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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대자산성

심양 석대자산성 복원된 남벽 원경(2005년)


1) 학술조사
 
1987년 심양시 문물조사대(瀋陽市 文物調査隊)에서 발견하였고, 1990년 가을과 1991년 여름 두 차례에 걸쳐 5m×5m 피트 6곳을 시굴하여 건물터, 돌로 구축한 부엌, 회갱(灰坑) 등과 함께 많은 고구려 시기 유물을 출토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1997년 5월 12일에서 11월 중순까지 7개월 동안 성 전체를 발굴하고 상세한 1차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瀋陽 石臺子山城 위치도


2) 위치와 환경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은 심양시(瀋陽市)에서 동북쪽으로 35km 떨어진 휘산(輝山) 풍치지구의 기반산(棋盤山)댐 상류 우안(右岸)에 자리잡고 있다. 산성 서남쪽에는 심양시 동릉구 만당향(瀋陽市 東陵區 滿堂鄕)의 석태자촌(石台子村)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그리고 산성의 동․남쪽 절벽 아래로 포하(蒲河)가 흘러갔었는데, 그 연안 일대도 모두 수몰되었다. 현재 심양시 원림국(瀋陽市 園林局) 관할하의 기반산(棋盤山)댐 풍치지구에 속해 있다. 이 일대는 포하(蒲河) 연안의 하곡평지(河谷平地)로서 본래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편이었지만, 댐 건설로 주변 지세가 많이 바뀌었다. 산성 서북쪽은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 서남단에 자리잡은 휘산(輝山)의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반면, 기반산(棋盤山)댐에 수몰된 동남부는 본래 포하(蒲河) 연안의 하곡평지였다. 포하(蒲河)에 접한 산성의 동쪽과 남쪽에는 괴석이 높이 솟아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어 적군이 쉽지 않다. 이러한 지형조건으로 인해 ‘우뚝 솟은 돌산’이라는 의미에서 ‘석립자산(石砬子山)’ 또는 ‘석대자산(石臺子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성으로 들어가는 골짜기 입구는 동남쪽에 있으며, 이에 비해 휘산(輝山)으로 이어지는 서북면은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로서 방어상 취약점을 많이 안고 있다. 

포하(蒲河)는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 서남단의 무순․심양(撫順․瀋陽) 경계지역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혼하(渾河)로 흘러든다.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은 이러한 포하(蒲河) 연안의 충적평지와 요동평원과의 접경지대 안쪽에 위치하였다. 석대자산성 일대는 구릉성 평지로서 서남쪽의 심양(瀋陽)뿐 아니라 동남쪽의 무순(撫順), 동북쪽의 철령(鐵嶺) 등 여러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심양 석대자산성 평면도

심양 석대자산성 SSW2 성벽 단면도

심양석대자 산성 1990~1991년 출토 토기


3) 유적의 현황과 성곽의 구조

산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하였다. 평면은 불규칙한 삼각형에 가까우며,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편으로, 성벽의 총둘레는 1,384.1m에 이른다. 동벽은 가파른 바깥쪽에 내탁식(內托式)으로, 서북벽과 남벽은 산등성이와 능선을 따라 협축식(夾築式)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쐐기형 성돌을 빈틈하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가지런하게 층층이 쌓아올렸다. 서남벽과 서북벽 남단은 거의 파괴되었다. 성벽의 횡단면은 사다리꼴이다. 외벽은 성벽 높이 1m마다 6~8cm, 내벽도 성벽 높이 1m마다 1~5cm 정도씩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았다. 그리고 석축성벽 안쪽에는 벽체에 잇대어 흙을 층층이 다져서 토축성벽을 구축하였다. 

(1) 성벽의 단면구조 

1997년에 서북쪽 2곳, 남벽과 동벽 1곳씩 등 4곳의 성벽을 시굴하였다. 서북문 서쪽 32m 지점의 성벽을 남북 방향으로 길이 19m, 너비 2m, 깊이 1~3.4m로 횡단하여 시굴하였다. 바깥쪽의 석축성벽은 기단부 너비 6.1m, 윗면 잔장(殘長) 5.65m, 잔고(殘高) 2.4m였다. 외벽은 높이 1m마다 7cm, 내벽은 5cm씩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았다. 안쪽에는 성축성벽에 잇대어 토축성벽을 구축하였다. 10~15cm 두께로 흙을 층층이 다져서 축조하였다. 높이 2.4m로 18층 정도 남아있다. 성 내부 문화층의 흙으로 축조하였는데, 토벽 내부에서 니질회도편(泥質灰陶片)과 쇠화살촉을 비롯하여 수대(隋代) 오수전(五銖錢)과 전륜오수전(剪輪五銖錢) 등이 1매씩 출토되었다. 서북벽 3호 치성(雉城)의 남측 성벽을 동서 방향으로 길이 13m, 너비 2m, 깊이 6m로 횡단하여 시굴하였다. 석축성벽은 기단부 너비 6.14m, 윗면 잔장(殘長) 5.6m, 잔고(殘高) 2.8m였다. 외벽은 높이 1m마다 8cm, 내벽은 1cm씩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았다. 안쪽에는 성축성벽에 잇대어 ‘토축+토석혼축’ 성벽을 구축하였다. 아래쪽의 토벽은 길이 7m, 높이 2.8m로서 10~30cm 두께로 흙을 층층이 다져서 18층 정도 쌓아올렸다. 토벽 위쪽과 바깥쪽에 토석혼축성벽을 구축하였는데, 매 층의 두께는 40~60cm로서 길이 6.5m, 높이 3m이다. 남벽 동단 9호 치성(雉城)의 동측 성벽을 남북 방향을 길이 10m, 너비 2m, 깊이 2.7m로 횡단하여 시굴하였다. 석축성벽의 너비는 6m였으며, 석벽 안쪽에 쌓은 토벽의 길이는 정확하지 않다. 토벽은 높이 2.7m로서 흙을 15~20cm 두께로 층층이 다져서 9층 정도 쌓아올렸다. 토벽 내에서 니질회도편(泥質灰陶片)이 출토되었다. 동문 북측의 성벽을 동서방향을 길이 9.2m, 너비 2m, 깊이 6m로 횡단하여 시굴하였다. 석축성벽의 너비는 7.2m였으며, 잔고(잔고)는 3.9m이다. 외벽은 높이 1m마다 8cm씩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았다. 석벽 안쪽의 토벽은 1997년 발굴 당시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2) 성돌 

성돌은 모양에 따라 설형석(楔形石), 사형석(梭形石), 장방형석(長方形石), 쌍조석(雙槽石), 판석(板石) 등으로 분류된다. 설형석(楔形石)은 대체로 내외벽의 면석으로 사용하였고, 정면은 장방형으로서 약간 튀어 나왔으며 평면은 삼각형이다. 사용처에 따라 크기나 다듬은 정도가 다양하다. 사형석(梭形石)은 벽체 속의 끼우개돌 또는 결합석으로 사용되었다. 내외벽의 면석에 끼운 사형석(梭形石)은 결합부의 틈이 일정할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었는데, 길이는 50~60cm이다. 벽체 내부에 사용된 사형석(梭形石)은 가공 정도가 거칠고 형태도 일정하지 않은 편으로 길이는 30~35cm이다. 장방형석(長方形石)은 석회암으로서 치성 기단부의 모서리나 성가퀴 등에 사용되었다. 치성 기단부의 모서리에 사용된 것은 길이 40~80cm, 너비 50~60cm, 두께 30~50cm이다. 성가퀴에 사용된 것은 길이 50cm, 너비 42cm, 두께 24cm이다. 쌍조석(雙槽石)은 모두 장방형으로 바닥은 평평하지만, 표면과 양끝의 모양에 따라 네 형식으로 분류된다. Ⅰ식은 중간이 약간 잘록하고 양 끝이 활모양으로 ‘속요형(束要形)’이라고 명명되었고, Ⅱ은 반호형(半弧形), Ⅲ식은 사다리꼴, Ⅳ은 네모꼴이다. 판석(板石)은 주로 배수구의 덮개돌로 사용되었다. 길이 100~140cm, 너비 80~110cm, 두께 30~50cm인데, 큰 것은 길이 234cm, 너비 140cm, 두께 23cm인 것도 있다. 이처럼 여러 형태의 성돌은 모양에 따라 사용처와 용도도 달랐다. 석회암이나 화강암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동쪽 절벽 부근의 석질과 비슷하며, 북쪽에 있는 대양석산(大洋石山)의 석재와도 근사하다고 하며, 반면 현무암과 같은 화산암 석재는 외부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3) 성벽 기초부 축조방식 

성벽 기초부의 축조방식은 입지조건에 따라 다양하다. 먼저, 지세가 낮고 움푹 들어간 곳, 경사가 완만한 신비탈 등에는 성벽의 너비 정도로 암반층까지 기초홈을 판 다음 기초를 축조하는 홈기초법(基槽基礎法)을 사용하였다. 기초부의 깊이는 40~70cm이다. 기초석으로는 거칠게 다듬은 설형석(楔形石)을 2~3단 쌓았으며, 틈새는 많이 벌어진 편인데, 이는 벽체의 수평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산세가 가파르고 암석이 노출된 곳에는 암반을 뚫어 기초부를 구축하는 착암기초법을 사용하였다. 암반을 뚫어서 평면 또는 기초홈을 조성한 다음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이 축성법을 이용한 성벽 하단부는 대체로 안쪽의 암벽과 서로 의지하게 된다. 이에 일정 높이 이상 성벽을 쌓은 다음 끼우개돌로 내벽면과 이은 다음 성벽을 구축하였다.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에는 산사태를 막기 위해 버팀축조법(戧築法)을 사용하였다. 즉 성벽 너비 정도로 기초홈을 굴착한 다음 지세에 따라 몇 단으로 나누고, 각 단의 최저지점에서 성벽을 쌓기 시작하여 아래쪽 1단의 수평선을 초과하게 되면 다시 처음부터 성벽을 축조하였다. 이에 따라 성돌은 10~20도 저도 기울어지게 되었다.


4) 역사적 성격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의 축성시기와 성격은 바깥쪽 석축성벽과 안쪽 토축성벽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을 처음 조사하였던 1990~1991년에는 양자를 이중성(二重城)의 관계로 이해하였다. 서북벽 바깥쪽의 지세는 완만하고 평탄하며 방어상 많은 취약점을 갖고 있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4~5m 거리를 두고 이중성을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1997년 성벽단면을 시굴한 뒤에는 토벽을 석축성벽의 ‘호파(護坡)’ 곧 ‘보호용 축대’로 파악하였다. 안쪽 토벽은 석벽과 동시에 축조하였는데, 석벽 바깥쪽에 떨어진 성돌 부스러기가 토벽 내부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고 한다. 토벽은 석벽 축조시에 석재 운반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석벽이 높아짐에 따라 토벽도 높아졌을 것이며 이에 따라 석벽 축조에 사용된 성돌의 부스러기가 토벽 층위에 떨어져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벽은 성벽 완공 이후에는 석벽에 오르는 접근로로 이용되었다고 보았다. 성벽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토벽에서 수대(隋代)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된 사실을 근거로 천리장성을 구축하던 631~645년경으로 설정하였다. 축성시기는 약간 달리 보았지만, 두 견해 모두 석벽과 토벽을 동시에 축조하였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서남문에서는 안쪽 토석혼축벽이 석벽의 문길을 덮고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판축한 토벽 위에 바깥쪽 석벽보다 휠씬 높은 토석혼축성벽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바깥쪽 석벽을 먼저 축조하고, 그 뒤에 토벽․토석혼축벽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석대자산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성 내부에서 쇠화살촉과 갑옷편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군사 성보(城堡)로 추정하거나 동남쪽 19km의 고이산성(高爾山城)이나 북쪽 34.5km의 최진보산성(催陣堡山城)보다 소형산성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호위성 산성(護衛城 山城)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또한 신성(新城)으로 비정되는 무순 고이산성(撫順 高爾山城)이 서북방의 군사중진(軍事重鎭)이라는 점에서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은 고이산성 전방에 위치한 전초기지일 가능성도 높다. 실제 석대자산성은 여러 요하 도하로(遼河 渡河路) 가운데 북쪽 루트인 신민 고대산~심양로(新民 高臺山~瀋陽路)를 통해 건넌 다음 고이산성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은 개원(開原) 마가채산성(馬家寨山城), 용담사산성(龍潭寺山城), 고성자산성(古城子山城) 등 요하 중상류일대 고구려산성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입지조건을 보면, 위의 성들과 마찬가지로 송요대평원(松遼大平原)에서 요하(遼河) 지류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하천과 나란히 달리던 산줄기에서 하천 연안으로 약간 돌출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은 입지조건상 기본적으로 송요대평원(松遼大平原)에서 포하(蒲河) 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더욱이 석대자산성에서 포하(蒲河) 상류를 거슬러 나아가면 무순이나 철령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편,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은 둘레 1.4km로서 대형산성 보다 한 등급 아래인 중형산성으로 분류되지만,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로서 주거용 공간이 넓은 편이다. 실제 몇 곳을 시굴한 결과 건물터와 부엌 그리고 회갱(灰坑) 등 주거지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도 다른 고구려산성처럼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추정된다.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은 송요대평원(松遼大平原)에서 포하(蒲河)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군사성보이자 포하(蒲河) 연안일대를 지배하기 위한 거점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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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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