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63100400409880141

선조, 이순신을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하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15 
자신의 판단착오를 인정하지 않는 임금
입력시간 : 2013. 03.13. 00:00

덕수궁 즉조당. 선조가 어전회의를 한 곳이고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다.
 
선조, 패전책임 논하는 어전회의서 패장 원균 감싸
사관 "한산 패배원인은 전적으로 원균에 있다" 평가 

1597년 7월22일에 선조가 주재한 어전회의 내용을 계속하여 살펴보자. 경림군 김명원이 “장수를 보낸다면 누가 적임자가 되겠습니까?”라고 선조에게 아뢰었다. 이어서 병조판서 이항복은 “오늘의 할 일은 단지 적절한 인재 선발에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선조는 수군 장수 임명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아예 화제를 바꾸어 버린다.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남이공의 말을 들으면 배설도 ‘비록 군법에 의하여 나 홀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군졸들을 어떻게 사지에 들여보내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번 일은 도원수 권율이 통제사 원균을 독촉했기 때문에 패배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1597년 7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는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 판서 이항복이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아야만 된다’고 선조에게 아뢰니 선조가 따랐다”고 적혀 있다. 선조가 김명원과 이항복의 건의에 동의한 것이다. 

김명원과 이항복이 아뢰니 선조가 따랐다는 사실은 유성룡의 '징비록'과 신경의 '재조번 방지'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면 '징비록'에서 관련 기록을 읽어 보자. 

당연한 것이지만 한산도의 패전 소식에 조정에서는 물론 모든 백성들의 놀라움이 참으로 컸었다. 임금께서 비변사의 신하들을 불러 앞으로의 대책을 물었다. 놀랍고도 당황스러워 할 뿐 아무도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그 때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나직이 아뢰었다. 

“이번의 패전은 원균 탓입니다. 생각건대 마땅히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삼는 길 뿐이옵니다.” 

선조 임금께서는 그 말에 그대로 따르셨다. 

그러면 여기에서 선조가 말한 도원수 권율 책임론에 대하여 살펴보자. 7월22일의 어전회의에서 선조는 처음에는 칠천량 해전의 패전을 천운 즉 하늘 탓으로 돌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원수 권율이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인즉, 도원수 권율이 수군통제사 원균을 독촉한 것은 선조의 어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으로 출정하지 않은 원균에게 강력한 경고까지 한 선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조선 수군이 전몰하자 선조는 권율에게 책임을 지우고 자신은 슬쩍 발을 빼고 있다. 이 얼마나 약삭빠른 임금인가. 책임 질 생각은 안하는 임금. 이런 임금을 믿고 왜적과 싸워야 하니 참 답답하다. 

한편 선조는 권율 책임론을 거론하면서 원균을 옹호하고 있다. 원균 책임론은 선조 책임론과 맞물려 있다. 아무튼 선조의 원균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나중 일이지만 1604년(선조 37년)에 선조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패장인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1등 공신으로 최고 예우를 한다. 

이렇게 선조가 원균 책임론을 희석시키려 함에도 불구하고 비변사와 사관은 칠천량 패전 책임이 원균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근거가 바로 1598년 4월2일자 선조실록이다. 이 날의 실록을 살펴보자. 

선조가 비변사에 하명하였다.

“지난해 한산 싸움의 패배에 있어 수군 제장들에 대하여 즉시 공과 죄를 가려내어 법대로 처리했어야 했는데도, 아직까지 고식적인 습관에만 젖어 위엄을 밝히는 교훈을 보여줄 생각을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의 죄도 바로잡지 않고 한 사람의 공도 포상하지 않고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진 채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자는 것에 불과한데,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어떠한 소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비록 한신(韓信)과 백기(白起) 같은 명장이 되더라도 싸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도원수마저도 대수롭잖은 일로 보아 한 명의 교위라도 목을 베어 군율을 크게 진작시키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삼군으로 하여금 죽는 것을 영광으로, 살아 있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상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산도 해전 싸움에 대하여 실시한 상벌은 어떠한가. 이 일은 그냥 둘 일이 일이 아니니 서둘러 공과 죄를 가리어서 상벌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세월이 점점 오래되고 나면 사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비변사는 선조의 하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덕수궁 석어당. 선조가 임진왜란 때 환도 이후에 거처하다가 승하한 곳이다.

“원균이 주장으로서 절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적들로 하여금 불의에 기습을 감행하도록 하여 전군이 함몰되게 하였으니 죄는 모두 주장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각 장사들의 공죄에 대해서도 신상필벌을 행하여 군기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변사가 이번 패전의 책임은 수군 총수인 원균에게 전적으로 있다고 선조에게 말하자 선조는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라고 답한다. 선조는 끝까지 원균을 옹호하고 있다. 선조가 이렇게 말 한 것은 원균을 천거한 이산해와 윤두수가 그렇게 말하도록 임금에게 아뢴 탓이다. 

한편 1598년 4월2일의 실록 말미에는 사관의 평가가 붙어 있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 : 기둥에 묶어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시 7월22일의 어전회의로 돌아가서 선조와 신하들의 발언을 살펴보자.

선조가 말한다. 

“만약 왜적이 움직인다면 수천에 불과한 중국 군사가 방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반드시 나를 겁쟁이라 여겨 그들의 조소를 받을 것이나 명나라 마귀 도독의 군사는 만 명도 채 못 되고 양원의 군사도 3천 명 정도이니 어떻게 남원을 지킬 수 있겠는가. 만약 왜적이 돌아서 호남 연해에 정박한다면 남원 지방 정도는 마치 큰길 가운데 손가마를 놓아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양원이 홀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중국의 군사가 많이 집결되면 서로(西路)는 그런대로 보존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하삼도(下三道, 경상·전라·충청도)는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병조판서 이항복이 아뢴다. 

“왜적이 혹 광양·순천으로 향하면 양원이 혼자 지킬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랬다. 왜군은 수륙 양군이 광양, 순천을 거쳐 구례를 지나 남원으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8월16일에 명나라 장수 양원이 지키는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다시 유성룡이 아뢴다. 

“지금은 중국의 군사를 믿을 만하지 못하니, 마땅히 남은 배로 강화도 등지를 수비해야 합니다.”

유성룡은 서울 수비를 걱정하고 있다. 이 말은 뒤집으면 전라도는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도 방어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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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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