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18555
임진왜란, 포르투갈이 부추겼다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17편] 일본의 군사기술 발달에 숨은 비밀
11.08.29 12:07 l 최종 업데이트 11.08.29 12:07 l 김종성(qqqkim2000)
▲ 도요토미 히데요시. 출처: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 저작권 보호기간 만료
한 방울의 물감이 대야 전체에 골고루 퍼지듯이, 지구상 한쪽에서 벌어진 사건은 지구상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이 점은 비행기나 인터넷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먼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먼 옛날에는 영향을 미치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뎠을 뿐이다.
지구상의 한쪽과 반대쪽이 오래 전부터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점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류의 생활양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라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대양주 어느 곳에서도 정치조직·종교조직·문자·무기 등이 발달한 것을 보면 그러하다.
한민족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상호작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은 임진왜란(임란)의 발발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임란 발발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살펴보다 보면, 우리는 서유럽인들의 식성이 동아시아의 임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예컨대, 41년간 단절된 중·일 무역관계를 재개하기 위해서, 여몽연합군의 침공에 복수하기 위해서, 센고쿠통일(戰國統一) 이후의 내부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봉건 영주들에게 나눠줄 토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등등의 해석이 있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임란 발발에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지만, 이것들이 다는 아니었다. 단순히 남의 집 담을 넘어야 할 사정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다 강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도가 되려면 체력도 있어야 하고 무기도 있어야 한다.
일본이 자신 있게 조선 담 넘은 이유, 군사기술에 있다
마찬가지로, 가야·백제 멸망 이래 대륙세력에 비해 열세에 처했던 일본이 조선의 담을 과감히 넘을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의 원천 중 하나는 조선보다 우월한 군사기술이었다.
흥미롭게도, 일본이 그런 군사기술을 갖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서유럽인들의 식성이었다. 서유럽인들의 식성이 일본의 군사기술 우위로 연결되고 나아가 임란 발발로 연결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 말루쿠제도(향료제도)의 위치. 출처: 고등학교 <지리부도>. ⓒ 보진재
적어도 서기 10세기 이후, 그러니까 고려시대 이후에는,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동방의 향료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았다. 동방에서 수입한 향료를 뿌려줘야만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도나 실론 혹은 말루쿠제도(향료제도, 인도네시아 동북쪽)에서 생산되는 향료의 인기는 대단했다. 유럽인이 선호하는 대표적인 향료는 후추·육두구·생강·클로버였다. 이 중에서도 후추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후추 1그램과 은 1그램이 대등하게 교환될 정도였다.
당시의 향료무역을 지배한 쪽은 이슬람과 이탈리아의 상인들이었다. 이슬람 상인들은 인도양을 통해 동남아로 가서 향료를 구매했고, 이탈리아 상인들은 레반트 지역(터키·중동·이집트)에서 이슬람 상인들로부터 향료를 구매해서 유럽 각지에 배급했다.
포르투갈·스페인 같은 서유럽의 상인들은 이런 무역구도에 불만을 품었다. 중동을 중심축으로 유라시아대륙의 동서를 잇는 세계무역에서, 서유럽은 변방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라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서유럽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중동에 접근하기 힘들었고, 동남아에는 더욱 더 접근하기 힘들었다.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일본이 임란 이전에 변방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비단길을 매개로 전개되는 중동과 동아시아의 문명교류에 대해 섬나라 일본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6세기 이전만 해도 서유럽과 일본은 2류 혹은 3류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동방으로 가는 새로운 루트를 찾아 나선 서유럽인들
에드워드 카아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한 시대의 문명 발달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집단(계급·국가·대륙·문명)은 다음 시대에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다"면서 "왜냐하면 그 집단은 이전 시대의 전통·이해관계·이념에 너무 깊이 젖어 있어서 다음 시대의 요구나 조건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이전 시대의 2류나 3류는 다음 시대의 1류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존 체제에 대해 별로 미련이 없는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고자 모든 것을 과감히 내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유럽인들도 그랬다. 이탈리아나 이슬람에 가로막혀 동방 세계와 직접 무역할 수 없었던 서유럽인들은 기상천외의 발상을 했다. 동방으로 가는 새로운 루트를 찾아 나선 것이다.
▲ 바스코 다가마. 출처: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 저작권 보호기간 만료
그들 중 일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돌아 새로운 항로를 탐색해보았고, 또 다른 일부는 '바다의 끝'이 있는 대서양 서쪽을 향해 돛을 올려보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선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미친 사람들의 짓거리에 불과했다. 그만큼 서유럽인들은 절박했다.
1497년(조선 연산군 시대)에 4척의 선박을 이끌고 포르투갈 리스본을 출발한 바스코 다가마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향료를 구하는 루트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 서해안을 돌기로 결심했다. 서유럽에서 '바다의 끝'을 향해 서쪽으로 떠난 사람들보다는 덜 미쳤겠지만, 그도 역시 미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바스코 다가마의 모험은 결국 성공했다. 그는 아프리카 해안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뒤, 1499년에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리스본에 귀환했다. 70년에 걸친 포르투갈의 국가적 숙원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탐험과정에서 이슬람인들의 방해 때문에 선박 2척과 승무원 3분의 2를 잃었지만, 서유럽인들이 갈구하는 것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약간의 향료를 입수한 것이다. 이 약간의 향료가 가져다 준 금전적 이익은, 탐험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훨씬 상회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바스코 다가마의 행운을 목격한 포르투갈인들은 너도나도 향료를 얻기 위한 도전에 나섰다.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인도양에서 이슬람세력을 축출하고, 모잠비크(아프리카 남부)에서 말루쿠 제도에 이르는 향료무역 루트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 침공의 원동력이 된 조총 2자루
▲ 다네가시마의 위치. 별표 부분이다. 출처: 고등학교 <지리부도>. ⓒ 지학사
포르투갈인들의 의지는 그들을 동남아까지 옮겨놓았지만, 그들이 간여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인이 그들을 동북아까지 옮겨놓았다. 동남아에서 발원하는 태풍이 그들을 일본에까지 옮겨놓은 것이다. 1543년, 태풍에 휩쓸린 포르투갈 선박이 일본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에 표착했다. 이 사건은 이 지역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때 포르투갈인들은 현지인들에게 임란의 단초가 될 만한 선물을 주고 떠났다. 조총 2자루를 남겨두고 간 것이다. 이렇게 전래된 조총은 적어도 1560년대가 되면 일본 군대에서 주요 무기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임란 발발 30년 전의 일이다.
조총의 확보는 가야·백제 멸망 이래 열세에 처했던 일본이 대륙을 향한 진격을 결심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런 군사기술이 없었다면, 조선의 담을 넘어야 할 사정이 있었더라도 일본이 그처럼 쉽게 '강도'로 돌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향료를 찾아 동남아에 왔다가 태풍에 휩쓸려 일본에 표착한 포르투갈인들이 주고 간 조총은, 위와 같이 일본이 조선 침공을 결심하도록 만든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임란 발발 3년 전인 1589년에 조선에도 조총이 전래되었지만, 이미 오래 전에 조총부대까지 만들어놓은 일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인들은 지금처럼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먼 옛날에는 지구상 곳곳의 상호교류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향료에 대한 서유럽인들의 욕구가 태풍이라는 우연적 요소와 맞물려 조총의 일본 전래 및 임진왜란 발발로 연결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주 오래 전부터 지구상 곳곳은 긴밀한 상호 작용을 주고받으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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