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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 없어 한장은 다른 기사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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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이순신을 하옥시키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5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5
중심 잃은 임금의 국난 중 최악의 판단
입력시간 : 2012. 12.19. 00:00
국가존망보다 선조 눈치만 보는 간신들
거짓보고로 전라도 백성들의 여론 호도
이순신이 조선에 상륙하려는 가토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이순신에 대한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난다. 경상도 현풍사람으로서 현감을 지낸 박성은 상소를 올려 이순신을 목 베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한다. 2월4일에 사헌부는 이순신을 잡아들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탄핵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통제사 이순신은 막대한 국가의 은혜를 받아 차례를 뛰어넘어 벼슬을 올려 주었으므로 관직이 이미 최고에 이르렀는데, 힘을 다해 공을 세워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은 지가 이미 5년이 경과하였습니다. 군사는 지치고 일은 늦어지는데 그는 방비하는 모든 책임을 다하지 않고 한갓 남의 공로를 빼앗으려고 기망하여 장계를 올렸으며, 갑자기 적선이 바다에 가득히 쳐들어 왔는데도 오히려 한 지역을 지키거나 적의 선봉대 한 명을 쳤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뒤늦게 전선을 동원하여 직로로 나오다가 거리낌 없는 적의 활동에 압도되어 도모할 계책을 세우지 못했으니, 적을 토벌하지 않고 놓아두었으며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한 죄가 큽니다. 잡아오라고 명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선조는 이 탄핵에 대하여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탄핵이 있은 지 이틀 후인 2월6일에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은밀히 전교한다.
“이순신을 잡아올 때에 선전관에게 표신과 밀부를 주어 보내고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오라고 말하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고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선전관에게 말하여라.”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내려졌다는 말을 듣고 가장 놀란 이는 진주에 머물고 있던 우의정 겸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었다. 이원익은 급히 장계를 올려 “왜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순신의 수군입니다. 이순신을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원균을 대신 보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하였다.
선조는 들은 체도 안하였다. 이원익은 거듭 이순신의 무죄를 역설하였으나 듣지 않자 “이 사람이 죄를 받으니 국사는 다 틀렸다”하며 탄식을 연발하였다.
2월26일에 선조가 보낸 금부도사는 이순신을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순신은 수군을 거느리고 부산 가덕도의 바다로 나가 있었는데 그를 잡아오라는 어명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 때 원균도 한산도에 와서 이순신으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았다. 이순신은 순순히 진중의 물품을 원균에게 인계하였다. 군량이 9천914석, 화약이 4천근, 총통이 300자루 등이었다.
함거에 갇힌 이순신이 소달구지에 실려 서울로 올라가자, 남녀노소 모든 백성들이 에워쌌다. 그들은 “사또 어디로 가시오. 이제 우리들은 다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울부짖었다.
1593년 7월에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후 만 3년 8개월 동안 바다를 지킨 이순신. 그는 수군들과 함께 훈련하고 토론하고 눈물 흘리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 적이 그 얼마였던가? 이런 한산도를 뒤로 하고 이순신은 죄인이 되어 떠나갔다.
이순신이 잡혀가자 호남도 위태롭게 되었다. 전라도 백성들은 한산도를 보장으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으로 믿었는데 그가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서 서둘러 피난 짐을 꾸렸다.
한편 영의정 유성룡은 2월28일에 선조에게 사직서를 제출한다. 명분은 건강 때문이었다. 선조는 사퇴하지 말고 조용히 몸조리하면서 근무하라고 전교하였다. 2월29일에 유성룡은 다시 한 번 사직서를 제출한다. 선조는 다시 윤허하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선조도 2월28일에 양위 소동을 또 벌였다. 선조가 양위하겠다고 한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는가? 국난 중에는 임금이 중심을 잡고 지휘를 하여야 하는데 걸핏하면 그만둔다고 하였으니.
이순신이 의금부에 갇히자 여러 사람들이 면회를 왔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였고, 또 조정의 중론도 엄중하여 사태를 알 수 없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걱정하였다.
이순신은 차분하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야 운명이지요,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지요” 하였다.
한편 선조는 어사 남이신을 한산도로 내려 보내어 이순신의 죄상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사실 조사를 시켰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서자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길을 가로막고 이순신이 무고하게 잡혀갔다고 호소하였다. 원통해 우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남이신은 이 사실을 알고도 이순신에게 불리한 거짓 보고를 하였다. 그는 선조에게 “들으니 적장 가토가 바다를 건너오다가 배가 섬에 걸려서 7일간이나 꼼짝 못하여 우리 군사가 가기만 가면 잡을 수 있었는데 이순신은 머뭇거리고 나가서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이날 경림군 김명원이 임금을 모시고 경연에 참석하였다가 그 보고를 듣고 “왜군들은 배를 부리는데 익숙한데 7일간이나 배가 섬에 걸렸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하자, 선조도 이를 수긍하였다.
훗날 남이신이 옥당의 당직이 되었을 때 어떤 친구가 와서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선이 7일 동안이나 돌섬에 걸렸더라는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가? 나도 그때 마침 전라도를 순시하고 있었지만 그런 말은 전혀 들어보지 못하였다네” 하니 남이신이 부끄러워했다 한다.
3월12일에 이순신은 한 차례의 고문을 받는다. 그가 어떤 고문을 얼마나 당하였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다만, 당시 병조판서 이덕형의 문집 '한음문고'에는 ‘거의 죽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1596년 8월에 팔도의병장 김덕령이 모함과 거짓증언 속에 의금부 옥에서 죽었듯이 이순신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3월13일에 선조는 이순신의 죄상을 논하면서 이순신을 죽여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전교한다.
비망기로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교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고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무함하기까지 하여 방자한 것이 거리낌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을 적용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
- 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 -
선조가 말한 이순신의 죄목은 세 가지이다. 즉 (1) 조정을 속여 임금을 업신여긴 죄 즉 부산왜영 화재 사건의 허위보고, (2)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즉 수군이 출전하지 않은 죄, (3) 남의 공로를 빼앗고 남을 무함한 죄 즉 원균의 공을 이순신이 가로챘다고 하는 죄이다. 이 3가지 죄 중에 두 번째 죄가 가장 중하다.
선조의 용인술은 하수 중에 하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를 속인 고니시를 죽이지 않고 다시 기용하였는데, 선조는 이순신을 전장에 한 번 안 나갔다고 하여 죽이려고 하니.
한편 2월26일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2월28일에 선조에게 장계를 보낸다. 그 내용은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에 시위한 것이 백해무익하였다는 보고였다. 전임자 이순신을 비난 하는 일이 원균이 한산도에서 한 첫 번째 일이었다. 정말 한심하다.
(사진 없음)
함거에 실린 이순신 기록화. 아산 현충사 사당에 있다.
의금부 터. 서울 종각 근처에 있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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