로 옮겨 가장자리와 가장자리 맞도록 끊임없이 손을 대야 한다. 삼각형 2개의 평면대각 2개가 거의 일직선으로 서로 맞물리도록 가장자리를 조금씩 쪼아 가야지만 겉쌓기 돌의 병봉( 縫)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돌과 돌 사이의 틈을 최소화해야 하고, 가장 빠른 속도로 완성해야 하지만 안정성이 있고 견고해야 하며, 또 아름답게 쌓는 공법이 요구된다.
벽체 바깥의 원래 지표층에서 2∼5㎝ 두께의 부서진 돌찌거기들이 쌓여 있는 곳이 발견되었으나 축성용 석재가 흩어져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벽체는 쌓는 도중 석재 가장자리를 다듬어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쪽 성벽 한쪽에 사람 힘으로 뒤채움을 한 보호벽이 있다. 뒤채움하는데 쓰인 토질이 다르고, 불에 탄 흙, 재가 섞인 흙, 깨진 돌 같은 층들이 아주 분명하다는 것은 벽체를 쌓을 때 성벽 안쪽에서 석재를 운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벽을 계속 쌓아가며 안벽 비탈길의 흙을 계속 높인 것이나, 또 비탈길의 길이를 감안해 보면 성벽은 안쪽부터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Ⅳ. 산성 안의 시설
산성은 넓고 웅장하고 견고한 성벽을 쌓는 것 외에도 완비된 군사방어, 배수시설, 저수지 같은 시설을 구축한다.
산성 바깥쪽을 따라 서·남·북쪽에 9개의 치를 설치하였다. 성 동쪽에는 안으로 굽어진 오목한 골짜기 입구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두 곳에 안으로 굽어드는 성벽을 쌓았다. 한 곳은 동문 남쪽인데 성벽이 안쪽으로 바로 꺾어 10.4m, 북쪽으로 꺾어 5.4m 가면 바로 동문이 된다. 또 한 군데는 동벽 북쪽이다. 이처럼 안으로 구부러진 성벽은 산세를 따라 성벽을 쌓을 수 있고, 한 방면의 방위능력을 증가시키고, 동시에 치의 작용도 하게 된다.
치는 지형지세에 때라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한 가지는 계단식 굽도리가 있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좀 더 넓고 크며, 다른 한 종류는 계단이 없는 것인데 상대적으로 작다. 계단식 굽도리는 치 벽체보다 보통 1m 안팎이 더 넓다. 치는 특수한 10호 치를 빼놓고는 대부분 길이와 너비가 7∼8m 안팎이다. 10호 치는 산성 동벽 북쪽에 있는데 가장자리 길이가 3.5∼4m이며, 수축 형식은 성벽 바깥쪽 벽체에 붙여 쌓았다. 나머지 9개는 모두 성벽과 맞물려 쌓았는데 곱자꼴(曲尺形) 석재를 써서 접속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9개의 치는 산성을 따라 서, 남, 북쪽에 흩어져 있는데 간격은 먼 것은 73.8m, 가까운 것은 48m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다. 산성 동쪽은 절벽 때문에 산세가 험하고 안으로 굽어드는 성벽이 수비를 맡아 완전한 산성 방어체계를 갖추었는데, 서북 양측 골짜기는 좀 평평하고 완만하여 자연형세가 불리하기 때문에 치를 가지고 효과적으로 해결하였다.
성문은 모두 4군데 설치하였는데 형태는 거의 같다. 문길은 너비 4.2m, 들어가는 깊이 6.2m인데, 동문만 들어가는 깊이가 7.2m인 것은 동문 부근의 성벽이 높고 기초가 깊고 넓은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문길 양측 담의 하부에는 밖으로 튀어나오게 계단을 쌓았는데 땅마룻대(地 )와 벽기둥일 것이다. 너비 약 30㎝ 높이 50㎝이다. 문길 안쪽 외성벽 한쪽 약 1.4m 되는 곳에 긴네모꼴 문주춧돌(門枕石)이 계단벽에 기대어 깊이 묻혀 있었다. 문주춧돌의 생김새는 문짝주춧돌(門柱礎)과 문설주의 장부가 들어갈 장붓구멍(門樞)이 있는 주춧돌 두 개가 계단식으로 한꺼번에 이어져 있다. 문설주주춧돌은 네모꼴이고 윗면에 네모난 오목한 기둥의 장부구멍이 있다. 문짝기둥의 장부가 들어갈 구멍이 있는 부분은 네모났고 무쇠로 된 장붓쇠(樞碗)를 박았으며 겉은 네모나고 가운데 오목한 원이 있다.
남문, 동문, 북문 문길에서 발견한 유적과 유물은 아주 진귀한 것이다. 출토된 무쇠(鑄鐵)로 만든 장부쇠(門戶)와 대문 문유(門柚, 軸?)의 윗 유(上柚?)에 아직도 드러나 있는 덥게 장식의 상태, 쇠로 만든 테( 帶), 쇠리벳(鐵 釘)과 발견 당시 아직도 원 상태대로 문길 위에 남아있는 탄화된 나무 문틀(門邊), 문짝의 널(門板), 많은 목탄 퇴적층, 타서 붉게 된 문길의 성돌 같은 유적처럼 1300 수년 이전 불탄 문의 가장 원시적인 현장이 보존되어 있다. 보존되어 온 성문의 유물, 문터 같은 유적은 고구려 발굴사에서 보기 힘든 완전한 성문의 구조, 재질, 형태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배수시설은 성내 뺄도랑(排水渠) 배수로(涵洞) 겉도랑(明渠)으로 짜여 있다. 전용 배수로는 한 곳만 발견하였다.
배수로(涵) 2 : 남벽 끝 동쪽 밑에 있다. 배수로의 너비 98㎝, 높이 86㎝, 배수로의 벽은 꽤 큰 현무암 돌(條石)과 쐐기꼴돌로 쌓았고, 바닥은 불규칙적인 판석을 깔았으며, 위 덮게 판석 두 층이 꼭대기를 받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깊이는 7.3m이고 성 안쪽 배수시설에 대한 상황은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남문, 동문, 북문, 3개의 문길 아래쪽에서 모두 배수로를 발견하였는데 서로 다른 형식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문 아래 있는 배수로는 문길 안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들어오는데, 앞부분 끝의 내부 상태는 아직 발굴을 하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두 벽은 돌로 쌓았고 바닥은 여러모꼴(多邊形) 석재를 평평하게 깔았다. 배수로 위 덮게는 석판으로 덮었는데 석판 윗면이 바로 문길 길바닥이 된다. 알려진 배수로의 길이는 8m, 너비 0.68m, 높이 0.38m이고, S자꼴이다. 동북에서 서남으로 흐르는데 문길벽의 서쪽 아래로 흘러나가 자연스럽게 산세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동문 배수로는 물막이담( 水墻), 뺄도랑(排水溝), 모래 거르는 도랑(濾沙池), 깊은 우물( 井), 배수로(涵洞), 겉도랑(明渠)으로 짜여 있다. 동문 안 서부 남쪽에 뺄도랑이 하나 있는데 배수로 1이 된다. 바닥 암반 위에 뚫기 시작하였는데 도랑 너비 1.2m, 깊이 0.5∼0.8m이다. 남벽을 쌓아올릴 때 돌로 물막이벽( 水墻)을 만들었는데 도랑의 단면이 V자 꼴이다. 7.5m를 발굴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였고, 문안 동쪽에 이르면 자연 산돌과 성돌을 이용하여 모래를 거르는 도랑을 만들었는데, 도랑 평면은 불규칙한 꼴로 길이 2m, 너비 1m, 깊이 0.8m이다. 안에는 자갈(礫石)과 거친 모래가 쌓여 있었다. 도랑 동쪽에 돌로 채워 구멍들이 나게 만든 구덩이가 있는데 물을 거르는 곳일 것으로 보이며 모래나 돌들이 배수구로 직접 들어와 박히는 것을 방지하는 시설일 것이다.
뺄도랑(排水渠) 2 : 남북향으로 동문 안쪽 2.5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문 안길 바닥을 가로질러 통과하고 있다. 배수로 벽은 쐐기꼴돌로 쌓았으며 바닥은 모래흙으로 되어 있다. 북쪽은 파괴되어버렸다. 남은 길이 4m, 너비 0.8m, 깊이 0.36m인데 남쪽과 우물( 井) 북벽은 서로 통한다. 모래를 거르는 도랑(濾砂池) 동쪽을 깊이 파서 우물을 만들었는데 벽은 돌을 써서 쌓았다. 평면은 길둥근꼴(長圓形)인데 길이 3m, 너비 1.2m, 깊이 1.2m이다. 우물 벽 남부와 성안 보호벽(護坡墻)은 서로 이어져 한 몸이고 북부와 성안 길바닥은 평탄하다. 우물 가장자리 동서방향은 불규칙한 긴네모꼴(矩形) 큰 판석 하나를 가지고 쌓았고, 서쪽은 배수로 2의 배수구가 된다. 우물 바닥은 펀펀한 널돌을 깔았는데 우물은 북쪽으로 배수로 입구와 통한다. 배수로를 물이 들어가는 구멍길은 납작한 네모꼴인데 높이 30㎝, 너비 60㎝이고 쌓는 시간을 생각한 것이다(時刻意所爲?). 배수로는 북쪽으로 향하다 동쪽으로 직각으로 꺾여 2.3m를 간다. 동문 남쪽 문길 안벽 아래쪽을 따라 바깥으로 나간다. 문길 밖 겉도랑 위에는 큰 널돌 3장을 덮어 문밖 길바닥의 너비를 넓혔다. 배수로 안쪽을 쌓는 법을 보면, 사용한 석재와 형태가 배수로 2와 거의 같다. 배수로 출구는 너비 80㎝, 높이 90㎝, 깊이 13.8m이다. 배수로 바깥 겉도랑 바닥에 있는 바위를 파고 양벽을 쌓았는데 절벽 가장자리까지 13.8m이다.
북문 배수는 물막이담, 배수로로 물이 들어가는 입구, 우물, 배수로 겉도랑으로 짜여 있다. 물은 문안 남쪽 뒤로 흘러, 남쪽과 동쪽 물막이담에 부딪쳐 동쪽 담 아래 있는 입구로 들어간다. 배수로로 물이 들어가는 입구는 현재 2개가 발견되었는데 한 개는 조기에 사용한 것으로 동쪽 물막이담 바닥에 있다. 긴네모꼴이고 길이 0.76m, 높이 0.36m, 깊이 0.67m이다. 아래쪽 배수로는 되꺾어지는식(反折式)인데 배수로 덮게 위쪽을 따라 우물로 흘러 들어가다 다시 서쪽으로 180°꺾어져 서쪽으로 활등처럼 꺾이며 문길 아래 동쪽 배수로를 통해서 성문 밖으로 흘러나간다. 다른 1개의 배수로 입구는 후기에 사용한 것인데 우물 서쪽 배수로의 두 번째 덮개석을 열어 입구가 되는데, 배수로는 높이 0.56m, 너비 0.52m, 전체 길이 18.5m이다. 성문 바깥쪽에는 문길 밖으로 8m 나와 겉도랑에 닿는다. 겉도랑은 쐐기꼴돌로 양 벽을 쌓았는데 산세에 따라 쐐기꼴 돌을 계단식으로 쌓았다. 도랑길은 모두 15계단인데 겉도랑 끝 계단벽은 평탄하다. 총 길이 4.7m, 도랑 벽 높이 0.6m, 너비 0.7m이고, 각 계단의 차이는 평균 16㎝로 위아래를 자유롭게 조절하여, 산성 바깥 동쪽 문길을 보호하고 성바깥 문길 가에 계단을 하나 만들어 드나드는 데 편리하도록 하는 두 가지 이득을 본 것이다.
저수지는 고구려 산성의 중요한 시설 가운데 하나로 고구려 산성에 두루 존재하는 것이다. 석대자산성에서는 성안 중부에 있는 두 봉우리 사이 골짜기에서 발견되었다. 흙과 돌로 판축하여 남북향으로 물막이벽을 쌓았는데 벽 안쪽에 돌로 보호벽을 거칠게 쌓았다. 둑 양쪽 끝은 산비탈과 이어져 있는데 길이가 20m 남짓 되고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는데 위 너비가 2.5m쯤 된다. 둑 위쪽 중간에 좀 낮고 오목한 곳이 있어 물이 천천히 세나가게 했는데 너비 0.4m, 깊이 0.2m이다. 둑 꼭대기에서 못 바닥까지 가장 깊은 곳이 2.4m이다. 최근 저수지 서북쪽에서 돌로 쌓은 담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저수지 안의 시설은 아닌 것으로 보여 확실한 증거를 기다리고 있다. 저수지의 최대 용적은 어림잡아 300㎥쯤 된다.
산성 동남쪽과 동북쪽 두 곳에 평탄하고 널찍한 지세가 있는데 사람이 머물러 살기 좋은 곳이다. 출토된 유적과 유물의 정황을 보면 청동기시대 이미 거주지로 쓰였다. 산성 바깥쪽 서부 산골짜기에서 조사발굴한 결과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에 이미 옛사람들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편보자문화(扁堡子文化) 유물이 발견되어 이 사실을 증명하여 주었다. 발굴구역 안에서 발견된 주거유지와 잿구덩이와 부엌터 같은 유구들이 밀집해 있고 또 서로 겹쳐있어 지층관계와 유적관계가 깨트려 없어졌다. 예를 들면 T105 안은 F3-F2-F4?처럼 여러 유적의 관계가 파괴되었다. 현재 발견된 주거지는 반움집식(半地穴式), 돌담식(石墻式)이 있는데 반움집식은 돌담식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편으로, 꽤 잘 남아 있는 것이 T101F1이다. 면적은 6.6×6.4m, 문길은 동남향, 4벽은 돌로 기초를 쌓았고, 방안 구조는 앞방(前廳), 거실, 저장실(倉貯室)이 있고, 돌로 쌓은 부엌은 앞방 북쪽에 있고 안으로 돌로 쌓은 온돌로 이어진다. 고래(煙道)는 북쪽 담 밖에 있다. 담 기초 안과 집터의 짜임새는 구석도는 곳에 명주(明柱)가 있고 암주(暗柱)가 지붕을 떠받들게 되어 있다. 살았던 바닥 위에는 길흙이 있고 퇴적된 불탄흙과 생산과 생활에 쓰인 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질그릇바리때(陶鉢) 안에서 보존 상태가 완전한 탄화 곡물이 출토되었다. 주거지에 대한 발굴작업에서 주요한 '관부(官府)'급 주거지는 거의 시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용 기와 같은 재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미 발견된 주거지는 소형 집터가 많고 생김새도 간단하고 형식도 단순하다.
Ⅴ. 유물
출토유물은 질그릇, 철기, 동기(銅器), 석기, 골기 같은 것들이 있다.
질그릇(陶器) : 조각들이 많이 남아있고 복원이 가능한 것은 아주 적다. 그릇 모양새는 독(瓮), 항아리(罐), 대야(盤), 동이(盆), 보시기(碗), 두형그릇(豆形器) 몸(體), 가락바퀴(紡輪) 같은 것들이 있다. 질그릇의 질은 점토바탕 질그릇(泥質陶), 모래 섞인 질그릇(夾砂陶), 유약(잿물) 바른 질그릇(釉陶), 곱돌 섞인 질그릇(夾滑石陶),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진흙바탕 질그릇이 가장 많고, 그 다음 모래 섞인 질그릇, 유약 바른 질그릇 순이고 곱돌 섞인 질그릇은 많지 않다. 질그릇 색깔은 회색, 검은색이 가장 많고, 황갈색, 홍갈색, 홍색도 있다. 겉부분은 회흑색이고 바탕(胎心)은 홍갈색인 것도 있다. 질그릇 바탕은 꽤 단단하고 소성도도 높은 편이다. 그릇 표면에는 민무늬가 가장 많고 눌러갈고, 닦아서 광택을 냈다. 무늬는 시위무늬(弦紋), 물결무늬, 찍은 무늬( 印紋), 드러나지 않게 누른(暗壓) 그물문살무늬(網格紋)가 있고, 몇몇 조각에는 구멍을 이어논(綴合孔) 무늬도 보인다. 손잡이는 다리꼴(橋狀)이 가장 많고, 반원형 손잡이(盲耳?)도 있는데 모두 그릇 벽에 붙이는 방식이다. 만드는 법은 테쌓기(輪制)가 가장 많고 대형 그릇에는 빗기수법(泥片接築法)을 썼다. 유약을 바른 질그릇은 청회색, 황색, 홍갈색 같은 것들이 있으나 복원할 수 있는 그릇은 없다.
질그릇 바닥에서 '하늘 천(天)', '흙토(土)'자 꼴 명문이 발견되었다(그림 2).
철기 : 병기와 생활용기 같은 것들이 있다. 병기는 흔히 볼 수 있는데 살촉, 칼(刀), 갑옷 비늘, 못, 낫(削), 갈고리(鉤), 고리, 도끼, 문 못, 문 장부쇠(門戶), 문확(門臼), 문유(門柚?) 덥개, 모자(帽) 같은 것들이 있다. 철제품은 대장질(鍛造)한 것이 많고 주조한 것은 아주 드물어 문 장부쇠, 문확, 문굴레(門軸) 정도이다. 살촉의 형식은 9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모두 대장질해서 만들었다. 살촉 같은 공격성 병기들은 고구려 땅에서 생산 가공한 고구려 민족의 유물과 고구려에서 만든 것이 아닌 것이 있는데 앞으로 구별해야 할 일이다. 문 장부쇠와 문확은 척도가 다른데 규격은 비슷하다. 문의 단단한 정도에 따라(???) 분별하는데 차이가 있는데 거푸집(範)은 한 가지일 것이다.
동기 : 단추(銅 ), 가락지, 호미(手 ), 장식품, 살촉, 동전(오수전) 같이 대부분 자그마한 물건들이다. 살촉은 날개가 3개 달린 것인데 전국시대 유물이 갖는 특징이다. 오수전은 수(隋)나라 오수전과 전륜(剪輪) 오수전 두 가지가 있다. 지층과 관계가 있는 유일한 유물로 산성의 수축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이다.
골각기 : 칼자루(刀柄), 비녀, 갈아 만든 구멍뚫린 뼈조각 따위가 있다. 칼자루는 뿔뼈를 갈아서 만든 것인데 끝 부분이 둥그렇고 손을 잡는 부분은 네모나다. 가운데는 비어 있고 표면에는 7개의 원형 쌍고리가 마주보고 있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뼈비녀는 반제품으로 모양을 깎아 만들었는데 모난 곳이 있고 문지른 광택이나 사용한 흔적이 없다.
석기 : 돌확, 돌고리, 숫돌(礪石), 가락바퀴, 돌자귀(石 ) 같은 것들이 있다. 돌고리는 구멍은 손가락이 들어갈 만 한데 화살밭침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고증이 필요하다. 석기 가운데는 청동기시대 유물도 있다.
Ⅵ. 맺는말
고구려는 우리나라 동북지구 역사상 소수민족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로서 기원전 37년 건립한 이후 668년까지 705년간 이어졌다. 이 기간 중원의 왕조는 서한, 왕망, 동한, 삼국, 위진, 남북조, 수, 당 같은 많은 역사시기가 지나갔고 고구려 왕권은 한 구석을 차지해 스스로 한 가지를 이루었다. 고구려 정권이 건국된 이후 망하는 시기까지 계속 역대 왕은 모두 중원 군주의 봉호(封號)를 받았다. 중원 왕조들의 교체가 상대적으로 빈번했기 때문에 고구려 지방정권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서한시기부터 고구려현에 속한 구역이 되었다가 점차 5부를 바탕으로 지방정권을 형성하였다. 그 때 중원 군주와 동북지방정권 사이의 관계는 '(고구려는) 성질이 흉하고 급하며, 기력이 있고 전투를 좋아해 노략질하기를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요동 산지의 토착부족으로 생활하던 조기, 고구려 왕권이 일어나기 이전 일정한 형태의 산성이 있었다. 청동기시대의 요서 하가점 문화시기에 이미 석재를 사용하여 쌓은 산성이 발견되었다. 고구려 시기 이러한 거주, 창고, 군사보장 같은 여러 가지 기능를 갖춘 산성이 빠르게 발전하였다. 산성의 규모가 확대되고 군사방어능력이 더해졌으며 산성의 총체적 시설과 설계가 완전하게 되었는데 석대자산성이 바로 하나의 완전한 실례이다.
석대자산성은 지리적 위치와 군사방어 상에서 소위 '요구(遼口)'를 지키는 것으로 육로로 보면 요서에서 요동의 '북용도(北甬道)'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성에서 서북쪽으로 요하를 건너는 입구가지 40㎞쯤 되고, 도강 입구인 요빈탑(遼濱塔)까지 70㎞가 되지 않는다. 남쪽으로 세 번째 옮긴 현토군인 심양 상백관(上伯官) 고성터까지는 13㎞이고, 동북쪽 최진보(催陣堡)산성까지는 40㎞가 안되며, 동쪽으로 고이산(高爾山)산성은 20㎞가 안 된다. 이 3개의 산성이 서로 '요구(遼口)'를 바라보는데 석대자산성은 바로 모서리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휘산(輝山) 구릉의 기반산(棋盤山) 주봉이 석대자산성에서 9㎞쯤 떨어져 있어 요하평원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이 산과 산성 서남부의 가장 높은 점에 있는 '장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장대와 동루자(董樓子)의 '작은 산성'이 서로 바라보며 지키고 있다. 군사적으로 요하의 도강 입구를 지킬 수 있는 유리한 지리적 위치이고, 육로인 '북용도(北甬道)' 요지를 차지하고 적을 방어할 수 있으며, 포하(蒲河) 골짜기로부터 청원(淸源)을 지나 두 번째 현토였던 신빈(新賓) 노성(老城)에 이르는 교통의 요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곳의 현재 교통로를 보면, 포하진(蒲河鎭) 하르빈-대련(哈大)간 도로에서 동쪽으로 가면 신성자구 망빈향에 이르고, 여기서 동쪽으로는 철령(鐵嶺) 횡도자향(橫道子鄕)에 이르고, 동남쪽으로는 남잡목(南雜木), 상협하(上夾河), 목기(木奇)를 거쳐 신빈 영능(永陵)에 다다른다. 이 길은 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지는 길이다. 이 도로 도중에 남북으로 교차하는 철령-무순(鐵撫) 도로의 남쪽 끝이 현재의 바로 고이산(高爾山)산성 북문이다. 고이산산성에서 북쪽으로 가면 최신보산성 서남쪽에 있는 평지성인 청룡산(靑龍山)산성 동문 밖이 된다(그림 3).
석대자산성은 치를 많이 설치했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치 사이의 간격은 평균 60m 안팎인데 가장 짧은 것은 40m 남짓으로 치와 치 사이는 화살의 유효사거리를 벗어나는 거리로 지키기는 쉽고 쳐들어가기는 어렵도록 한 것이다. 산성 모서리가 되는 곳에 있는 3호와 6호 치, 문터 부근에 있는 1호, 4호, 9호 치의 벽체 바깥쪽에는 모두 목탄이 퇴적된 흔적과 불에 탄 흔적들이 널려 있다. 이런 현상은 치 위에 각루를 설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성을 공격할 때 생긴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두 가지 원인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지만 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 석대자산성은 이처럼 산성을 따라 바깥쪽에 많은 치를 설치한 것은 군사방어능력을 완전히 갖춘 산성을 구축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 압록강 우안에 아직 그런 성이 볼 수 없다. 요양 암주성(岩州城) 북쪽 성벽 밖에 4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고, 집안 국내성 북벽 같은 곳에 14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나 국내성은 고구려 시대의 도성이고 일반 산성이 아니며 평지성이란 점을 감안하면 석대자산성의 지위와 품격, 자연지세의 요처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석대자산성이 보여주는 현재의 군사방어능력은 석대자산성 자체가 갖추고 있는 특수성과 중요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석대자산성의 계획, 설계, 축성구조 같은 여러 방면에서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배수계통시설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 서문 있는 곳을 제외하고 산등성 지세에서는 배수시설이 보이지 않고, 동문, 남문, 북문의 문길 하부에서는 모두 배수로가 발견되었으며, 남문 서쪽의 산세가 낮은 오목한 곳 성벽 밑에서 배수로 하나를 발견하였다. 배수로 안쪽에는 배수도랑, 모래를 걸러내는 도랑, 물막이 담, 셈 같은 시설이 있고, 배수로는 문길 아래를 'S'자 꼴이나 직행으로 통과하고 있다. 배수로는 모두 문길의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문길 바깥쪽은 길거나 짧은 덮인 덥개석이 있어 빠져나가지 쉽게 만들었다. 배수로 바깥쪽에 겉도랑을 쌓아 산 아래로 통하도록 하였다. 특별한 것은 북문이다. 문의 바깥쪽 배수로에 석판을 한 단 덮고, 그 위에 다시 흙과 돌을 깔아 노면 너비를 넓혔으며 배수로 입구 바깥쪽의 겉도랑을 계단모양으로 쌓았다. 이것은 물도 빼고 드나들기에도 편하도록 위아래를 자유자재로 처리하였으니 정말 절묘한 작품이다. 성문 안쪽에 있는 배수구의 입구는 '속구식(束口式)'과 '반절식(反折式)'으로 만들어 사람이 배수로에서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높이 겨우 30㎝, 너비 60㎝의 '속구(束口)'를 통과하는 것은 장비가 없으면 몸을 꾸며 단속한 상황아래서도 아주 곤란하(?????)도록 한 것을 보면 배수로 뿐 아니라 그 밖의 안전 방면을 고려한 것이다. 기초시설공정에서 특별한 것은 배수로의 내부구조 공정인데, 입수구의 '속구식'이나 '반절식' 형태의 구조를 1차성 겹쳐쌓기로 쌓은 것을 보면 산성 성벽과 성문을 쌓기 전에 이미 완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성의 둘레는 겨우 1384m지만 4개의 문을 설치하였고 각 문터의 깊이는 널찍하다. 문길 아래 양쪽에 돌로 쌓은 계단식 대는 문주춧돌의 위치와 거의 완전하게 일치하며 사용한 석재의 질량과 규격도 거의 같다. 이미 발견된 문주춧돌, 주조한 장붓쇠, 문지도리 및 문유(門柚) 덥게, 문못, 문테 같은 것들은 서로 다른 문터에서 나온 유물이지만 형태는 대체로 같다. 이것은 산성을 쌓기 시작할 때 이미 충분하고 세밀하게 계획하고 물자를 완전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산성 성벽면을 따라 이어 쌓은 공법을 보면 수평으로 정밀하고 열성적으로 쌓았을 뿐 아니라 산성을 쌓을 때 통일 된 시공을 하였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석대자산성은 고구려 산성 만기의 석축공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각 건축 부분에서 대표적 산성의 뛰어난 우수성을 갖추고 있다.
북문터에 명확한 지층 층위가 나타나 있어 이 산성은 두 차례 불이 나고 두 차례 쌓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트렌치 97TG1의 퇴적층 가운데서 수나라 오수전이 발견되어 연대의 하한선을 수나라 초로 볼 수 있는데 당시는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던 631∼646년에 해당된다.
산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언제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검토가 필요하다. {삼국사기} 태조대왕 때 '3년(서기 55년) 봄 2월,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대에 대비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석대자산성이 이 때 이미 존재하지 않았는가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태조대왕 3년, 이 때 태조대왕 나이 겨우 7살이고 태후가 수렴청정할 때이다. 이 태후가 바로 태후묘를 세웠다는 그 태후로 부여인을 말한다. 이 태후와 고구려 왕권의 관계가 '부여에서 나왔다(出自扶餘)'라는 역사시기의 관계를 반영해 주는 것이다. 혹 다음 기록이 축성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는지 모른다.
{삼국사기} 서천왕조 : '7년(서기 276년) 여름 4월, 왕이 신성에 갔다. … 신성국 동(서)북쪽의 큰 진(鎭)이다'
석대자산성은 현토군을 세 번째 옮긴 곳인 상백관(上伯官)고성 정 북쪽 14㎞ 지점에 있고 현토군 남쪽에는 한나라의 후성(候城), 고현(高顯), 요대(遼隊), 양평(襄平), 요양(遼陽) 같은 한나라의 성터가 있다. 석대자산성 북쪽에 있는 한나라 성의 유지는 현재 철령현 신대자(新臺子) 부근에 한 곳밖에 없는데 대부분 한나라의 망평현(望平縣)으로 보고 있다. 석대자산성은 신성을 위주로 한 여러 산성과 함께 266∼267년 사이에 이미 존재하였다. 혹 그 이후 발생한 모용씨와의 전쟁 및 현토 침입, 요동 노략질 같은 여러 전쟁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석대자산성의 성 이름은 고구려 때의 몇 개 산성 가운데 현재 학자들이 연구한 학설은 다음과 같다.
1. 금산(金山)설
2. 개모(盖牟)설
3. 창암(蒼巖)설
여러 차례 조사 발굴하였지만 현재까지 산성 안에서 산성 이름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고고학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산성이 자리잡은 지리적 위치 산성 본래의 형태, 군사방어 능력, 산성의 축성 수준, 1384.1m 밖에 되지 않은 작은 규모, 성벽에 있는 4개의 문, 10개의 치를 설치한 것 같은 여러 가지 상황과 주위에 있는 고이산산성, 최진보산성 같은 산성과 비교하고, 범위상 생략해야 할 산성을 제하고 나면 앞에서 본 설들이 모두 격조가 있고 지위가 있다. 돌로 쌓은 산성이 흙으로 쌓은 산성보다 시기가 앞선다는 고구려 산성 편년의 보편적 관점에서 보면 석대자산성이 늦은 시기에 쌓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석대자산성이 고구려 서쪽 변방의 중요한 진지였던 '신성(新城)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와 다른 논의를 기대하는 바이다.
석대자산성이 발견된 지 10년 가까이 되었으나 발굴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산성이 가지고 있는 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는 아직 그 진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심양지구 고구려의 역사와 발굴작업은 하나의 좋은 실마리를 잡았지만 이 지역에 관계된 고구려 역사와 발굴은 아직 더 깊이 있는 진전이 있어야 한다. 이번 논의는 석대자산성에서 발굴된 유구와 유적의 현상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한 것이니 우리의 관점에 이치에 맞지 않거나 마땅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학자들께서 바로 잡아주시기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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