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63705200410395141

선조, 대신들의 무기력을 질책하고 분발 촉구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16
신하들 사기 돋구며 왜적에 항거할 것 전교
입력시간 : 2013. 03.20. 00:00
 

이순신 동상 : 여수시 중앙동 로타리에 있다. 뒤에 진남관이 보인다. (위)  
여수시 중앙동 충무공 광장 (아래)

남송 때 육수부 사례 거론하며 충성 요구
백의종군 이순신에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칠천량 해전의 참패와 관련한 7월22일의 어전회의 내용을 계속하여 살펴보자. 이순신 모함에 앞장선 전 좌의정 윤두수가 아뢴다.

“비록 잔여 선박이 있다 하더라도 군졸을 충당하기가 어려우니 아직은 통제사를 차출하지 말고 각도의 수사로 하여금 우선 그 지방의 군졸들을 수습하여 각기 지방을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두수가 삼도수군통제사 차출을 미루자고 선조에게 아뢰는 것은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막고자 함이다. 이 발언에는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면 자신들이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스며있다.

그런데 윤두수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말을 하고 있다. 원균, 이억기, 최호 등 수군사령관이 이미 실종되어 수군 지휘에 공백이 생긴 상황에서 어떻게 수군 차출이 가능하단 말인가. 더구나 조선의 전함들이 모두 침몰된 상태인데 어떻게 수군 진용을 재정비할 수 있단 말인가. 

요즘 같으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가비상안보회의에서 안보 부총리가 발언한 군사전략치고는 너무나 유치하고 하수이다. 

윤두수의 발언이 이렇다 보니 선조 임금이나 다른 대신들도 윤두수의 말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이야기를 아예 다른 곳으로 돌린다.

이윽고 선조가 말한다. 

“내 말이 지나친 염려인 듯하지만, 명나라 장수들은 늘 우리 수군을 믿는다고 했는데, 지금 이 같은 패전 보고를 들으면 중국 군대가 혹 물러갈 염려가 있으니, 만약 그렇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조는 명나라 군대의 철수를 우려한다. 이어서 이항복이 아뢴다.

“아마도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선조가 말한다.

“한산은 왜적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외로운 군사로는 지킬 수 없을 것이니 조금 후퇴하여 전라우도를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성룡이 아뢴다.

“그렇게 하면 결국 남해를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조선 수군이 전멸하였으니 왜군의 남해안 진출은 파죽지세이다. 선조는 남해를 아예 포기하고 멀찍이 전라우도를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어서 선조가 말한다.

“내가 확실히 알지는 못하나 지금 수군이 전몰하였다는 소문이 퍼졌다면 남방 인심이 이미 놀라 흔들릴 것이니 다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않을 것인가. 어찌 죽기만을 기다리고 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민망하고 송구스러움만 부르짖는다고 왜적이 물러나 도망하겠는가.”

유성룡이 대답한다.

“남해와 진도를 지키다가 감당하지 못하면 물러나서 다른 요새지를 택하여 지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남해와 진도는 해상 요충지였다. 남해는 전라도로 가는 초입이고 진도는 서해안으로 가는 길목이다. 진도가 무너지면 서해안은 무사통과이다. 강화도까지는 금방 간다. 이러면 서울도 위험하다. 



여수 진남관 (위), 여수시 중앙동 충무공 광장에 있는 권준 표석 (아래) 

끝으로 선조가 마무리 발언을 한다.

“우리나라는 위로 중국이 있으니 왜적의 소유가 될 리는 없다. 그러하니 나라 지키는 일에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따라 선조의 의기가 대단하다. 신하들의 사기를 돋우려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 

한편 선조는 어전회의가 끝나자마자 대신들의 무기력을 질책하고 분발을 촉구하는 비망기를 비변사에 내린다. 이는 7월22일 선조실록 4번째 기사에 실려 있다. 

비망기로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대신들이 사기를 잃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으니, 아, 슬프도다. 평일에는 사리를 논의하는 데에 날카롭고 국사를 계획하는 데에도 있는 계책을 다하여 심지어 모두가 서울을 지키자고 하고 나를 겁쟁이라고 기롱하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사기가 상실되었는가. 마음속으로 근심만 한다고 왜적이 저절로 물러갈 것인가. 옛날에 육수부는 애산에 표류해 있을 때도 오히려 국사를 도모하였다."

육수부는 남송 말기의 대신이다. 1276년에 원나라가 송나라를 침입하여 중국 대륙이 거의 함락되고 황제 공제도 사로잡혀 송나라의 국운이 이미 기운 때에, 육수부는 복주에서 장세걸 등과 함께 단종을 황제로 옹립하고 계속하여 원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는 1278년에 단종 황제가 죽자 8세밖에 안 된 어린 임금 위왕을 옹립하고 자신이 좌승상이 되어 끝까지 송나라의 명맥을 지키다가 1279년 2월에 애산(厓山: 지금의 광동성 신회의 남쪽)에서 원의 장수 장홍범의 침공을 받아 위왕을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남송은 멸망하고 말았다. 

"오늘날 국사가 비록 절박하다고 하나 위로는 부모와 같은 중국이 있고 또 중국 장수가 중외에 배치되어 있으니 어찌 우리나라가 끝내 일어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이니 한산에서 전패한 것은 근심할 필요가 없다. 한나라 고조는 열 번 싸워 아홉 번 패하였으나 끝내 천하를 차지하였으며, 팽성 전투에서 50만 군이 초나라 항우에게 전멸을 당했어도 한나라 조정 대신들이 이 때문에 사기가 꺾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또한 옛 제왕과 장상들 중에 혹 단기로 도망하여 여러 날 먹지 못해 죽을 지경에 이른 자도 많았으나 대부분은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성공을 거두었다. 

내가 비록 불민하기는 하나 중국 장수의 뒤를 따라 동서로 치빙(馳騁 여기저기 부산하게 돌아다님)하기를 원할 뿐이요 사민들로 하여금 홀로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대신들이 무기력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니 어쨌든 이런 때일수록 여러 가지 처사를 허술함이 없이 치밀하게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뜻을 비변사에 이르라.”

선조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 이야기를 들먹이고 있다. 유방은 항우에게 72번이나 연속 패하였지만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이김으로서 항우를 자살케 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누구나 한번은 읽었음직한 소설 초한지가 바로 유방과 항우의 패권 다툼 이야기이다. 

선조의 편지를 받자 비변사가 응답한다.

“삼가 하교를 받드니 임금님의 그 분발하신 뜻은 군신들의 위축된 사기를 다시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이에 신들은 너무도 감격되고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 없어 도리어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극히 어리석으나 오늘의 상황은 나가면 한 번 죽는 것이요 물러나더라도 돌아갈 곳이 없으니, 자신을 독려하고 분발함으로써 죽을 땅에서 삶을 찾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신들이 외람하게도 국가 기밀을 담당하는 중책에 있으면서 계책을 잘못 써서 국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망설이며 사기가 저하되어 물음을 받고도 답할 바를 모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상의 교지를 받들고 보니 중외의 인심이 어느 누가 사기를 돋우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대업을 이룬 자는 백 번 싸워 백 번 패하더라도 지기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니 왜적의 환난은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신들이 어리석은 탓으로 밝으신 상의 교지를 받들어 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다시 선조가 화답한다. 

“임금과 신하는 죽게 되면 같이 죽는 것이다. 경들은 별로 실책한 일이 없을 뿐더러 더구나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좌절하지 말고 더욱 계획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조치하도록 하라.” 

한편 선조는 이 날 경상도 초계에서 백의종군중인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권준(權俊 1541-1611)을 충청수사로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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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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