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90446
산 사람의 코를 베어간 일본군
일본, 비전투원과 민간인을 상대로 참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러
07.12.14 09:45 l 최종 업데이트 07.12.14 09:45 l 김종성(qqqkim2000)
▲ 임진왜란 당시 남원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우키다 히데이에의 초상화. 그의 휘하에 있는 일본 군인들은 비전투원인 조선 민간인들의 코를 마구잡이로 베어냈다. ⓒ 출처: 일본 오카야마시 박물관
12월 13일 유럽의회는 제2차 세계대전(한·중 입장에선 항일전쟁) 당시 자행된 일본군 성노예(위안부)의 강제동원과 관련하여 일본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일본인들은 지겹다고 생각하겠지만, 끝끝내 사과를 하지 않는 그런 일본을 지켜보는 세계인들 역시 지겹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일본인들은 과거에는 전쟁범죄를 저질렀지만, 지금은 파렴치함이라는 또 다른 악행을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의 전쟁범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잔혹한 전쟁범죄는 비단 제2차 세계대전 때만의 일은 아니었다. 해외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일본이 잔혹한 범죄행위를 ‘상습적’으로 저질러왔다는 점은,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이 조선 민중들을 상대로 자행한 ‘코 베기’(鼻切り)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선조 30년(1597) 8월 중순의 남원전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우키다 히데이에 및 시마츠 요시히로의 일본 군대에 패해 남원성을 빼앗긴 이 전투를 목격한 ‘게이넨’이라는 종군의승(醫僧)이 이때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남원전투에서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각처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된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조선 민중들의 코 닥치는대로 베어
승려 게이넨은 <조센니치니치키>, 한자 발음으로 하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서, 전공 올리기에 급급한 일본 군인들이 조선 민중들의 코를 닥치는 대로 베어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 소속인 그는 자기네 군인들이 적국 민중들을 상대로 저지르는 행위를 보고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풍경이 벌어졌다”고 한탄했다.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살짝’ 코만 베어낸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이중삼중의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광경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 자체도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럼, 일본군은 왜 이런 잔혹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을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들의 전공을 입증하기 위한 조치였다.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만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면서 ‘전공의 증표’ 즉 조선 군인을 죽였다는 증거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전후의 논공행상을 위한 조치였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흔히 적병의 수급을 베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조선 군인들의 수급을 들고 현해탄을 건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적군의 코를 수급으로 간주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에서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내는 일에 광분했다. 전공 쌓기에 급급하다 보니, 비전투원인 민간인들의 코까지 베어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본국의 사령부에서는 전투원의 코를 베어오라고 지시했지만, 그것은 현지 부대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다. 코를 베어가면 고향에 돌아가서 잘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민간인들을 잡아서 산 사람의 코를 베어내곤 했던 것이다.
승려 게이넨이 경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의 코도 아니고, 멀쩡히 눈 뜨고 있는, 게다가 서 있는 사람의 코를 베어내는 그런 행위에 그는 경악했던 것이다. 비록 일본군 소속이긴 하지만, 그래도 승려인지라 그나마 객관적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는 이런 참혹한 형상을 보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낸 일본군은 이것을 어떻게 보관했을까? 일본에 돌아갈 때까지 그것을 보관하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군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소금물이나 식초를 담은 병에 코를 보관했다. 그리고는 병마개에 딱지를 붙여서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수급은 한 사람이 몇 개밖에 들고 갈 수 없지만, 이런 식으로 코를 보관하면 얼마든지 많은 ‘전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이 같은 끔찍한 범죄행위는 일본군이 우세한 무력을 갖고도 결국 조선에서 물러난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군이 유세한 전력에도 조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임진왜란 초기만 해도, 경상도 지방 등에서는 일본군을 반기는 분위기가 일정 정도 존재했다. <선조실록>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분위기다. 조선왕조의 가혹한 봉건적 수탈에 시달리던 하층민들이 꼭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라 조선왕조가 미워서 일본군의 침입을 환영하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에 부산에 도착한 일본군이 불과 보름여밖에 지나지 않은 5월초에 한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정 정도는 조선 민중이 일본군에게 별다른 방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핵심적인 이유는 일본군의 화력이 우수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일본군은 전쟁 초기에 조선 민중들로부터 ‘박대’를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초반의 승세가 뒤집히고 수세에 몰리면서부터, 일본군의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간인들의 코만 베어낸 게 아니다. ‘코가 멀쩡한’ 조선인들은 노예로 만들어 멀리 서유럽에까지 ‘내다팔았던’ 것이다. 부산항 같은 곳에 대기하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코가 멀쩡한’ 조선인들을 사들이곤 했다.
초반에 승세를 잡은 상태에서 일본군이 조선 민중들에게 ‘멋진’ 행동을 보인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승자는 본래 여유를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멋진 행동을 보일 수 있는 군대가 정말로 ‘멋진 군대’가 아닐까? 일본군은 자신들이 유리할 때에는 조선 민중들에게 멋지게 행동했지만,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수세에 밀린 뒤부터는 ‘동물’의 추악한 본성을 여지없이 다 보여주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만행은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조선 민중의 태도가 적대적으로 바뀌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본군은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심이 험악하게 바뀌니, 일본 군인들이 밥 얻어먹을 곳도 없어진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조·명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쫓겨난 것이지만, 그런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조선 민중들의 태도 변화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군의 추악한 전쟁범죄에 대해, 조선 민중들은 조·명 연합군을 지지하는 방법으로 응징을 가한 것이다.
위와 같이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뿐만 아니라 더 멀리 임진왜란 시기에도 비전투원인 민간인들을 상대로 참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다. 전쟁의 성패가 결국에는 민중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데, 이처럼 민중들의 가슴에 한을 심어주었으니 일본군이 어느 전쟁에서든 최종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한국·중국에서 결국 쫓겨난 것도 그들이 젊은 여성들을 포함한 동아시아 민중들에게 끔찍한 범죄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민중들이 일본을 버리지 않았다면, 항일투쟁세력에게 인적·물적 자원이 유입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8월 15일의 만세소리 역시 동아시아 민중들이 일본군을 얼마나 끔찍한 존재로 인식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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