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ktmpem/80011673966
원문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소설이 지닌 심각한 역사 왜곡" 에서 발췌


장계의 내용은 어떻게 세상에 전해지는가

여기서 잠깐 '장계 제도'의 문제를 짚어본다. 김탁환은 <불멸>에서 이순신을 야비하고 간교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 가장 대표적인 증거로서 '장계' 문제를 거듭거듭 거론한다. 원균이 연명장계를 보내자고 하자 이순신이 나중에 보내자고 하고 먼저 몰래 보냈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그렇게 한 이유는, 원균의 공을 빼앗느라고 몰래 장계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균이 이순신에게 "내 말 잘 들으시오. 옛 인연을 생각해서 그대에게 하는 마지막 충고요. 다시는 날 의식하지 마시오. 그대의 적은 나 원균이 아니라 부산에 웅크리고 있는 왜군들이오. 나의 전공을 훔치는 것은 용납하겠으나 내 앞에서 함께 연명 장계를 올리자느니 하는 수작은 부리진 마시오. 또 한 번 그런 속임수를 쓴다면 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오"라고 하면서 이순신이 쓴 장계 초본을 보자고 요구하는데, 이순신이 초본을 갖고 있으면서도 "초본은 없소이다." 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숨기고 계속 내놓지 않자, 원균이 "그대가 쓴 장계는 한 달 안에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오. 조정 대신들을 거치면 한 달 안에 그대가 쓴 장계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말이오.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겠소." 운운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불멸> 2, 122~124쪽)

장계는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장계가 임금에게 도달할 때까지는 장계를 쓴 사람만 그 내용을 알 뿐 다른 사람은 일체 알 수 없고, 다만 그 장계에 대한 회답인 유시가 내려왔을 때 유시 속에 언급된 내용에 의해서 짐작하거나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조정에 있는 대신들을 통해서 알아보면 한 달의 시차를 두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장계제도가 어떻게 운용되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 시대의 사료들을 분석해 보면, 자신이 보낸 장계의 내용을 즉각즉각 인근 지역 책임자들에게 통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임진장초>에는, 그런 장계운용제도에 의하여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원균 자신이 임금에게 보낸 장계의 내용을 인근 지역 책임자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는 공문 안에 그대로 다시 기록해놓고 '그런 내용의 장계를 올렸음'을 통고한 대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이순신 또한 원균으로부터 그런 내용의 공문을 받았음을 다시 임금에게 보고하는 장계를 보내고 있는 것이니, 임금과 조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가지 사안을 여러 갈래로 상호 교차하여 검증하고 확인하는 조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장초> <인왜경대변장>, 임진년 4월 15일 술시본 참조). 이것은 아마도 사실과 다른 허무맹랑한 말이 아무도 모르게 장계로 올려질 경우에 발생할 행정의 오도와 혼란과 낭비를 막기 위하여 상호교차 확인과 감시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운용했던 것이라고 파악된다.

장계제도가 그런 형태로 운용되었음은, 이순신의 죽을 죄 3가지 중에서 첫째 죄목으로 꼽혔던 '부산 왜영 대화재사건 관계'에 관련된 이순신 및 이원익측의 장계들에 의해서도 극명하게 증명된다. 당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였고, 이원익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임을 띠고 남도에 내려가서 수륙군을 모두 통괄하면서 왜적에 대한 방어를 총지휘하고 있던 이순신의 상관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거제 현령 안위 등이 사신의 복물선을 운반하는 일로 부산에 갔을 때 왜영을 불태웠다고 보고했다면서 그들의 보고 내용을 그대로 임금에게 알리면서 포상해주기'를 청한 장계가 조정에 도착한 것이 정유년 1월 1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1월 2일에, '이순신의 그 장계는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이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올린 것으로서 진상은 그와 다르다. 그 일은 이원익이 자신의 군관에게 명하여 도모하게 하여 실행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이 청한 대로 그의 부하를 포상하면 안된다'는 내용의 이원익측의 장계가 조정에 도달했다. 이원익으로부터 그런 내용을 임금에게 아뢰라는 지시를 받은 이조좌랑 김신국이 올린 보고였다. 그것을 본 선조는 "이순신이 조정을 속이려 했다"면서 격노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1일조, 1월 2일조). 다음 달에 이순신을 체포하여 서울로 끌어다가 투옥시킨 선조는, 바로 이 사건을 두고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할 죄 세 가지 중에서도 첫번째 죄로 꼽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측의 장계 내용과 두 장계가 조정에 도달한 날짜를 고찰해 보면, 그 장계를 보낸 뒤에 이순신이 상관인 이원익에게 이러이러한 내용의 장계를 임금에게 보냈음을 즉각 통고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벌어질 리 없었던 사태 진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익은 이순신 지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렬하게 이순신을 아낀 사람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그런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는 것을 이원익이 사전에 알았더라면 사실을 설명하여 그런 장계 자체를 올리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인데, 사후에 알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토록 비통한 비극의 빌미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첫 승첩인 옥포해전 뒤에 원균이 요구한 연명장계를 거부한 까닭은, '연명'이란 형식 때문이었다. 그것은 연명한 사람들이 함께 장계의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균이 주장하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한 연명 장계는 올릴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균이 그 전투에서 행한 행태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이순신은 연명 장계를 거절하고 따로 자신이 보고 겪은 바를 그대로 기록한 장계를 보내었고, 그 일로 두고두고 끈질기게 원균의 원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이 그렇게 처신한 이유는 김탁환이 주장하고 묘사한 것처럼 장계의 내용을 원균 전혀 모르게 몰래 보내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아무도 그 내용을 모르게 장계를 보낸다는 것이 제도상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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