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73087

선조가 압록강을 건넜다면 어디로 모셔졌을까?
07.11.23 14:31 l 최종 업데이트 07.11.23 14:31 l 김종성(qqqkim2000)

▲  임진왜란 10년 전인 1582년 현재의 요동 지도. 붉은 색 별표는 본문에 언급된 관전보(寬奠堡)라는 지역을 가리킨다. 관전보 아래쪽에 압록강이 보인다. 관전보 왼쪽 영역은 명나라이고 그 오른쪽은 여진족 지역이었다. ⓒ 출처: <중국역사지도집> 제7책

경상도 상주에서 이일 장군이 대패(음력 4월 27일)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선조의 마음은 매우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은 서북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한성을 버리라!’는 몽진(蒙塵)의 유혹이 선조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몽진에 대한 반발론이 강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선조 25년(1592) 4월 29일에 충주에서 신립 장군마저 대패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들어오자, 선조의 생각은 몽진으로 급격히 굳어져 버렸다. 조정에서는 아무도 그를 말릴 사람이 없었다. 선조는 어서 어서 한성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선조는 다음 날인 4월 30일 새벽에 얼마 되지 않는 수행원들과 함께 한성을 급히 빠져나갔다. 분노한 백성들이 경복궁에 방화하고 내탕고에서 금·은·보물을 약탈했다. 장예원에서도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그 안에 있던 노비문서들은 불타 버렸다.  

원망과 조소 속에서도 꿋꿋하게 임진강을 건넌 선조는 개성을 거쳐 평양성에 당도했다. 하지만, 선조 일행의 후미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단이 추격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이덕형을 보내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동강에서 협상을 해보도록 하였으나, 이마저도 결렬되고 말았다(6월 8일).

믿었던 평양성에서도 안심할 수 없게 된 선조는 6월 11일 평양을 탈출하여 영변으로 피했다가 6월 22일에 의주에 당도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이미 오래 전부터 기죽어 있던 선조는 급기야 명나라에 내부(來附)할 생각마저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을 실제로 추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내부’란 기존의 권력을 보존한다는 전제 하에서 자기 나라를 다른 나라에 들어 바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럴 경우에 기존의 영토 및 인민에 대한 종래 통치자의 권한은 그대로 인정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선조는 자신의 권력이 유지되는 전제 하에서 조선을 ‘명나라의 51번째 주’로 편입시키고자 한 것이다. 조선을 명나라에 내부시켜 명나라에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일본군을 막아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조선이 사는 길은 명나라의 51번째 주가 되는 길뿐’이라고 인식한 선조는 명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내부(來附) 의사를 타진했다. 물론 조정 내에서 반발이 심했지만, 선조의 귀에는 그런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선조를 실망시킬 만한 결정적인 첩보 하나가 입수되었다. 조선이 내부할 경우에 명나라에서 어떤 대우를 해줄 것인가 하는 첩보였다. 그 첩보의 내용이 무엇인지 또 첩보를 입수한 후에 선조의 반응이 어떠했는지에 관해 <선조실록> 25년 6월 26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듣자 하니, 천조(명나라, 인용자 주)에서 본국이 내부하겠다는 자문을 보고는 본국을 관전보(寬奠堡)의 텅 빈 관청에 두려 한다고 하자, 상(선조, 인용자 주)께서는 마침내 의주에 오래 머물기로 계획을 세우셨다.”(聞天朝見本國內附咨, 將處本國於寬奠堡空廨, 上遂爲久住義州之計.)

이에 따르면, 첩보를 입수한 선조는 내부를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그는 왜 내부를 포기했을까? 

위 실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명나라에서 내부를 수용할 것인가 여부보다는, 명나라에서 자신을 어디로 모실 것인가에 대해 일차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명나라에서 자신을 관전보라는 곳에 모시려 한다는 점 때문에 결국 생각을 돌리게 된 것이다. 

관전보라는 곳이 대체 어떤 지역이기에, 명나라에 나라를 들어 바치려던 선조가 ‘그냥 조선에 눌러 있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일까? 

지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관전보는 압록강 위쪽에 있는 군사지역이다. 그런데 그곳은 명나라와 여진족 군소정권들의 경계지역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명나라는 선조가 내부해 올 경우에 그를 최전방 지역에 ‘모시려’ 했던 것이다. 

‘아무리 조선이 일본군에게 먹힐 지경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조선 정도의 나라를 들어 바치려 하는 나에게 고작 그 정도의 대우밖에 해주지 않겠다는 건가?’라고 선조가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관전보에 있는 “텅 빈 관청”(空廨)에다가 선조를 모시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쓸모없게 된 폐가에 자신을 모시려 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선조가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선조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도 항상 자신의 체면과 권위에 매우 집착한 점들을 본다면, 위 첩보를 입수한 뒤에 선조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 것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명나라의 51번째 주’가 된다는 것은 그 같은 치욕을 감내하는 것을 의미했다. 대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뭐가 달라도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막상 자국의 기반을 포기하고 대국 밑에 들어갈 경우에는 그런 대우밖에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종래에 명나라가 선조를 포함한 조선 군주들을 인정해준 것은 ‘조선이라는 땅을 기반으로 해서 명나라를 도와 여진족 정권들을 토벌할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불량정권’들을 향한 명나라의 ‘대테러 전쟁’을 도울 만한 국토와 군사력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명나라는 조선 군주들을 대우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조선 군주가 자국의 기반을 포기하고 ‘명나라의 51번째 주’가 되려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명나라도 조선 군주를 대우해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아무리 명나라의 ‘대테러전쟁’을 도운 공로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힘이 없으면 국제사회에서는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는 강대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한국의 삶이 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시작전통제권도 환수하지 말고 또 FTA의 문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선조의 경험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막상 한국이 강대국의 51번째 주가 되려고 하면, 그때부터 한국에 대한 대우는 급전직하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미국인 총독이 따뜻한 서울을 차지하는 대신, 한국 최고지도자의 거처는 저 살벌한 알래스카의 어느 촌구석으로 옮겨지지 않을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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