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science/12258.html
* "[이순신1] 이순신, 내부의 적과 싸우다 - 한겨레21" 맨 위에 있는 내용과 하단에 있는 딸린 기사가 비슷한 내용이라 묶어 따로 정리했습니다.

임진왜란은 ‘노예전쟁’
▣ 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금속줄과 대나무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됐다. 적국인 전라도라고 하지만 검붉게 치솟아 오르는 연기는 마치 이런 상황을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감옥에 넣어 물을 먹이고,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달군 쇠를 대어 지지는 것은 이 덧없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본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이 왔는데 인상(人商·인신매매상)도 있다. 그들은 본진의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여 줄로 목을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댄다. 아방나찰이라는 지옥귀신이 죄인을 벌주는 것이 이와 같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다.”

왜 전라도는 처참한 지옥이 되었나

1597년 6월 일본 구주 안양사의 주지 게이넨은 우스키성의 영주 오오타 히슈우의 군의관으로 조선에 와 8개월 동안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일일기>(日日記)라는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본 조선인의 참상은 일본 전국시대의 여러 전투를 보거나 경험했을 이 승려조차 ‘난생처음 보게 된다’고 털어놓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수군의 맹활약으로 “일본군이 한치도 밟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안전했던 전라도 지역이 이처럼 1597년 이후 처참한 지옥으로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순신을 모함한 원균 등 악독한 지배층과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선조의 독단 때문이다. 선조의 명령으로 이순신을 투옥시키고 대신 원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세운 뒤 조선 수군이 1597년 7월16일 일본 수군에게 대패한 것이다. 이 패전 뒤 채 20일도 안 돼 전라도는 게이넨의 일기에 묘사된 것과 같이 살육과 방화, 고문, 인신매매, 구타 등등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뿐인가. 조선인의 코와 귀를 무더기로 잘라 일본으로 가져간 일본군의 악랄한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조선 수군의 패배 한달 뒤부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 다이묘(大名·영주)들에게 “전공의 증명은 수급의 수로 하지 않고 베어서 가져온 코의 수로 계산한다”는 군령을 내린 것이 1597년 8월이다. 당시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 돌파하지 못한 곡창지대이자 전략 요충인 전라도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로 전라도 백성의 코를 베어낸 뒤 소금으로 절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10만에 이른다고 일본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전공에 눈이 먼 일본군은 조선군은 물론 남녀노소, 승려, 노비, 초동에 이르기까지 비전투원의 코까지 무더기로 베어냈던 것이다.

나아가 게이넨의 일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조선인 포로를 대대적으로 노예로 끌고 간 시기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1597년 일본 나가사키에 들른 이탈리아 노예상인 프란시스코 가르데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매우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와서 헐값으로 팔리고 있다.”

일본으로 잡혀간 강항도 경험담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전라도 무안군에는 도적선 600~700척이 수 리에 걸쳐서 넘치고 있었으며, 그 배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왜병과 거의 반반이 될 정도다. 배마다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는 산과 바다를 흔들 정도였다.”

이렇게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 제약기술자, 금제련공, 농부, 부녀자 등 조선인이 적게는 5만명, 많게는 10만명을 헤아린다. 임진왜란 7년 가운데 ‘살육전쟁’ ‘노예전쟁’의 양상은 바로 이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이 수군 지휘관에서 물러난 시기- 에 결정적으로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꿔 말해 이순신이 그대로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조선 민중의 피해는 결정적으로 줄어들었을 수 있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일본이 포기했거나 적어도 굉장히 주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임진왜란은 ‘노예전쟁’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어느 의미에선 세계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국가와 가장 준비되지 않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150여년에 이르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세계 어떤 군대보다 전투력이 높은 상태였다. 특히 1543년 조총이라 불리는 장총을 서양으로부터 전래받은 이후 대대적으로 생산하고 실전에 배치한 상태였다. 이미 통일 되기 25년 전인 1575년 오다 노부나가군은 3천명으로 이뤄진 조총부대를 운용해 다케다 신겐군의 기마군단을 격파했을 정도다. 일부 역사가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총을 보유한 국가로 꼽기도 한다.

일본군이 울산성 전투에서 바주카포를 연상시키는 대형 화포를 사용하는 그림.
 
이런 무력을 갖춘 군대 15만8천명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당시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의 병력은 600명이었다. 7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조선인 18만5738명, 명나라인 2만9014명 등 모두 21만4752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집계된다. 특히 히데요시는 정유재란(당시 침략군 병력은 14만명 규모)을 일으키며 이렇게 명령했다.

“해마다 출병해서 그 나라 사람(조선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나라를 빈 터로 만들 것이다.”

일본은 이런 잔학극을 저지르는 한편 5만~1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무더기로 끌고 갔다. 일제의 강제 연행 440여년 전인 임란 때부터 이미 그런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을 기본적으로 ‘노예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당시 도공들이 얼마나 많이 잡혀갔는지 조선에선 거의 30여년 동안 찻잔도 제대로 생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사쓰마 등지에서 세계적인 도자기를 생산해 유럽에 대거 수출하는 등 일본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일본에 끌려간 사람 가운데 일부는 노예로서 또다시 포르투갈 등 유럽으로 팔려갔다.

전쟁 뒤 조선은 일본군의 살육과 전염병, 질병 등으로 인구가 격감해 경지 면적이 170만결에서 54만결로 크게 축소됐다.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존립마저 불투명할 정도로 내몰리고 있다. 한양의 경우 임진왜란 170년 전인 1428년(세종 10년) 11만명에 이르던 인구가 전쟁 뒤 3만8천명으로 줄어들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