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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등이 이순신을 살려 달라고 상소하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6
70대 원로대신의 간곡한 구명상소 백미
입력시간 : 2012. 12.26. 00:00
정탁의 신구차 상소문 (용산 전쟁기념관 기획 전시 중)
뜻있는 선비들 앞다투어 백방으로 구명운동
선조 맘 바꿔 이순신 관직삭탈 후 백의종군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많은 사람들이 탄식을 하였다. 뜻있는 선비들은 그를 구명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다.
병조판서 이덕형은 혼자 선조 앞에 나아가 이순신의 목숨만은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사람을 보내어 옥에 갇힌 이순신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안부를 물었는데, 그 사람을 보내면서 울면서 말하길, "수군은 얼마 못 가서 패배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디서 죽을지 모릅니다”하였다.
이 말대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1597년 7월16일 칠천량 전투에서 몰살하고 이억기도 전사한다. 함경도에서 과거를 보러 온 지방 군사 몇 명도 이순신이 옥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이순신을 석방시켜 함경도 북병사로 임명하여 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국보 제76호).
특히 이순신의 종사관을 한 장흥출신 정경달(丁景達 1542-1602)은 선조에게 “이순신의 애국심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쟁에 나가 싸움을 미루는 것은 병가의 승책인데 어찌 적세를 살피고 싸움을 주저한다 하여 죄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임금께서 이 사람을 죽이면 나라가 망하겠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아뢰고 이순신의 석방을 간절히 주청하였다.
또한 정경달은 유성룡과 이항복을 찾아가 이순신의 구명운동을 하였다. 그들이 정경달에게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니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정경달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말로 해명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 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 중에서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통제사가 죄를 입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꼬’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한편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이순신의 가족들은 유성룡에게 그 무렵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등을 건네주며 구명운동을 벌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어찌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유성룡은 이미 2월28일과 2월29일 두 번에 걸쳐 사직서를 선조에게 올린 상태였다. 이순신을 천거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였으리라.
이순신이 국문을 당한 다음 날인 3월13일에 선조가 이순신을 처형하여야 한다고 전교하자 이순신은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형국이었다. 1596년에 김덕령이 선조의 말 한마디로 옥중에서 죽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때 72세의 원로대신 정탁(鄭琢 1526∼1605)이 이순신의 구명에 나섰다. 그는 소위 신구차(伸救箚)라고 불리는 1천298자에 달하는 장문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린다. 정탁은 이미 1월27일의 어전회의에서 이순신이 죄가 있으나 지금은 전쟁 중이니 통제사를 교체하여야 할 때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정탁은 유성룡과 마찬가지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고 이원익과 더불어 이순신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정탁은 김덕령과 곽재우를 천거한 바 있고, 김덕령이 옥중에 있을 때 그를 구하려고 했던 원로대신이었다.
정탁의 초상화
정탁의 초상화
판중추부사 정탁은 선조의 체면을 최대한 살리면서 이순신의 목숨만은 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노련한 문장으로 상소문을 올린다.
먼저 정탁은 선조의 비위를 건들이지 않고 선조를 최대한 추켜세우면서 이순신이 죄 있음을 강조한다. 상소문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엎드려 아뢰나이다.
이순신은 그 몸이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엄중하지만 전하께서는 즉각 극형에 처하지 않으시고 너그러이 문초하시다가 나중에는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이는 다만 옥사를 다스리는 체모와 순서만으로 그러시는 게 아니라 실은 전하께서 인자함을 행하시려는 일념으로 기어이 그 진상을 밝혀냄으로서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보시려고 그렇게 하신 줄로 아옵니다.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전하의 큰 덕이 죄를 범하여 죽을 자리에 놓여 있는 자에게까지 미치고 있사오니 이에 신은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사옵니다.'
이어서 정탁은 심문관으로 문초를 해 보면 진상을 더 밝혀야 할 사람도 이미 숨이 끊어져 안타까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하면서, 이순신이 이미 한차례 국문을 받았는데 또 다시 문초를 당하게 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크게 우려한다. 그러니 더 이상 이순신을 고문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한다. 이어서 정탁은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이 공이 있어 품계가 올라갔음을 강조하면서 이순신이 죄가 있긴 하나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 것은 반드시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해명한다.
'요즘 왜적들이 또 다시 쳐들어 왔는데 이순신이 미쳐 손을 쓰지 못한 것도 거기에는 필시 무슨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변방의 장수들이 한 번 움직이려고 하면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되고, 장군 스스로는 제 맘대로 못하는데,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조정에서 비밀히 내린 분부가 그때 곧바로 전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며, 또 바다의 바람사정이 좋았는지 어떠했는지, 그리고 뱃길도 편했는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옵니다.
그리고 수군의 각자 담당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은 이미 도체찰사 이원익의 장계에서도 밝혀진 바이거니와, 군사들이 힘을 쓰지 못했던 것도 사정이 또한 그러했던 만큼, 모든 책임을 단지 이순신에게만 돌릴 수는 없사옵니다.'
이어서 정탁은 지금은 전쟁 중이니 한 사람의 장수라도 필요하다고 하면서 왜적이 가장 무서워하는 장수는 이순신인데, 그를 죽이는 일은 나라에도 손해라고 완곡하게 아뢴다. 또한 정탁은 일찍이 국법에 저촉되었으나 조정에서 특별히 용서하여 주었더니 1596년 이몽학의 난 때 큰 공을 세운 충청방어사 박명현처럼 이순신이 다시 공을 세울 수 있도록 살려주라고 청하면서, 상소문을 이렇게 끝맺는다.
'비옵건대 은혜로운 전교를 내리시어 문초를 덜어주시고,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있게 하신다면 전하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박명현만 못하지 않을 것이오니, 전하 앞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에 초상이 걸릴 만한 일을 하는 신하들이 어찌 오늘의 죄수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랴 하오리까.
그러하오니 전하께서 장수를 거느리고 인재를 쓰는 길과, 공로와 재능을 헤아려 보는 법제와,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심이 일거에 이루어진다면 전하의 난리 평정하는 정치에 도움 됨이 어찌 적다고 하오리까.'
70세가 넘은 원로대신의 간곡한 청원이 선조 임금에게 먹혀 들어갔을까.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어 나라가 위기에 처한 마당에 수군 최고책임자였던 이순신을 당장에 죽인다는 것이 선조도 겸연쩍어서였을까. 여러 신하들의 상소가 있자, 선조의 마음이 다소 돌아섰다. 선조는 이순신의 관직을 삭탈하여 도원수 원균의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4월1일에 이순신은 옥에서 풀려난다. 하옥된 지 28일 만이었다. 이 날,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4월1일 맑다.
옥문 밖을 나왔다. 남대문 밖에 있는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 분, 아들 울, 사행 원경등과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해 주었고, 비변량 이순지가 와서 만나 보았다. (중략) 영의정 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좌의정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술에 취하여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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